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박불똥을 다시 읽기 위한 포석(布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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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불똥, 1985-2016》 展 포스터, 디자인: 강나현

나는 박불똥의 작품을 대학교 미술사 수업 때 한 참고서적의 도판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그 도판은 성조기가 코카콜라병에서 솟아오르거나 태극기 한가운데를 뚫고 나오는 <코火카炎콜甁라>(1988) 이었다. 당시 나는 국내외 사회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작품을 보면서 까닭 모를 위화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작가 이름이 매우 특이해서 <코火카炎콜甁라>와 박불똥은 한 묶음으로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걷어내게 된 계기는, 주한미군 기지를 평택시 대추리로 이전하는 문제로 불거졌던 대추리 사태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문제로 촉발된 광우병 사태였다. 20대 초반에 대추리, 광우병 사태를 목격하면서 한국이 사실상 미국의 신식민지임을 피부로 체감하게 되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러한 현실로 인한 자조감을 빈번히 곱씹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태극기를 뚫고 나와 반쯤 불태워진 성조기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박불똥의 작품을 참고서적에서 본 지 대략 10년 정도 지난 2014년 겨울 어느 날, 나는 박불똥과 첫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지느러미의 벌거벗은 성찰』(현실문화)을 작가에게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30년 가까이 된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들은 익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상태로 매번 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박불똥의 창작활동 전반을 고찰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막연히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 175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을 기획할 기회가 생겼고, 이로써 ‘박불똥 다시 읽기’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1984년 데뷔 이래 30여 년 경력이 쌓인 작가 박불똥을 지금 새삼 되짚어 보는 일은 그의 작품들, 특히 80년대에 발표된 초기 포토몽타주 작품들이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어떤 미적, 실천적 가치를 지녔는지 되살피는 작업이다. 이 작업의 전제 단계로, 포토콜라주(photo collage)와 포토몽타주(photo montage) 두 용어가 혼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불똥의 작품을 포토콜라주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포토몽타주라 불러야 할지에 대한 문제부터 먼저 정리해 보고자 한다.

포토콜라주? 포토몽타주?

포토콜라주의 가장 가까운 시원은 일상적 사물을 평면 위에 부착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1)(1912)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Mary Anne Staniszwski)는 피카소의 가장 큰 공헌이 입체파가 아니라 콜라주이며 콜라주가 순수회화의 성역을 파괴하고 심미화한 회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보았다. 또한, 피카소가 대량생산된 사물을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미술가와 창작물들 사이의 전통적 관계 일부를 포기했다고 평하기도 했다.2) 이런 점에서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은 포토콜라주의 발달과 관련지어 볼 점이 있다.3) 피카소의 콜라주와 더불어 다다(Dada)운동도 포토콜라주와 관련해서 참고할 만하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함께 나타난 다다운동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전통을 거부하고 예술장르의 해체와 융합을 시도하며 기존 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다다운동은 국제적인 활동으로 진전된 이후에 베를린과 베른, 파리, 쾰른 등지로 분화되었다.4) 이즈음 뉴욕에서 활동하며 다다운동과 유사한 경향을 드러냈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예술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의문시하면서 일상적 사물을 작품으로 탈바꿈시킨 <샘>5)(1917)을 발표했다. 이처럼 일상적 사물이 작품의 일부나 전부로 인식되는 경향은 대중매체 속 사진들도 작품에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결국, 뒤샹의 <샘>은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과 더불어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내재한 형식 등장에 대한 전조였다고 볼 수 있다.

포토콜라주 기법은 1920년대 베를린 다다 작가들과 러시아 생산주의(Productivism) 작가들에 의해서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베를린 다다 작가들6)은 포토콜라주라는 용어 대신 포토몽타주7)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포토콜라주와 포토몽타주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이들은 포토몽타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일까. 지금도 포토콜라주와 포토몽타주에 대해 일반적으로 합의된 정의는 분분하기에 이 두 가지 용어는 종종 혼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호소력을 중시한 베를린 다다 작가들은 포토콜라주 작품과의 차이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포토몽타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 베를린 다다의 몇 작가들은 현대화된 대도시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엽서, 광고, 신문 같은 대중매체로부터 이미지들을 잘라내 기존의 인식을 강렬하게 뒤틀어버리는 정치풍자 이미지를 창작했다. 확실히 이들의 포토몽타주는 러시아의 영화이론가이자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zenshtein)이, 영화의 기본단위인 숏(short)과 숏을 충돌시켜 제3의 의미를 창안함으로써 현실과 다른 영화적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수용자에게 시각적 리듬과 심리적 감동을 자아내는 기법으로 몽타주 효과를 파악한 것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9) 왜냐하면 베를린 다다 작가들에 의해서 창안된 포토몽타주들은 한 화면에서 무질서와 조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용자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감각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다다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포토몽타주 기법을 응용한 운동이 있었다.10) 1917년 10월 혁명은 러시아 예술이 미적인 정신성이나 자율성 밖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체화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러시아에서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생산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장우인의 「혁명의 깃발-러시아 아방가르드와 포토몽타주」를 살펴보면, 예술과 일상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 러시아 구성주의는 예술 통합의 실험들이 추상적인데다가 기능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 집단적 수용에 이르지 못했고, 따라서 부르주아적 형식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구성주의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23년에 생산주의 예술가 그룹 레프(Left Front of the Arts)가 창립되었고 여기에 구성주의자들도 합류했다.11)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베를린 다다의 게오르그 그로츠(Georg Grosz)와 존 하트필드의 작품을 찬양했듯이12) 생산주의자들에게도 포토몽타주는 대중성을 담보하며 수용자와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방법론으로 여겨졌다. 이들도 다른 매체의 사진이나 글자를 이용해 정치적인 목적과 내용에 맞는 포토몽타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생산주의자들의 포토몽타주는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작품에 넣을 표어도 정부가 미리 결정한 것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할 상황에 빠졌다.13) 심지어 아동문학의 포토몽타주 삽화조차 정부가 정해준 지침에 따라서 제작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14)

