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_E패션매장 여의도점

모두 말이 없었다. 이제 막 동을 트고 나온 햇살이 한강의 검은 물을 금빛으로 닦아내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아니 관심에 두지 않았다. 이른 출근시각, 여의도로 향하는 만원버스 안이었다. 승객들은 앉건 서건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이따금 정적을 뚫는 코 고는 소리와 땀이 찬 살 냄새, 움찔하는 근육의 미동 같은 것이 그들이 적어도 사멸에 치달은 것은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하아… 아…
버스가 성산대교를 느릿하게 건너던 때였다. 어디선가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좌석과 좌석 사이와 승하차 계단은 물론이고 운전석 핸들이 곧 허리께에 닿는 공간까지 곳곳에 승객을 가득 실은 버스 안에서 불분명하게 들리는 소리의 근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 아아…아…아아..우
소리의 강도가 한층 더 격해지자, 운전기사가 그것의 발생지라고 추정되는 허공쯤에다가 대고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하..하아… 아아아..우..우우욱…힉.. 우우아
괜찮아요? 내려드려요?
욱… 아아… 하
손잡이 기둥에 기대서서 눈을 감고 있던 O는 차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병목구간인 대교 초입에서 멀미를 못 이긴 승객이 차량에서 이탈하기가 왕왕 있는 일임을, O로서는 익숙한 경험으로 아는 일이었다. O는 지나간 그 소리가 사람의 음성 같지가 않았다고 몽환중에 생각했다. 버스에 잘못 올라 내리지도 못하고 있던 길 잃은 한 짐승이, 아니면 늑대인간 같은 반인반수가- 위장의 메슥거림을 비우려는 게 아니라- 심연 깊은 곳의 포효를 방출하려고 내지른 음성은 아니었을까.
강을 건너 다다른 당산에서 승객의 이할쯤을 비우고 국회 인근을 경유해 여의도에 다다른 버스는 무게를 가볍게 비우고 다음 목적지로 순환해 간다. O는 여의도역에서 지하철 5호선으로 여의나루역까지 환승한 간 다음 E타워까지 10분가량을 강물을 따라 조성된 여의도공원을 따라 걸었다. 출근 시간인 8시까지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야 했지만, 역 앞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조간신문 챙기기를 거르지 않았다. 부단하게 걸음을 옮기며 신문을 보는 와중에 신곡가요를 들었고, 겨울이라 코가 시릴 정도로 상쾌한 한강의 기운을 들이마셨다. 모두 신선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E타워는 고층빌딩으로 숲을 이룬 여의도 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외관을 갖고 있었다. 건물의 독특한 디자인이나 넓은 대지면적에서도 그렇지만 전자, 무역, 통신, 화학, 유통 등 각계 산업분야에 계열사를 가진 E그룹의 지주건물이라는 상징이 더해져 어떤 경외의 감정까지 일으켰다. E타워를 일터로 하는 1만명의 임직원은 지상 30층부터 지하3층까지 있는 저 마다의 자리를 속속들이 찾아갔는데, 그룹의 총수부터 중역, 그리고 사무직원이 직급에 맞춰 고층부터 저상층까지를 채웠고, 시설과 보안요원이 지상의 1,2층을, 구내식당과 각종의 상점 상인과 관계 종사자가 지하층을 메웠다.
E패션 계열사 중 하나인 R사의 신입사원 3개월 차에 접어든 O의 일터는 지하 2층에 있는 E패션 직영매장이었다. 그녀는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2시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씩 판매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장 근무에 적응하는 수습기간이 끝나면 R사 직영매장 관리직에 배치되어서 일 8시간, 주 5일제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사측은 말했다. 판매사원으로 시작해 매장 여러 개를 관리하는 슈퍼매니저나 E패션본사 MD까지 승진할 수 있는 체계라는 설명도 더했다. 그것이 O의 꿈이었을까.
저는 자라서 화가가 될 거에요!
O는 멋모르고 치솟은 빌딩 같던 어릴 적 꿈이 차츰 부식되어 마침내 허물어져 버린 게 지금와 돌아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고 느꼈다. 취업이 꿈이었던 얼마 전이나 동기들이 파견중인 다른 점포처럼 월차 하루라도 있는 게 꿈인 오늘이 유년의 그것에 비해 한층 현실적이고 성숙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출근한 O가 창고에서 마른 걸레를 들고나와 쇼윈도 틈틈을 익숙하게 닦았다. 유리에서 뽀드득하고 첫눈 밟는 소리가 났다. 무릎을 굽혀 진열장 아래 틈까지 닦아내는 O의 모습이 낮은 포복으로 소중한 것을 수호하려는 전사처럼 보였다.

