김선호_진격의 거인: 폐허와 테러리즘

김선호(만화평론가) 먼 훗날 2020년이 어떤 해로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 우리에겐 있다. 2020년이 폐허에 지배되었다는 점이다. 2001년이 테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다면, 2020년은 무너져야 할 것과 버텨내는 것들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해였다. 2001년 테러리즘이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환하였다면, 2020년의 폐허는 무너져야 할 것과 버텨내야 할 것을 »

유미주_클럽하우스라는 기획과 그 기획의 함의들: 상품화된 분리불안과 유명세가 흩뿌리는 정보들을 중심으로

유미주 * 본 고는 2월 18일에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00최근 한국에서는 클럽하우스에 대한 아티클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클럽하우스의 초대 제도와 발언권 부여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클럽하우스를 직접 사용해보면 누구나 그러한 비판들이 상당히 피상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고는 클럽하우스 국내 초기 사용자로서의 경험을 직접 분석하여 이 »

박시내_비엔날레에 대한 짧은 에세이 : 타이베이 비엔날레를 바라보는 여행자의 관점

박시내 * 나는 작년에 한 비엔날레 사무실에서 일했다. 비엔날레는 코로나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고, 일찌감치 모든 행사를 1년 뒤로 미루었다.(그러면 그것을 정말로 “비엔날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록 다운된 영국에서 일하는 감독을 단 한 차례도 대면으로 만나지 못했다. 그의 한국 항공편은 여러 번 취소되고 다시 예약되었으나 그는 결국 입국하지 못했다. »

이현수_미완결의 기호학: <언컷 젬스>를 중심으로

이현수 l 이 혼란스럽고 요란하며 포악한 사건사고의 연속은 매우 단순하게도 주인공이 제정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보로 우리를 공격해온다. 관객은 주인공인 하워드가 정신 차라기만을 바란다. 만약 우리의 바람이 없다면 <언컷 젬스>는 성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침투해 올 병균의 위협보다는 이미 감염된 무언가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단지 하워드가 직면한 역경을 회피했으면 하는 바람이 »

윤형신_‘로팅(盧亭, Lo Ting)’ : 홍콩인의 정체성 표상

2019년 홍콩 항쟁 2년 후 서로 다른 시공에 떠오른 반인반어(半人半漁)의 이미지 0000영국으로부터 중국으로의 반환을 한달 앞둔 1997년 6월, 홍콩의 한 전시장에는 두 발로 걷는 물고기 형상의 생명체가 등장했다. 이집트의 석상과 같이 정면을 향한 채 한 발을 앞으로 내민 괴생명체는 금방이라도 전시장 밖으로 걸어나갈 듯한 모습이었다(도판 1). 푸른 빛이 감도는 그는 »

Jessie Yoon_안전한 선 안에서 선 넘기

안전한 선 안에서 선 넘기 카운터테너 최성훈에 대한 대중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이성애중심주의적 남성성의 규범 Jessie Yoon(젠더연구자) 최성훈은 카운터테너이자 JTBC 팬텀싱어 3의 우승팀인 라포엠의 멤버이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거쳐 평생 클래식을 공부했고, 카운터테너라는 생소한 성부에 대해 설명을 요청하면 그는 “가성대를 기반으로 비강과 몸의 다양한 공명을 활용해서 여성 음역대의 소리를 내는 남성 »

가쇼이_전우진 개인전 <듀얼채널 왁싱숍>(2020) 리뷰: 입던 팬티 팔아요…

가쇼이(작가) * 이 글은 전시에 비평적으로 응답하는 소설입니다. 전시를 관람하며 습득한 인상과 정보를 바탕으로 자료를 모아 가상의 팬티팔이 A를 만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화자가 그의 일상을 카메라로 포착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캠코더를 들었다. 거실 유리창 너머로 눈이 내린다. 주차장과 놀이터를 조용히 뒤덮는다. 아이들이 입김 내뿜으며 눈덩이를 굴린다. 따라 나온 어른은 »

조영찬_이환희 그림 비평 : 그림자, 암(暗), 암흑물질, 선긋기

조영찬 이환희‧박미선 공동 전시에 출품된 이환희 작가의 그림에 대한 비평입니다. ‘이환희 작가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기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였습니다. 이기쁨 씨가 하는 말은 모두 조영찬 씨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이기쁨은 이환희 작가의 이름과 최대한 비슷하게 지었습니다.   (기침 소리) 나: 이환희 씨의 그림에는 관람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말씀인데요. 이기쁨 »

한혜인_무심코에 대하여

한혜인 훗날 우리는 온 국가가 공통적으로 처하게 된 위기상황과 그에 따라 새로 성립된 생활양식을 떠올릴 것이다. 사재기, 휴지 대란, 기름값의 급락, 마스크 착용의 의무화와 그 효용에 대한 엇갈린 논의 등 전에 없던 해프닝들이 표지가 되어 후에 동세대 간의 유대를 부흥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아직도 ‘예외적’으로 여겨지는 이 상황이 종식된다면 말이다. »

오혁진_로돌프 퇴퍼: 낭만주의의 명령, 만화를 융합하라

오혁진(만화 평론가) 19세기 스위스 태생의 로돌프 퇴퍼(1799~1846)는 현대 만화의 아버지 또는 최초의 만화가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그를 카툰 화법과 칸 경계선을 도입했고, 글과 그림의 상호작용 조합을 선보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퇴퍼가 만화적 요소를 새롭게 발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화의 기원은 이보다 더 먼 과거로 소급될 수 있으며, 비록 만화로 »

조남혁_구조로서의 기호

조남혁 싫어함의 욕구는 자유에 대한 지향이다. 좋아함의 욕구는 내가 좋아하는 대상 역시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욕구를 수반한다. 즉 상호적으로 귀결되고 해소된다. 반면 싫어함의 욕구는 대상에게 해를 끼치는 나의 주체적 행위로 해소된다. 그 틈에 대상의 의지는 배제되어 있다. 싫어하다는 대개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타자가 가진 나와의 차이점을 검토해 증오하는 »

안세진_자소서를 쓰지 않는 주체

안세진 (1)   지난달 친구 K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넌 너무 과거를 기록하려고 해.” 나는 몇 주 전부터 올해도 어김없이 늦기 전에 연말 결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방금 델로이 에드워드와 프로미스나인 중 어떤 걸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가 문득 K의 말이 기억나 연말 결산을 아슬아슬하게 정지했다.   »

조재연_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조재연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

김신_사실이 이야기를 대체한 시대의 코로나19 보도에 관한 단상

김신(sans_soleil@naver.com) 미국에 사는 사촌 형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회사의 동료 직원들이 근래에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혼돈을 겪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성공적인 방역선을 긋고 있는 한국의 국가기관과 시민들…… 너희들은 ‘K-방역’이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후보에 올랐다…… 너희 나라는 지금 그야말로 글로벌한 시기의 대상으로 부상했다는 말을 귀에 »

이여로_장르로서의 에세이

이여로 들어가며 이 글은 「독립출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서 언급한 한 대목, 독립출판이라는 유통 방식에서1) 삭제될 수 있는 한 요소인 ‘검열’에서 시작할 수 있다. ‘검열’은 우선 중립적인 단어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는 검열에서 분명히 힘의 장이 펼쳐지는 것을 본다. 문제는 장의 형태이며, 그 장을 거쳐 나온 것들의 값, 혹은 그 장이 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