베를린 다다나 러시아 생산주의의 포토몽타주가 과거 형식주의 경향의 포토콜라주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공통점은 사진매체의 현실성과 대중성을 높게 평가하여 이를 정치적 풍자 및 선동에 적극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인 현실성과 그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 불특정 다수 감상자와 교감하는 대중성은 큰 틀에서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에도 해당한다. 박불똥의 포토몽타주가 현실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1980년대 당시의 엄혹했던 정치적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풍자한 <악몽>(1985) 연작, <사령관 각하의 부스럼>(1989), <사령관 각하의 용두질>(1989), <코火카炎콜甁라>(1988), <국가보안법 철폐-내 아들을 돌려다오>(1988), <쥐法官의肖像>(1989) 같은 작품들을 살펴보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에는 분명 현실성이 전제되었지만, 그가 두렁15)이나 광주자유미술인협회16) 동인들처럼 물리적 현장에 중심을 둔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대중성의 성취 여부는 단언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박불똥이 미술계 밖의 현장을 다시 미술 안으로 틈입시키기 위한 방법을 꾸준히 고민해왔던 만큼 『노동자들을 위한 화보 신문』(Arbeiter Illustrierte Zeitung)17)에 포토몽타주를 실었던 존 하트필드처럼 그가 <한겨레>(1991), 『뉴스플러스』(1996~8), 『당대비평』(2002) 같은 예술계 밖의 다양한 매체18)를 통해서 포토몽타주를 연재한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박불똥의 포토몽타주가 대중성을 성취했는지는 확언하기 어렵더라도 그가 포토몽타주를 통해서 대중성을 지향했던 태도마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는 베를린 다다나 러시아 생산주의의 포토몽타주 흐름과 직접 결부된 것이 아니므로 독일과 러시아의 포토몽타주를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와 굳이 같은 맥락으로 끼워 맞출 이유도 없다. 다만 역사적 필연성 속에서 발생한 서구의 용어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고 그것들이 서로 상이한 점이 있다면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한지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다. 사실 박불똥도 포토콜라주와 포토몽타주를 딱히 구별하지 않고 혼용한다. 그러나 베를린 다다, 러시아 생산주의 작품들에서 공통으로 추출할 수 있는 현실성과 대중성이 박불똥의 창작활동에도 중요한 기준점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포토몽타주라는 용어만 사용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현실성과 대중성 그리고 현장

포토몽타주는 국내에서 박불똥이 최초로 사용한 기법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학철이나 현발(현실과 발언)19) 동인이던 성완경도 포토몽타주 작품을 박불똥 보다 앞선 시기에 발표한 바 있다.20) 그런데 왜 박불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포타몽타주 기법을 줄곧 고수해온 것일까. 포토몽타주에 흔히 사용되는 신문, 잡지, 포스터의 사진들은 하나의 화면 안에 다양한 시점과 공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포토몽타주는 수용자에게 친숙하면서도 매우 낯설게 다가가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포토몽타주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특성이 박불똥이 포토몽타주를 지속해온 이유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박불똥이 포토몽타주를 선호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포토몽타주에 관련된 박불똥의 예술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박불똥은 자신의 포토몽타주가 결국 ‘못-쓸-것’이 될 수 있음을 예감했다. 어쩌면 그는 못 쓸 것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회화로 완전히 전향하는 방법을 고려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박불똥은 비교적 작업시간이 많이 걸려 현장대응력은 현저히 떨어지면서도 내구성 있는 물질로서 미술시장에서는 환대를 받는 회화 매체에 대해 줄곧 경이원지(敬而遠之)의 태도를 취해왔다. 그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내용을 담은 회화작품일지라도 그 그릇21)의 귀속처가 결국 자본으로 제한되고 마는 회화의 속성을 주시했던 것이다.

