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_프로젝트 O

프로젝트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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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O는 H재단 사업의 블랙리스트였다. 아, 블랙리스트가 그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아니니 오해는 마라. 여느 국고사업이 그렇듯 지원금 수혜자는 수령한 기금에 대한 정산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O는 H재단이 주관하는 예술인 지원사업에 참여한 수개월의 기간 동안 보고서 제출을 매회 착실히도 연체했었다. O의 변명에 의하자면 H재단이 요구하는 활동 보고서란 작업소요 시간의 예측이 어려운 현장 특성을 모르는 탁상행정이요, 비합리적 처사라. O는 회마다 제출해야하는 일자별 보고서를 모아 자의적으로 월 마감일에 통으로 제출하고는 했으며, 단 한 번도 재단의 행정직원으로부터 이에 대한 주의나 제재를 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위 H재단이 주목하는 블랙리스트-관리대상 내지 관심 대상-처럼 엑셀파일에 음영이 표시되어 있더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좀 잘 쓰란 말이야.
H재단 사업 지원자 심의를 마친 뒤 이어진 심의위원 선생님과의 식사 자리. 웹진 크리틱-칼에 올린 내 글의 허접함이 화제가 되었다.
날카롭게 쓰란 말이지.
그래, 고시원이랑 재단이랑 비슷하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도 글 잘 못써. #@÷=%가 쓴 책을 읽어봐.
예술가 선생님들의 관심에 겨운 나는 대학로 모 중식당에서 고량주잔에 코를 박고 자결한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잔이 너무 작아서 실패한다. 이어지는 아무 말 대잔치.
흥! 못 써서 죄송합니다.
앗! 주문한 사천탕수육이 나왔습니다. 단짠단짠.
넵!  #@÷=%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보자시는 기승전꾸지람 선생님의 잔에 맞츤데레 짠을 하고 애써 동공지진을 달랜다. 그래도 독자라고는 소수정예 친구 몇뿐이던 글이 다수에게 회자되다니 감격스럽다. 다음에는 뭘 쓸까? 차기 작업노트의 주제를 생각하며 쓴 술을 들이킨다. 그때는 코가 정말 푹 박힐 정도로 큰 대접이 있는 막걸리집 같은 곳에 가야겠다. 그런데 이렇게 한탄하고 자괴하면서도 작업을 왜 하는가?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데 일가견이 보이는 어느 문필가는 적었다.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 미대 합격문자를 받고 템즈강물에 뛰어든 뒤 뜰채로 건져졌다는 친구는 말했다. ‘미술,  산 송장에 산소마스크를 채우는 것’. 그렇다면 나는? 작업을 왜 하냐고? 하고 싶어서지! 누가 하라고 등 떠민 적도 없고 후원자나 지지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떤 면에서 작업은 생을 영위시켜주는 게 아니라 반대급부의 나락으로 밀칠 뿐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발에 코박기를 자처하는 동인이 뭔가.

O는 앞이 까마득했다. 예술강사 지원이 이렇게 지역과 초중 등급별 정원에의 눈치싸움이 될 줄을 몰랐다. 강사 선정시 고용보험 미가입자 예술인에게 가산점을 준다고 해서 얼마 전까지 단기간 일했던 미술관에 부탁해 고용보험을 적용받지 않는 특혜(?)를 받기도 했는데 허망했다. 연중 작업만 하는 전업 예술인이 몇이나 된다고 고용보험 미가입자 예술가에게만 사업 참가자격을 주거나 가산점을 준다는 것일까. 예술가는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고용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곳에서만 일하라는 말인가? 한숨을 내쉬는 O의 눈에 H재단 신규사업의 예술인 모집 공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전업 예술가의 부업을 도와드립니다.」
이후 H재단 예술인 지원사업의 서류와 면접심사를 통과하고 오리엔테이션, 워크숍을 거친 O는 재단으로부터 받은 활동비로 망원동 지하 밴드 연습실 한켠에 그의 이름을 딴 공간 SPACE_0 [스페이스 오]를 꾸려 프로젝트 활동을 시작했다. Projet_0 [프로젝트 오]로 이름붙인 이 행위(?)의 별칭은 ‘기획 없는 기획’. 포문은 미술가와 타장르 종사자 간 네트워크 워크숍과 식사다.
O야. 그래서 다음 미팅은 뭐 할꺼야? 융합에 대한 기획안 만들어서 공모전 준비해야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거 안 할 거야. 당분간 내가 할 일은 없어. 지난 모임에서 참여자들 소개하고 네트워크 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알아서들 하는 거야. 더 이상 나는 주최자 위치도 아니고. 참, J가 그때 같이 왔던 G연구원 일행이랑 한강에서 치맥 하자고 하던데?
대답을 마친 O는 ‘그게 무슨 작업이냐’는 상대의 표정을 읽었다. 하긴 O에게도 지금의 넉넉한 자유와 긴 호흡은 낯선 것이었다. 등단, 입봉, 당선, 수상, 데뷔… 예술가로 살기 위한 등용문을 통과하려는 지난함에 비하면.

혼돈주에 정체성을 싣고 한 주가 지나 다시 월요일, 평소보다 일찍 출근카드를 찍고 H재단 예술인 지원 사업팀 자리에 앉는다. 한해 사업에 참여하는 천여 명의 예술인과 관계자의 행정 기록이 담긴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책상맡에 붙여놓은 스페이스 오 월페이퍼를 보며 숨을 고른다. 몇 년 전 망원동에 있었던 스페이스 오는 신생의 특성이 그렇다는 듯이 본디 있던 자리에서 휘발되어 사라진 대신으로,  H재단 혜화동 사무실, 내가 앉은 한 평 남짓의 자리로 옮겨와 안착해 있다. 공간 소품이었던 붓과 물감, 망원시장의 꽃을 담았던 바구니는 이제 펜과 포스트잇, 파일 같은 사무비품을 담고 있지만 코를 갖다 대면 여전히 지하 작업실의 눅눅한 곰팡내가 나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지난 서류 정리를 하다가 H재단에 제출된 프로젝트 오의 초기 기록을 발견했다. 명단에 있는 내 이름에 유독 진한 음영 표시가 보인 것은 안구건조증으로 인한 착시리라.
따릉. 적막한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린다.
감사합니다. H재단입니다.
금요일에 예술인 지원사업 서류 결과 메일을 받았는데요.
네.
떨어졌어요.
아아. 그러셨군요.
왜죠? 시간강사, 고용보험 가입자라서?
아니요. 작년부터 요건이 바뀌었습니다. 고용보험 가입자라 해서 참여 제한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죠? 대체 어떻게 쓰라는거죠?
…그러게요. 선생님. 어찌하면 좋을까요?
네?
아, 서류심의 기준은 사업공고 시행지침에 안내되어 있듯이 작성의 성실성과 사업에 대한 이해로…
말하는 사이 시침이 9시 정각을 지난다. 사업을 담당하는 일곱 명의 팀원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하기 시작한다. 통화를 마치고 메일함을 연다. 전략기획팀 직원 K로부터 이메일이 와있다.
지난번에 부탁한 자료 첨부합니다. 그리고 ㅋㄹㅌㅋ 글 재밌게 잘 읽고 있어요^^.
ㅋㄹㅌㅋ 글? 보고기한이 임박한 통계자료를 만드느라 궁리할 겨를이 없다. 모쪼록 기운생동으로 일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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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엮인 글

1.오정은_H고시텔 243호

2.오정은_w웨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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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오정은_프로젝트 O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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