#꿈
잘 익은 홍옥이 나무 위에 맺혀 있었다. 빨간 껍질이 반들반들 윤이 나 영롱하기까지 했다. 끝으로 갈수록 가늘지만 힘 있는 뻗침으로 마무리된 줄기가 열매의 둥근 선 뒤로 요염하게 율동을 치고 있었다. 땅 위에서 올곧게 솟은 진갈색의 나무기둥과 그로부터 찬란하게 자라난 가지 뒤로 파란 하늘의 여백이 보였고 싱그럽게 돋아난 초록 나뭇잎이 무성한 숲을 이뤄 빨간 사과의 보색이 되어주고 있었다. 열매는 보름달처럼 두둥실한 것 같으면서도 아랫부분이 조금씩 좁아지는 것이 더욱 매혹적이었다. 옴폭하게 들어간 홈에 손가락을 넣고 매끈하게 뻗은 몸통을 베어물고 싶었다. 아삭 소리가 나며 조금 시고 많이 단맛이 입안 가득 물감 번지듯 퍼질 것 같았다. 혀로 붉은빛의 껍질을 만지며 자연의 싱싱한 향을 흠뻑 맡은 채로 노란 속살을 달콤한 즙과 함께 목에 넘기고 싶었다.

쇼윈도나 진열장 유리를 닦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깨끗이 하기 위한 일은 아니었다. 일을 하다가 먼지나 자국같은 게 생기면 바로 닦는 데다 진열된 지갑이나 벨트 같은 상품을 손님에게 보일 때에는 흰 면장갑을 끼기 때문에 굳이 출근하자마자 여기저기를 청소하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았다. 점주가 정해놓은 미화시간에 남직원은 마대로, 여직원은 걸레를 소품삼아 퍼포먼스 연기를 했다. 마치 무엇인가 중대한 오염을 지우는 것처럼.
O는 선배 사원 F를 따라 여자화장실에 가 때도 안묻은 걸레를 세제까지 쳐가며 빨아 말린 뒤, 탕비실과 탈의실을 겸하는 매장 뒤편 창고 안 정수기 앞에서 믹스커피를 탔다. 점장 주재 아침조회를 위해서였다. P점장은 조금 마른듯한 체격에 어딘지 예리하고 그만큼 예민한 인상의 40대 안팎 남성으로, 수하에 둔 아홉명 사원의 취향 고려 없이 그 인원수만큼 믹스커피를 타오게 한 뒤 컵을 나누고 근태관리를 했다.
월말인 거 알지? 잘해. 소장 뚜껑 열리게 하지 말고.
L소장님이라 불리우는 매장의 실 점주가 월말 매출액에 예민함을 상기시키는 것도 P점장의 일과였다. E패션 본사는 매월 각 매장의 매출액 집계를 보고받아 매출이 저조한 곳의 점장을 소집해 집합교육을 행한다. 교육을 통해서도 재기가 어려운 매장은 점장이 교체되거나 아예 폐업 퇴출의 길을 걷는다. P점장이 과거 관리했던 매장을 잃는 불명예를 안고 지금의 L소장 아래로 들어온 것임을 사원들은 눈치껏 알았다. 월말 회계를 확인한 점주가 자신의 신용카드로 가매출을 잡으며 급한 불을 끄는 것은 업계 관행처럼 알려진 일인데 P점장은 그조차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P점장은 L소장이 노하면 사원, 너희들 탓이라는 엄포를 잘 줬다. 지각을 했으니 벌금을 내라든가 옷 입은 모양이 단정치 않다, 왜 내가 말하는데 짝다리로 서있니 등의 사유를 들어 남사원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평소 카페인을 꺼리는 O가 조회시간의 쎄한 분위기 속 불편한 감정을 모면하기 위한 수완으로 커피 마시기를 시작한 것은 응당 합리적인 처세였다.
O는 커피 가루를 컵에 털어 넣고 컵의 절반이 조금 넘는 지점까지 뜨거운 물을 부어 설탕과 프림, 커피가 잘 섞이도록 티스푼으로 두어 번 휘저었다. 플라스틱 쟁반 위에 놓인 열잔의 종이컵 커피에서 작은 기포 소용돌이가 일었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O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공연히 커피 물을 몇 번 더 휘하고 저었다.