박불똥이 회화작업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실은 그가 김동일, 양정애와 진행한 대담에서도 드러난다. 그 대담에서 박불똥은, “미술이란 게 물감 갖고 장난질이나 치는 이따위 것이면 나랑은 상관없다 싶었던 거예요. 태어나서 자라며 보고 듣고 느낀 내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에 적합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이거나 뭐 딴 거라고 생각했어요.”22)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전시장 미학과 현장 미학의 양 축을 두고 벌인 민중미술의 논쟁에 관해서는,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현장’에 착지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최소한 현장을 주시하는 긴장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다들 시장논리에 너무 휘둘린 나머지 아예 현장성의 ‘초점’ 자체를 잃어버린 느낌이에요.”23)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회화 매체는 미술시장에서 미술품으로 소구되는 것을 전제로 한단 말이죠. 그런 점에서 두렁 방식24)이 옳다고 봐요.”25)라고 말한 것도 그의 예술관을 잘 반영한다. 실제로 박불똥은 포토몽타주 작업을 고집함으로써 미술품 일반이 갖기 마련인 원작성을 지양하고 동시에 현장과의 긴장관계를 지향해왔다.26) 그것은 작가정신의 무분별한 시장화에 대한 경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도 원작성을 전적으로 떨쳐버리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박불똥은 화랑의 권유로 유화를 그려서 판매한 적이 있고, 신세계갤러리의 《Reproductive 오리지널》(1993) 초대전 때는 오프셋 프린트(Offset Print)들에 에디션 넘버링과 사인을 하고 45점씩 세트로 묶은 ‘상품작품’을 다량 판매하기도 했다. 당시 박불똥은 그 복제물에 ‘다산성 원작(Reproductive Original)’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은 판화와 아트 포스터(Art Poster)의 중간 단계 성질로, 최소한의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미술품에 내재된 원작성을 최대한 탈각하고자 도출해낸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박불똥은 원작성의 효용을 완전히는 기각하지 않고 다만 작품의 원작성이 행사하는 독점적 권력을 얼마만큼 분산시킬 수 있는지 일종의 실험을 했던 셈이다.

현실성과 대중성이 거세된 채 시장논리에 포박당하는 회화를 박불똥은 강박이리만치 외면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포토몽타주 기법을 고수해 왔음이 그의 여러 발언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런데 포토몽타주 자체가 현실성과 대중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박불똥은 창작활동에서 현장을 향한 긴장감은 나름대로 유지한 편이지만, 현장에 밀착된 연대를 기반으로 공동창작을 펼친 두렁 동인들만큼 현실성과 대중성을 선취하지는 못했다. 그러한 역부족은 박불똥의 포토몽타주가 미술계 자장 바깥의 신문이나 잡지 매체에 연재된 몇몇 예외적 경우 말고는 대부분 전시장을 통해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생겨난 한계였다. 그러니까 박불똥은, 긍정의 면으로 봤을 때 전시장과 현장의 중간 지점에서 늘 현장을 고심했던 작가였고, 부정의 면으로 보자면 전시장과 현장 사이에서 어중간한 성과를 냈던 작가였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박불똥의 포토몽타주에서 현장과 결부된 현실성은 미술 바깥만이 아니라 미술 안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민중운동과 관련하여 현장이라 부르는 공간은 공장, 농어촌, 탄광, 거리집회같이 일반화된 장소다. 박불똥은 자신의 현장을 어디로 삼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당장 몸과 마음이 머무는 ‘지금, 여기’를 현장으로 간주했다. “현장이 쟁점이 될 때마다 부대끼는 거예요. 나는 그럼, 내 현장을 어디로 할 것이냐? 위장취업27)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너희가 말하는 기층의 도시빈민으로 이미 나는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현장, 그거 다 내가 거쳐 온, 경험한 일들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회학의 내포와 외연으로 맥락화해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내 삶 자체가 생짜배기 민중, 바로 그거였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나는 지금 여기, 마침 80년대 미술을 만나 이러고 있는데, 이제 거꾸로 현장이 문제가 된다고 시방 나한테 그러냐? 더 말하지 마라. 내 현장은, 현재 내 심신이 서 있는, 그냥 ‘여기’다!”28) 현장은 만인에게 공통된 개념일 수 없고 개인의 숙고와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현장을 더 확장한다면 공장이나 농어촌, 거리집회 같은 곳뿐만 아니라 일반화된 현장과 박불똥 사이에 끼어있는 미술계도 충분히 포괄할 수 있다. 이처럼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는 확장된 현장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물리적 현장과 직접 맞물리지 않는다고 현실성과 대중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1980년대 한국사회의 욕망과 박불똥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는 내용적으로도 일반적인 민중론보다 다층적인 관점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와 관련하여 서동진은 박불똥이 “민중미술이 비변증법적인 이미지의 세계, 즉 충만한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으로서의 민중의 표상이라는 유혹에 떠내려갔을 때, 그것에 표류하지 않았던 희귀한 작가였다.”29)라고 평하기도 했다. 80년대 민중론은 역사의 주체이자 근원이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 강인하게 투쟁하는 민중이라는 시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화, 낭만화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두렁처럼 현장지향성이 강한 창작집단일수록 더 강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1980년대의 마당극도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남희는 『민중 만들기』에서, 민중이 으레 그 강인함과 호탕함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등성과 실패마저도 극복한다는 진부한 설정이 마당극의 암묵적인 전제인데, 이러한 전제는 예술이 지닐 수 있는 비판과 저항의 기능을 오히려 약화시킨다고 보았다.30) 한국의 198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이념이 거세게 충돌했던 시기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은 사회주의 운동을 지향했던 학생운동의 급진성을 대중운동으로 전환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자유주의 이념에 밀려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31)

