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혁진_로돌프 퇴퍼: 낭만주의의 명령, 만화를 융합하라

오혁진(만화 평론가) 19세기 스위스 태생의 로돌프 퇴퍼(1799~1846)는 현대 만화의 아버지 또는 최초의 만화가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그를 카툰 화법과 칸 경계선을 도입했고, 글과 그림의 상호작용 조합을 선보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퇴퍼가 만화적 요소를 새롭게 발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화의 기원은 이보다 더 먼 과거로 소급될 수 있으며, 비록 만화로 »

조남혁_구조로서의 기호

조남혁 싫어함의 욕구는 자유에 대한 지향이다. 좋아함의 욕구는 내가 좋아하는 대상 역시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욕구를 수반한다. 즉 상호적으로 귀결되고 해소된다. 반면 싫어함의 욕구는 대상에게 해를 끼치는 나의 주체적 행위로 해소된다. 그 틈에 대상의 의지는 배제되어 있다. 싫어하다는 대개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타자가 가진 나와의 차이점을 검토해 증오하는 »

안세진_자소서를 쓰지 않는 주체

안세진 (1)   지난달 친구 K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넌 너무 과거를 기록하려고 해.” 나는 몇 주 전부터 올해도 어김없이 늦기 전에 연말 결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방금 델로이 에드워드와 프로미스나인 중 어떤 걸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가 문득 K의 말이 기억나 연말 결산을 아슬아슬하게 정지했다.   »

조재연_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조재연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

김신_사실이 이야기를 대체한 시대의 코로나19 보도에 관한 단상

김신(sans_soleil@naver.com) 미국에 사는 사촌 형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회사의 동료 직원들이 근래에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혼돈을 겪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성공적인 방역선을 긋고 있는 한국의 국가기관과 시민들…… 너희들은 ‘K-방역’이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후보에 올랐다…… 너희 나라는 지금 그야말로 글로벌한 시기의 대상으로 부상했다는 말을 귀에 »

이여로_장르로서의 에세이

이여로 들어가며 이 글은 「독립출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서 언급한 한 대목, 독립출판이라는 유통 방식에서1) 삭제될 수 있는 한 요소인 ‘검열’에서 시작할 수 있다. ‘검열’은 우선 중립적인 단어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는 검열에서 분명히 힘의 장이 펼쳐지는 것을 본다. 문제는 장의 형태이며, 그 장을 거쳐 나온 것들의 값, 혹은 그 장이 담을 »

홍태림_신생공간 이후의 시간을 위한 제언

홍태림(미술비평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2/W에서 열린 《호버링Hovering》(2018.1.6~2018.3.18)의 연계 출판물인 『호버링 텍스트』(2019)의 서문에는 신생공간에 가담하지 못한 1990년대생 미술생산자들이 폐허1)가된 미술계를 가로지르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따라서 『호버링 텍스트』는 서울의 일부 1990년대생 미술생산자들이 신생공간이 방전된 이후에도 여전히 폐허인 미술계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집적한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호버링 »

김선호_웹툰 2.0 : 플랫폼 가속주의

김선호(만화평론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웹툰 업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 대해 논평을 하는 일의 어려움 말이다. 먼저 한국에서 웹툰이 본격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자면, 아무래도 스마트폰이 보급된 2010년 무렵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본다면 2020년을 기준으로 웹툰의 역사는 고작 10여 년에 불과한 »

이용준_제주 개발 논쟁에 대한 생각

이용준 최근 제주는 관광객 수용문제, 환경파괴, 제2공항 건설사업 등, 개발을 둘러싼 논쟁으로 뜨겁다. 이 글은 제주 개발담론을 생산하는 자본과 싱크탱크, 그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개발 논쟁은 주민들의 토지수호와 보상금 문제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개발은 단순히 제주를 파괴하는 데 멈추지 않고, 제주를 파괴할 주체를 재생산한다. 따라서 개발 논쟁은 »

박동수_세계를 응시하는 복수의 눈,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박동수 *<그라이아이:주둔하는 신>은 서울독립영화제(11/26~12/4)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그라이아이(Γραῖαι)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데니오, 에니오, 펨프레도 세 노파의 이름이다. 메두사의 언니이기도 한 이들의 이름은 각각 ‘무서운’, ‘호전적인’, ‘놀래키는’이라는 뜻을 지닌다.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은 하나의 눈을 돌려 끼우며 살아간다. 정여름의 <그라이아이:주둔하는 신>(이하 <그라이아이>)은 행군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

임현영_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기까지’ -이정식 개인전 ‘이정식’ 관람기-

임현영 이정식의 세 번째 개인전 ‘이정식’. 작가의 이름을 딴 제목처럼 ‘이정식’전은 이정식이라는 사람에 관한 전시다. 2013년 HIV/AIDS 감염 사실을 공표한 이후로, 그는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HIV 감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첫 번째 개인전 ≪nothing≫에서 작가는 감염인으로서 자기 몸이 자각하는 변화를 시각화-캔버스에 약가루 안료를 덧씌운다거나, 엽서 가득 복약 시간을 »

이여로_I will have a glory about joke┃전보배, 송명진 2인전에 부쳐

이여로 1. 내가 거부하지 않은 이 물질 앞에서, 나는 상상과 기억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가 기억이라 부르는 말속에서, 나는 방향을 구분하지 못한다. 방향 감각의 상실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구분의 한 가지 방식을 포기한다. ‘못함’, ‘상실’, ‘포기’의 이어지는 선언들 다음에 나타난 것들은 덜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있다. 권리상으로만 존재하던 것들. <I had »

FLORENCE SMITH NICHOLLS_글리치를 불태워라? : 디지털 퀴어에 대한 고고학

BURN THE GLITCH? AN ARCHAEOLOGY OF DIGITAL QUEERS 글: FLORENCE SMITH NICHOLLS 번역: 나원영 도입 글리치는 디지털 해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들의 아날로그적 등가물처럼, 글리치는 살짝 불편한 정도부터 피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범위지어질 수 있다. 로딩 에러, 벽 뚫기1), 그리고 플레이를 완전히 종료시키는 결과를 낼 정도로까지 게임을 파괴하는 글리치가 그러한 »

조재연_미적 유기체로 아버지┃안부: 잘-못-하다

1 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

조재연_폐허의 연인┃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1 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