#추체험
머리를 어딘가에 세차게 부딪힌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몇 시지?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가늘게 뜬 눈을 고쳐 뜬다. 햇빛이 서쪽 창문을 투과해 발갛게 반지하 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거무죽죽한 창살 그림자가 천장에 드리워져 두어 벌의 티셔츠와 후드점퍼, 트레이닝 바지가 투박하게 걸린 벽 한켠까지 수직의 선을 길게 그었다. 색이 바랜 옷가지가 늙은 노인의 피부가죽처럼 못에 힘없이 대롱 걸려있는 형색이 영 초라해 보였다.
오후 6시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킬까 하다가 이불을 고쳐 덮는 것으로 생각을 바꾼다. 어차피 일어나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먹은 게 없으니 요의를 느끼지도 않는다. 쌀도 라면도 떨어진 지 오래다. 염치 불구 주인집 사모님께 부탁해 끼니를 모면한 게 그제, 아니 더 오래전이었나. 허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
얼마 전까지 나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독립단편영화제에 입상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촉망받는 예술가라고 추켜세웠다. 겸연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손사래를 쳤지만, 내심 동조하며 뿌듯해하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었다. 나를 멘토라고 부르는 후배, 심지어 선배들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자본주의 폐부를 찌르는 스토리를, 현대인이 통감할 시대적 사건을 환기해가며 그런 감각적인 영상으로 그릴 수 있냐고, 겉으론 평범하지만 내면이 점차 입체적으로 변해가는 인물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작위적이지 않은 세련된 연출이 돋보였노라고, 사람들은 심사위원의 호평을 곱씹으며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정작 내게 입봉의 기회란 오지 않았다. 웬만한 제작사는 모두 돌며 시놉시스를 전하고 장편 시나리오도 보내봤지만 ‘검토 후 연락드리겠다’란 말만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어쩌다 휴대폰 벨이 울리면 ‘급히 후반부 편집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냐’였는데, 제대로 된 시설도 없는 거라. 학교 편집실에서 몇 번 작업을 하다가 ‘졸업생이 이렇게 재학생의 기회를 뺏어도 되나’는 교직원의 말에 얼굴이 벌게진 뒤로는 아예 학교에 발길을 끊었다. 그런데 작년무렵부터는 어쩐 일인지 드문드문 있었던 그런 일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뒤로 갈 수 없는 사면초가- 그 상태로 하루, 이틀, 일주일, 일년이 흘렀다. 더는 안 되겠다고 편의점 알바를 하다가 시급이 높은 물류창고 업무를 하기 시작한 이튿날, 그만 어깨탈골이 와서 더는 힘쓰는 일을 하기 어려워졌다.
젊은 청년이 약골이네. 힘쓸 줄도 모르고.
교대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던 선임을 기다리다 못해 2인 1조로 하는 일을 혼자 무리해서 하다 탈구가 온 것이었다. 그는 내 관상부터가 딱 힘 못 쓸 체질이라며 사고를 선천적인 내 운명에 기인한 것으로 했다.
제가 아는 피디님이 연출 구한다는데 오빠 소개해드릴게요.
영화제 첫 수상작품의 여주였던 Z가 살뜰하게 나를 챙겼던가. Z는 그 뒤 연락이 없었지만 이제는 톱스타가 된 그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감독님은 정말 모든 게 다 초일류에요!
나는 Z가 미대 신입생이던 시절을 회상했다. 연기 전공이 아니던 Z가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데는 그녀를 배우로 캐스팅한 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Z에게 남다른 책임감을 느꼈고, 그것이 연인의 감정으로 혼합되거나 연인 이상의 어떤 고차원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랬던 순간도 있었음을 아무도 없는 빈방에 대고 고백해보았다.