이념적인 측면 외에도 국가를 움직이는 제도 역시 이미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신자유주의 방향으로 상당히 선회한 상태였다. 이와 관련해서 강내희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대중의 관심을 끌며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1990년 중반 이후지만 정책노선으로 도입된 것은 박정희가 살해되기 직전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동안이라고 보았다.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유가 인상,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32)의 심화, 선진국의 신보호주의 강화에 따른 수출부진, 고용둔화, 물가급등 등으로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던 1979년에는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이 발표되었고, 수출과 투자정책도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었다. 강내희는 비록 박정희가 신자유주의 노선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1979년 8월에 ‘금융제도개편’ 방안 속에 금리자유화, 은행경영 자율화, 화폐시장 종합개발, 금융기관 대형화 등과 같은 정책이 담기기도 했으며 이 같은 신자유주의 노선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33)

제도적 토대와 맞물려 1970년대 이후로 1980년대에도 꾸준히 지속된 이촌향도 현상과 전두환 정권의 3S정책34),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의 연쇄작용은 도시를 소비산업과 도시중산층의 무대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과 함께 대두된 소비산업사회화에 응답하기 위해서 현발은 1981년에 두 번째 동인전 《도시와 시각》35) 을 열었다. 《도시와 시각》과 관련해서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에 실린 김정헌, 오윤, 주재환의 작품들을 보면 과도한 쾌락과 소비로 점철된 소비산업사회를 풍자하고 개발격차로 인한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을 비판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소비산업사회의 구조를 비판, 풍자하고 있지만 소비산업사회의 자장 안에 있는 사회적 약자와 도시중산층을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박불똥의 1980년대 포토몽타주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 당시의 김정헌, 오윤, 주재환 등 선배 세대의 작품에서 느끼기 힘든 묘한 위화감이 다분히 느껴진다.

박불똥의 1980년대 포토몽타주 역시 1980년대의 소비산업사회를 다루지만 김정헌, 오윤, 주재환의 작품에 비해서 박불똥은 소비산업사회의 현실을 더 다각화해서 비판했다. 예를 들어, <경찰의보호(감시)아래서울강서구목동주민들이른아침일터로향하다>(1985)에서 화면 좌우에 버티고 선 경찰은 투기성 신청자까지 대거 몰려든 유명 건설사의 아파트 분양권 추첨현장에 임검한 실제 경찰관 사진을 따다가 쓴 것이고,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가로질러 출근 중인 것으로 설정된 흑백사진 속 인물들도 목동신도시 건설 예정지구에 살고 있던 실제 원주민들이다. 정부는 목동 원주민들에게 형편없는 이주비와 아파트 입주권을 내세우고서 가옥 철거를 강제했다. 당시 아파트 분양가격은 가난한 원주민들 입장에서 너무 높은 가격이었기 때문에 입주권이 주어져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 건설은 철저히 지급능력이 있는 계층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므로 목동 원주민들의 격렬한 철거 반대투쟁이 벌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신문을 보면 목동지구의 철거민을 대상으로 특별 분양되는 아파트는 분양대상자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가운데 투기행위가 일어나 엄청난 혼란을 빚기도 했다.36) 투기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은 투기할 자본을 가진 도시중산층 이상의 계층이다. 따라서 박불똥의 <경찰의보호(감시)아래서울강서구목동주민들이른아침일터로향하다>(이하 목동 주민)의 아파트 모델하우스는 도시중산층의 욕망을 은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목동 주민>은, 정부의 통치력을 상징하는 경찰과 목동 원주민의 고통, 도시중산층의 갈등과 욕망이 칠흑 같은 현실 위에서 서로 긴장하고 충돌하며 동시에 공존하는 세태를 응축해 보여준다. 또한 <목동 주민>은 80년대 현실주의 미술 역시 사회적 약자계층의 고통을 주로 구조적으로 바라보았을 뿐 정작 소비산업사회와 맞물려 등장한 도시중산층과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선망하는 사회적 약자계층의 이중적 욕망은 간과한 측면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37) 오늘날 <목동 주민>을 보다 보면 80년대에 민중을 부르짖던 진영이 바라보던 사회적 약자계층도 결국 도시중간계급이 되고 부자가 되기를 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적 약자계층은 구조적 모순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이들이 가난을 유지하며 부자, 권력자와 투쟁을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박불똥의 <목동 주민>은 1980년대에 우리가 부르짖던 민중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들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소비산업사회에서 사회적 약자계층이 정치적 올바름과 평등, 정의를 추구하는 초월적인 존재로만 환원될 수 없음을 차갑게 읊조린다.

