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로_I will have a glory about joke┃전보배, 송명진 2인전에 부쳐

이여로 1. 내가 거부하지 않은 이 물질 앞에서, 나는 상상과 기억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가 기억이라 부르는 말속에서, 나는 방향을 구분하지 못한다. 방향 감각의 상실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구분의 한 가지 방식을 포기한다. ‘못함’, ‘상실’, ‘포기’의 이어지는 선언들 다음에 나타난 것들은 덜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있다. 권리상으로만 존재하던 것들. <I had »

FLORENCE SMITH NICHOLLS_글리치를 불태워라? : 디지털 퀴어에 대한 고고학

BURN THE GLITCH? AN ARCHAEOLOGY OF DIGITAL QUEERS 글: FLORENCE SMITH NICHOLLS 번역: 나원영 도입 글리치는 디지털 해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들의 아날로그적 등가물처럼, 글리치는 살짝 불편한 정도부터 피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범위지어질 수 있다. 로딩 에러, 벽 뚫기1), 그리고 플레이를 완전히 종료시키는 결과를 낼 정도로까지 게임을 파괴하는 글리치가 그러한 »

조재연_미적 유기체로 아버지┃안부: 잘-못-하다

1 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

조재연_폐허의 연인┃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1 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

유미주_젊음을 포르노그라피화 하는 트로트 예능

유미주 근래의 트로트 예능들의 역함이 도를 지나쳐서 견딜 수가 없다. 이 유행의 시작이었던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은 나았다. 이 기획의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기에, 기존에 유명세를 얻지 못했던 트로트 가수들이 참여했고 그 결과로 실제로 빛을 보지 못했던 가수들이 대거 미디어의 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대우 받기 마땅한 이들이 대우 받게 되었다. 문제는 »

강미정_서평: 『존재의 지도: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

강미정 21세기에 접어든 후 서구 철학계 일각에서 ‘비인간 전회’(the nonhuman turn)의 물결이 형성되었다. 비인간이라는 화두는, 인간너머의 존재에 관한 포스트휴머니즘 및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유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질시대를 인류세라고 명명한 생태학적 위기감과 더불어 부상했다. 현재 진행 중인 비인간주의로 향한 흐름 가운데는 ‘사변적 실재론’ 또는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을 표방하며 철학의 물줄기를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으로 바꿔 »

서운_어둠 속의 대화 관람기 : 당신의 감각에 질문을 던지는 하루

서운 비가 끝도 없이 내리는 하루를 50일 동안 당연하게 살았다. 비가 오는 풍경을 일상적으로 바라보며 흘려보냈는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자 빗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빗물이 창을 통과해 내 얼굴에 뿌려졌으며 비릿한 냄새를 동반했다. 비는 눈을 지나쳐 느낌으로 왔으며 귀와 코에 스며들어 몸의 감각을 자극했다. 바이러스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거나 혹은 우리와 함께 »

윤태균: 포스트모더니즘의 잔해들┃조형성과 텍스트

윤태균 1. 조형성(formativeness)과 텍스트(text)는 발생론적 측면에서 불가분한 관계를 갖는다. 2. 조형성과 텍스트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거의 미학적 도식들 중 단계적 논의를 위해 살펴볼 만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질료(matter)와 형상(form) 개념이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실체(substance)는 책상이라는 개념적 형태, 즉 형상과 나무라는 질료로 구성된다. 이때 형상은 유비적 본질로서 질료가 최종적으로 환원되고자 하는 지점이다. 환원의 »

조재연_생쥐와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다┃유태영: 그날, 문을 열다

1 몇 번이나 몽상을 했다.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 훼방을 놓았던 그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렇게 했거나 하지 않았더라면. 이쪽을 선택하는 대신에 저쪽을 선택했더라면. 그리고 그 시점에서 물러났더라면. ‘만약’의 층위는 나를 꼴사납도록 만드는 »

정강산_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와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와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1) 정강산 *직접인용문 내부의 ‘[]’는 모두 인용자의 주이다. 1. 퀑탱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에서 그가 “선조성”이라 부르는 것, 즉 칸트적 상관주의2)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거나 상관주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사유 발생 이전의 과학적 사실로서의 실재를 사유할 필요를 역설하며, 칸트의 이성비판으로 열린 공간을 »

오정은_미술비평,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ㅠㅠ

오정은 비 오는 어느 날,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좌석에 앉아 ‘미술비평’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예술인이 된 이후, 비평은 이제 생계를 위한 거의 절대적인 도구가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미술비평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는 없지만, 글을 씀으로 인해서 이따금 돈을 벌고 드물지만 가끔 문화예술계에 소개되고 »

윤태균: 우리는 디지털 양의 꿈을 꾸는가? : 펜데믹과 디지털 리터러시 그리고 웹 전시

윤태균 (예술학) 1. 지금은 ‘코로나-이후’인가? 이전의 모더니즘은 스스로의 가치를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에 두었다. 모더니즘의 지향성은 과거에 대한 성찰이 아닌 미래와 예술에 있었다. 미래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보이듯, 미래는 모더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쫓아야 할 종착지였던 것이다.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와의 연계점을 찾는 모더니즘의 시도들은 자신의 시간을 곧 서술될 역사의 한 부분에 배치하고자 했다. »

조재연_기억을 딛고 얻은 망각_남지연: Story(story)story))

1 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

엄제현_거식증을 앓는 세계

엄제현 먹방의 범람은 어떤 사회적 징후일까? 단지 구강기적 시기로의 퇴행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퇴행은 결과적인 표현태이지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이라 볼 수 없으니까. 먹는다는 행위는 개체의 생식을 넘어선 범주로, 청소년기에 흔히 있는 단식투쟁이 이를 뒷받침할 예랄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단식을 통한 부모에 대한 반항은 그들을 직접 겨냥하지 »

서운_오민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 관람기: 불투명한 소음을 통해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서운 예측 가능한 사실이 다가오고 있다. 예측이 실현되는 순간 예측은 사라지고 현실로 다가오는 공포가 있다. 그것이 어떤 절망의 한 조각일 수 있고 어둠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집중하는 고통을 짐작하기 어렵다. 특히, 그것이 보이는 현실 공간에서는 고통이 희석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노동의 신성함을 주장하지만 숨어 있는 노동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