미대 건물 층계를 총총히 올라가는 뒷모습이 Z의 첫인상이었다. 높게 묶은 포니테일 머리가 초봄의 싱그러움에 맞춰 발랄한 리듬을 탔다. 평소 중저음의 음색이던 그녀가 유일하게 목소리 톤이 높아지던 때도 떠올렸다. 민트색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몸의 굴곡이 눈앞에서 휘몰아쳤다. 살짝 접혀 올라간 흰 스커트 자락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촉촉이 젖은 방안에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출고할 의상의 리스트가 전산 포스에 뜨면 해당하는 재고를 찾아 상품코드택이 잘 보이게 해서 옷걸이째 폴리백으로 포장한 뒤, 빈 헹거에 건다. 모자나 가방, 장갑 등 액세서리류는 해당 크기에 맞는 폴리백에 포장해 마찬가지로 상품코드택이 잘 보이게 한 뒤 검정색 지퍼백에 담는다. 오전 8시 42분, E타워 지하 주차장에 헹거와 폴리백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노라면 곧 E패션 물류트럭이 와서 물물교환처럼 그것을 가져가고 새 상품을 내준다. 기사와 매장직원이 입출고 내역이 인쇄된 리스트 종이와 폴리백 안의 상품코드를 서로 번갈아 보며 맞는 제품이 맞는 수량만큼 반출입되는가를 확인한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입고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느 날은 헹거 두세대 가득 무겁게 제품이 반입될 때도 있다. 그러나 창고정리급의 행사 세일 때를 제외하고, 물건을 주고 받는 데 소요시간 5분을 넘지 않는다. 전국의 직영매장마다 트럭이 오는 시간이 매일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어느 한 매장에서 시간을 끌었다간 연쇄적으로 혼란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십대 중후반의 남사원 I가 혼자 도맡아 했는데, O가 견습생으로 들어오면서는 일을 배워야 한다며 그녀를 동행해갔다. 물량이 많을 때면 I보다 한두살쯤 어린 남사원 M이 붙어 도왔다. 바퀴달린 헹거에 무거운 겨울정장과 코트가 걸리면 초과적재를 한 차량처럼 방향을 못 잡고 모로 가거나, 높이 고정장치가 맥없이 풀려 순식간에 앉은뱅이 헹거가 돼버리거나, 태백산 비탈이라도 만난 듯 바닥의 경사진 턱에 걸려 영 움직이지를 못해버리거나 하기 일쑤라 이 간단해 보이는 작업에도 기술과 힘의 노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O는 ‘치마 바지 구분하라’며 한 예로 커피를 여직원이 타게 하는 P점장의 지론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때에 있어서는 수긍이 될 것 같았다. 말하자면 E패션매장은 농경사회처럼 남녀의 역할 구분이 생계도모에 효율적인 형태로 운용되는 곳이었다. ‘박스 까대기’도 그랬다.
‘박스 까대기’란 박스에 담긴 티셔츠와 팬츠, 스커트류 따위를 검수하는 작업이다. 매장에서 판매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재고와 씨름할 수는 없는 일이라, 이 역시 한시가 급하게 이루어진다. 물론 L점장은 고객이 없을 때 직원이 가만히 있으면 월급을 축내기라도 한다고 생각되는지 여러 번 검수가 끝난 박스도 다시 뜯어보게 해서 필요이상의 재고 검사를 시킬 때도 있었으니, 그럴 때면 또 하나의 퍼포먼스가 연출될 뿐이었다. 어쨌든 시간의 규약을 받으며 무거운 박스를 수십 개씩 옮기고 쌓는 일에 있어 남녀가 균등한 노동을 하는 게 효율적일 리 없었다.
수렵의 육체노동을 마치고 부족으로 돌아와 그들 손에 들린 전유물을 들어 제끼며 여자들 앞에서 의기양양 뽐을 내는 행동은 E패션매장 남사우들이 발견한 그들 조상의 유전자였다. 여사우는 적절한 타이밍에 우와우와 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들 힘으로는 무리였던 대상이 채집되는 순간마다 환호를 보내줬다.
하지만 끝내 그들은 농경혁명 같은 배부름은 맛보지 못했다. 구내식당이 열리는 11시 40분부터 1시까지는 E타워 지상층 근로자의 점심시간인 동시에 그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E패션매장에 있어 영업 피크타임이었다. 때문에 E매장 사원들은 구내식당에서 두 세명씩 교대로 밥을 먹으면서도 다음 교대조를 위해 이십분이 넘지않게 식사와 양치를 마치고 매장으로 복귀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굶주림이 배부름보다 익숙하게 몸에 베어 있었다. 허기가 심할 때에는 -정해진 휴게시간이나 그럴 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화장실이나 흡연장소에 갈 요량인 것처럼 해서 L소장의 눈치를 살피며 옆 편의점에 가 얼른 요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실로 L소장을 빼면 모두가 마른 체형인 것이 어딘지 이북의 현실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일기
그 해 우리 학교에서 4명이 죽었다. 혹자는 그 사건을 두고 사회적 살인이라 일컬었다. 망자의 이름을 딴 복지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법령에 따른 복지업무를 하는 H재단이 출범했다.