박불똥의 현재성은 무엇일 수 있는가

 ‘박불똥 다시 읽기’의 포석으로 먼저, 현실성과 대중성이 박불똥의 창작활동에 매우 중요한 기준점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포토콜라주 대신 포토몽타주라는 용어의 사용을 제안해봤다. 그런 다음,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는 형식면에서 현장성과 대중성으로부터 멀어진 회화매체에 대한 반대급부로 선택된 방법론이었으며, 내용면에서 일반적인 민중론보다 다층적인 관점을 담아냈음을 재확인했다. 이글은 박불똥을 다시 읽기 위한 포석으로 우선 그의 초기작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 만큼, 앞으로 포석의 보강과 더불어 박불똥의 초기-중기-후기작에 대한 개별 분석 및 그것들을 연계할 후속 과정이 필요하다. 그 모든 작업이 완료된 후에 우리는 박불똥이라는 한 명의 작가를 시대의 흐름과 함께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박불똥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그의 포토몽타주가 가진 현재성, 즉 시대와 맞물린 미적 가치가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는 분명 과거에 신문, 잡지, 책, 포스터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소통의 다변화를 꾀하며 수용자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미적가치를 전달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담보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 가능성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정보통신기술이 가파르게 발전해 현실과 가상이 포개지는 문턱에 들어섰으며, 적어도 군사정권 때처럼 목숨 걸고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21세기에 포토몽타주 방법론이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최진욱은 박불똥의 《퀑(Bang!)》(2014)을 두고 “무릇 작가는 공간을 장악해야 할 것이다. 1985년 몇 장의 선거공보 작품(양놈좆크당-군인좆세당-왜놈좆달당)을 선보인 박불똥이 그랬듯이, 2004년 4월 16일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3,333장의 연탄으로 탑을 쌓아 놓았던 (최정화도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박불똥이 그랬듯이. 그런데 그 이후 박불똥의 작품은 공간을 장악하지 못한다. 군사정권의 공간을 장악하는 방식이었던 선거공보와 신자유주의 공간을 장악하는 방식이 ‘연탄 탑’으로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박불똥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여전히 군사정권 시대의 사진콜라주 방식을 놓지 못하고 있다.”38)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박불똥의 포토몽타주는 불특정 다수가 운집하는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39) 같은 커뮤니티사이트에서 합성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사회에서 극우로 살 권리를 주장하는 일베 이용자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정치성, 익명성, 탈 물질성, 폭력성 그리고 복제, 차용, 매체의 혼성이 교차하는 합성물로 사회적인 충격과 논란을 낳기도 했다. 물론, 일베의 합성물이 내용적으로 사회의 공동선을 훼손하는 일은 심각한 문제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형식은 박불똥의 과거 포토몽타주 방법론을 한참 앞질러 있다. 그렇다고 박불똥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대중적 기술들을 어설프게 뒤쫓으며 창작을 지탱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박불똥은 30년 넘게 쌓아온 자신의 미적 가치관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해야 할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권혁빈과 내가 공동으로 기획한 《박불똥, 1985-2016》(2016)에는 몇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제작된, 박불똥의 ‘원작과 다산성 원작들'(Photo Collage, Offset Print, Pigment Print, placard Print & Painting)이 등장할 예정이다. 그 가운데 박불똥이 관람자의 주목을 가장 기대하는 것은 피그먼트 프린트(Pigment Print)인데, 실상 시장논리의 눈길이 먼저 가닿을 곳은 포토몽타주 원작과 그 원작의 이미지를 베껴 그린 캔버스 작품(Painting)일 것이다. 그런데 박불똥은 왜 《박불똥, 1985-2016》에서 자신이 기피하던 회화를, 그것도 포토몽타주 원판을 베낀 회화를 대놓고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유추하는 데는 최근 미술시장을 맴도는 수상한 기류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016년을 기점으로 가나와 학고재 같은 국내 화랑들이 민중미술 혹은 리얼리즘 이라는 깃발을 내걸며 이미 시장성이 검증된 작가들을 시장으로 호출하고 있다. 더불어 화랑의 호출에 응답한 작가들도 이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듯하다. 물론, 작가와 작품의 시장화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시장은 오히려 작가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써 취할 수 있다면 취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화랑이 계속 창작-비평-시장 삼자간의 건강한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이해득실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고 이벤트성 투기일 뿐이다. 최근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6개 층 전관에서 한 달 동안 대형 전시가 열렸다. 2000년대 초반에 미술시장의 거품과 함께 등장했던 ‘회화의 복권’을 상기시키는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Ⅱ: 리얼리즘의 복권》40) 전(이하 복권 전)이 그것이다. 단색화 돌풍에 대해 맞바람을 준비하는 화랑들의 목표가 리얼리즘 혹은 민중미술의 복권(復權)인지 아니면 시대적 꽝에 대한 비판적 자성을 은폐한 복권(福券)인지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복권》 전에서 가나화랑 이호재 회장과 한국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가 선보인 여덟 명 작가의 리얼리즘 작품 100여 점이 2016년 현재 도대체 어떤 당대성을 갖는다는 것인지 설명이 거의 없었을 뿐더러, 전시를 급조한 흔적마저 여기저기 엿보이는 터라 불안한 시선을 거둬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앞서 말했듯이 박불똥은 회화가 원작성을 지닌 작품으로서 결국 전시장과 시장으로 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선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불똥도 화랑의 권유로 회화작업을 해서 몇 차례 판매한 적이 있다. 회화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박불똥이 이따금 그림을 그린 것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가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계문제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해당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현장성과 대중성을 고민하며 포토몽타주를 고집했던 박불똥도 거기서 자유로웠을 리 없다. 어쩌면 박불똥은 부단히 엄습하는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따금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면서 묘한 굴욕감마저 맛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불똥은 몇 차례 회화작업을 한 적이 있으나 완전히 회화로 전향하지는 않았고 결국 포토몽타주를 다시 시작했다. 또한, 박불똥은 회화를 하더라도 목가적이고 서정성이 강한 풍경화는 극구 거부했다.41) 박불똥이 거부한 풍경화에 대해서 김동일이, 문민정부 수립에 즈음한 90년대 초반 이후 민중미술 진영의 풍경화가 자의든 타의든 거세당한 민중미술의 순화된 한 형태였으며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축적해온 거대한 상징자본을 미술시장에 환전하는 데에 가장 무난한 수단으로 남용되었다고 평한 것은 적확한 해석이라 하겠다.42) 이런 점에서 목가적이고 서정성이 충만한 풍경화를 그리지 않겠다는 박불똥의 선언은 현실을 중시하는 자신의 마지막 보루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박불똥이 《박불똥, 1985-2016》에 포토몽타주 원작과 그 원작을 베껴 그린 회화를 나란히 출품하는 것은 압도적인 생계위협 앞에서 불가항력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남루한 처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자, 경제적 가치만을 탐닉하는 시장과 그 흐름에 무기력하게 휘말리는 작가들에 대한 시의성 있는 문제 제기를 역설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문제 제기에 관한 효용성은 시간을 두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원작을 베낀 박불똥의 회화 역시 의도한 비판성을 발현하지 못하고 시장의 강력한 힘에 박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의문으로 남는 것은 박불똥의 회화작업이 당장 생계를 해결할 호구지책(糊口之策)이나 시장에 휘둘리는 현실주의 미술에 대한 시의성 있는 문제 제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작가로서 그의 현재성을 담보하는 형식까지도 될 수 있는가이다. 이 의문을 느낌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격 결정 구조의 퇴폐적 왜곡이 진리로 인준되는 금융자본주의 체제에서 꿈같은 원론적 이야기지만, 우선 시장과 비평이 각자의 위치에서 긴 안목을 가지고 신실하게 제 몫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박불똥 자신도 자신이 쌓아온 미적 가치관과 현재성이 최대한 부합할 수 있는 형식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박불똥의 창작이 반드시 현재성을 담보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박불똥은 이미 1980~90년대에 걸작을 다수 남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작가는 생계에 대한 문제나 시대와 맞물린 미적인 가치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현재성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꾸역꾸역 신작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 박불똥이 앞서 짚은 두 가지 조건 중에 생계문제만 걸린다면 구작을 회화로 번안하는 재생산 방식을 통해 현상 유지하며 무심히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불똥이 시대와 맞물린 미적인 가치를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면 작가로서 자기혁신의 내적 요구에 스스로 끊임없이 부대낄 것은 당연하다. 나는 박불똥이 두 가지 조건에 모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박불똥은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미적 가치관과 현재성이 최대한 부합할 수 있는 형식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고민이 선뜻 명쾌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답이 있다 치더라도 작가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일 가능성도 크다. 박불똥은 이 고민을 절반이라도 해결할 방안을 어떻게, 언제쯤,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홍태림 (미술비평, 크리틱-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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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나무 의자 문양이 찍힌 기름천을 타원형 캔버스에 놓고 그림 주위를 굵은 밧줄로 둘러친 작품.

2)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 1997, pp.210-212 참고.

3) 그러나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보다 더 광범위한 측면으로 확장해 보자면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의 <임종>(1858)과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렌더(Oscar Gustav Rejlander)의 <인생의 두 갈래 길>(1857) 같은 조합인화 사진도 포토콜라주의 먼 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1916년에 휴고 발(Hugo Ball)은 나이트 클럽인 ‘카바레 볼테르’를 열었다. 이곳에서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와 한스 아르프(Hans Arp), 리처드 휄젠벡(Richard Huelsenbeck) 등이 취리히 다다 운동에 잠시 동참했다. 그러나 1917년이 되어 다다가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휄젠벡은 독일로 돌아갔고 발은 베른으로, 차라는 파리, 아르프는 쾰른으로 이주해서 각자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노버트 린튼, 『20세기 미술』, 윤난지 옮김, 도서출판 예경, 1993, pp.124-125 참고.

5) 뒤샹의 <샘>(1917)은 작가와 작품, 수용자의 관계를 전복하기에 충분했다. <샘>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반미학적 의의 외에 주목할 점은 대량생산된 사물이 일상적인 맥락을 벗어나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으로 현대미술의 맥락과 시장에 포섭되었다는 역설이다.

6)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한나 희흐(Hannah Hoch), 게오르그 그로츠(Georg Grosz),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같은 작가들이 포토몽타주를 활용했다.

7) 몽타주는 프랑스어 ‘montor’(모으다, 조합하다)에서 온 말로 본디 건축용어였으나, 초기 영화에서 필름의 단편들을 조합하여 한편의 통일된 작품으로 엮어내는 편집 작업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황철희, 「예술적 사실주의에 근거한 몽타주 이론에 관한 논의」,  『디지털디자인학연구』, 제13권 제1호, 2013, p.17  

8) 노버트 린튼(Norbert Lynton)은 포토몽타주 용어를 베를린 다다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가 창안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노버트 린튼, 『20세기 미술』, 윤난지 옮김, 도서출판 예경, 1993, p.138 참고.

9) 황철희, 「예술적 사실주의에 근거한 몽타주 이론에 관한 논의」,  『디지털디자인학연구』, 제13권 제1호, 2013, p.17 참고.

10) 사실 러시아에서 포토몽타주 기법을 사용한 작가들이 포토몽타주와 포토콜라주를 구분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들의 작품을 호명할 때 일반적으로 포토몽타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의 영향을 고려했을 때 포토몽타주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11)  장우인, 「혁명의 깃발-러시아 아방가르드와 포토몽타주」,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5권, 2011, pp. 216-217 참고.

12) 노버트 린튼, 『20세기 미술』, 윤난지 옮김, 도서출판 예경, 1993, p.138

13) 장우인, 「혁명의 깃발-러시아 아방가르드와 포토몽타주」,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5권, 2011,  p.229 참고.

14) 박미령, 「소비에트 제국 이데올로기의 토착화를 위한 아동문학의 역할」, 『스토리 앤  이미지 텔링』, 제7호, 2014, p.140

15) 1982년에 결성된 두렁은 광자협처럼 문화운동을 어떻게 미술의 언어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들은 노동조합과 연계하면서 탈춤반, 연극반, 미술교실을 시도했다. 김종길 외, 「김종길: 1980년대 사회변혁론과 민중미술Ⅰ」,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 현실문화연구, 2012, p.43 참고.

16) 광주자유미술인협회은 1979년 10월 전남 광주에서 활동하던 홍성담, 김산하, 최익균(최열) 등 7명이 모여 활동을 시작한 단체다. 예술을 통한 사회변혁과 공동체적 신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창작방법을 모색했다. 김종길 외, 「김종길: 1980년대 사회변혁론과 민중미술Ⅰ」,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 현실문화연구, 2012, pp.39-40 참고. 

17) 1924년 빌리 뮌제베르크(Willi Muenzenberg)에 의해 창간된 잡지다. 초창기에는 베를린에서, 나치 집권 이후에는 프라하에서 발행되었으며, 1938년에 파리에서 단 한 호만 내고 폐간된다. 정치적으로 공산당과 반파시즘을 내걸었던 그 잡지는 게오르게 그로츠,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막심 고리키(Maksim Gor’kii) 등의 작품들을 실었고, 대중적인 인지도도 함께 확보해 나갔다. 하지만 잡지는 독일 다다이스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존 하트필드의 참여로 더 탄력을 받게 된다. 전가경, ‘AIZ, 1932′, <네이버>,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01&contents_id=4952 참고.

18) 포토몽타주 외에도 박불똥은 1988~9년에 『월간 사회와 사상』(한길사)의 표지화를 제작하거나 만평을 연재했고, 1998~9에는 <주간 고양신문>에 만평을 연재했다.

19) 1979년 창립된 현실과 발언은 미술의 고답적인 관념유희를 지양하고 시대적 현실을 직시한 창작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현실과 발언은 1980년대에 다수의 동인전을 열었다. 1985년 11월 22일 민족미술인협의회가 창립되었는데, 그 ‘민미협’에 현실과 발언 동인들 대부분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현실과 발언은 1990년에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최근 현실과 발언은 2010년 7월 창립 30주년 기념전시를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20) 신학철의 경우 <풍경-1>(1980), <한국근대사-서울탑>(1984) 등 상당수의 사진몽타주 작품들이 있고, 성완경은 <그이는 현아의 조그만 몸을>(1980), <드라마에서는 이 두 사람이 해외지사로 나가는 것으로 했다>(1981)가 있다.   

21) 김동일의 말을 빌리자면 “민중미술가들이 정치적 독재에는 저항했지만 막상 미술계 내부의 시장 시스템에 대해서는 별 저항을 못 한 거잖아요?”와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박불똥 외, 「진짜로 살기 힘든, 가짜로 사는 진짜: 박불똥 인터뷰」,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지느러미의 벌거벗은 성찰』, 현실문화연구, 2014, p.21

22) 앞의 책, p.11

23) 앞의 책, pp.14-15

24) 걸개그림처럼 공동창작하고 작품을 사유화하지 않는 방식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25) 김종길 외,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 현실문화연구, 2012, p.223

26) 이런 측면에서 원작성 때문에 박불똥의 포토몽타주 사진이 시장진입 문턱에서 당하는 낭패는 현장성, 대중성을 배반하는 회화를 경계해온 작가가 불가피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27) “‘위장 취업자’는 정부와 대중매체에서 고안한 용어로서, 공장에 취업한 운동권 학생을 범죄자 취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동운동에 참여한 운동권 학생과 지식인은 스스로를 ‘학출’(학생 출신) 운동가 또는 ‘인출’(인텔리 출신) 운동가라고 불렀다. 이들 용어는 자신들을 노동계급 출신의 운동가들과 구별하는 데도 사용되었는데 노동계급 출신 운동가에 대한 우월성보다는 자기 비하의 의미가 더 컸다.” 이남희, 『민중 만들기』, 후마니타스, 2015, p.340

28) 박불똥 외, 「진짜로 살기 힘든, 가짜로 사는 진짜: 박불똥 인터뷰」,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지느러미의 벌거벗은 성찰』, 현실문화연구, 2014, p.16

29) 앞의 책, p.39

30) 이남희, 『민중 만들기』, 후마니타스, 2015, p.333 참고.

31) 이택광,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 시대의창, 2014, p.45 참고.

32) 경제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상태.

33) 강내희,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지형의 변동과 문화운동-역사와 과제」,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4권, 2007, pp.281-282 참고.

34) 3S는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를 딴, 우민화 정책이다.

35) 이 전시에는 강요배, 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이청운, 이태호, 임옥상, 주재환 등 16명이 참여했다. 김종길 외,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 현실문화연구, 2012, p.636

36)  ‘목동아파트 투기 대혼잡 조짐’, <동아일보>, 1984.  08.  25,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250020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25&officeId=00020&pageNo=7&printNo=19353&publishType=00020

37) <사과밭이 있는 들판에서 아담과 이브 간통하다>(1985), <샛빨간 라디오>(1985), <현대묘파트>(1985), <벼락부자의 심장>(1985) 같은 박불똥의 초기 포토몽타주도 <경찰의보호(감시)아래서울강서구목동주민들이른아침일터로향하다>에 내포된 비판적 시선을 공유하는 작품들이다. 

38) 최진욱, ‘박불똥 개인전/ 퀑(Bang!) 2014.12.10.~12.16./나무화랑’, <최진욱 블로그>, 2014. 12. 11, http://blog.naver.com/geneuk/220207047436

39) 디시인사이드의 정치-사회 갤러리와 야구 갤러리, 코미디 갤러리의 보수화, 특정 지역 비하 문화가 심화되면서 디시인사이드 운영자들이 개별 게시판의 몇몇 게시물들을 빠르게 삭제했다. 이러한 글들이 삭제되기 전에 특정한 게시판에 모아두는 곳이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강정석, 「<일간베스트저장소>, 일베의 부상」, 『문화/과학』, 2013, p.274 참고. 

40) 이 전시에는 권순철, 고영훈, 신학철, 황재형, 민정기, 이종구, 임옥상, 오치균 작가가 참여했다.

41) 이와 관련해서 박불똥의 「우공이산주의자(公山主義者)의 편지」를 참고할 수 있다. “작업실이 마땅치 않다는 둥 생계가 더 다급하다는 둥 갖은 핑계 대가며 소홀했던 화가 노릇에 이제는 정말 열중할 것을 이참에 약속드립니다. … 그러나 딱 한 가지, 풍경화 그것만은 아무래도 곤란하지 싶네요. 몇 해 전 어느 TV프로에 출연해서 뱉었던 말 (세상 화가들이 다 풍경화 쪽으로 죄다 좌우향후 한 대도 나는 결코 그럴 리가 없다) 때문입니다.” 박불똥 외, 「우공이산주의자(公山主義者)의 편지」,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지느러미의 벌거벗은 성찰』, 현실문화연구, 2014, p.174      

42) 앞의 책, pp.316-317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