정확하게 그 학교는 ‘우리 학교’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맞지만.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실제 적을 둔 인근의 대학보다 더 자주 왕래했던 그 학교에 대해서 학생증이라든가 하는 공식적인 신분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 죽음에 대해서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들 중 하나를, 혹은 모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증축 전 학교식당 방향으로 난 벚꽃나무가 줄지어 선 흙길에서, 예술정보관 자료실 책장과 책장 사이로 너른 볕이 들어오는 좁은 틈새공간에서, 아니면 볼일을 보러 들어간 영상원 건물 화장실 칸막이를 공유하며 스치듯 만났을지도 모른다. 극장 앞 공터를 거닐며 분장을 지우고 나올 친구를 기다릴 때 잠깐, 카메라 앞에 서달라고 간청했던 사람이 혹시 그였을까.
만약 내가 부탁을 들어 그가 카메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도와주었더라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고해성사 같이 일상을 서로 공유했더라면, 햇볕을 받아 희게 빛나는 책장 앞에서 서로 읽었던 책을 나누고, 낙화한 벚꽃잎이 수놓은 길을 걸어가 밥 한 끼를 함께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가, 그들이, 우리가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전도유망의 젊음이 망인이 된 그 때, 우리는 서로 교감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선고된 사회적 죽음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었다.

O가 고개를 꾸뻑 떨어뜨리고 졸다 깨났다. 점심시간 중에 몰려들었던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M이 민트색 셔츠티에 흰 골프 스커트를 입은 마네킹에 한쪽 몸을 기대고 티 안 나게 졸고 있었다. O는 그의 포즈를 모방해 상체를 비스듬히 수납장에 기대고 축축 쳐지는 몸을 의지해보았다. 좀 앉고 싶었다. 하지만 매장을 자유롭게 비울 수 있는 것은 L점장, 매장 내에서 앉을 수 있는 것은 P점장과 카운터를 보는 맏언니 U사원 뿐이었다. 휴식을 취할 양으로 화장실 변기에 오래 앉아있기도 자꾸하면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O는 부풀어오르는 피로감도 쫓을 겸 오전부터 점심 사이 원피스, 재킷, 점퍼, 팬츠 여러 벌과 지갑, 벨트, 타이가 팔리고 공백이 생긴 곳에 똑같은 제품을 채워 넣었다. M이 같이 하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돕더니 이내 울상을 지었다. 손님이 예약을 걸어둔 상품을 깜빡 잊고 조금 전 다른 이에게 판매해버렸다는 것이다. 더는 같은 재고가 없었다.
어떡하지.
그 사이 I는 P점장과 뭐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신사복 정장이 걸린 헹거 앞이니 그 편의 문제같았다.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P점장의 치켜올라간 눈썹이 평소보다도 일인치는 더 올라가 보였다. O는 그것이 대수로운 일인지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기본 1백만 원을 넘는 가격대의 E브랜드 신사복 정장은 기성복이지만 기장과 어깨 수선을 하면 맞춤복 못지 않다. 소재나 박음질, 핏 어디를 보나 고급정장이라는 수식어가 절로 붙었다. E브랜드 정장은 주로 E타워 꼭대기층 임원이 와서 구입해 갔다. 간혹 사장, 부사장이 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미리 비서실에서 매장으로 전화가 왔다. 그들이 온다고 해서 양복을 두세벌씩 사가는 것도 아니고, 수행비서만이 와서 타이 한장만 골라 갈 때도 있었지만 L소장은 그럴 때면 갑자기 몸이 십 년은 젊어져서 사원 모두에게 미화를 단속하고 활어처럼 펄떡펄떡 의욕적인 판매를 했다. O는 장학사가 학교에 온다고 해서 수업도 제쳐두고 전교생이 바닥에 왁스칠을 했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활어의 활력에 넙치처럼 동참하는 것이었다. 막상 장학사의 머리카락도 보지 못하고 새끼 넙치 같던 그때처럼.
노원이요.
비닐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든 노파가 매장에 들어서며 덤덤하게 외쳤다.
여기 청량리백화점 나갈 것도 있어요.
U가 세월의 풍파를 맞은 나이테가 양 볼에 새겨진 노인에게서 쇼핑백 하나를 받고 카운터 아래에 있던 다른 쇼핑백을 내어준다. 노인이 숫제 제 것이라는 듯 익숙하게 쇼핑백을 받아 손가락 마디에 손잡이를 끼워 넣는다.
인편이란 매장과 매장 간에 급히 재고 교환을 해야 할 때 쓰는 운송수단이다. 손님이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는데 마음에 드는 컬러나 맞는 사이즈가 없고 전산시스템을 보니 인근 다른 매장에는 있다면 직원이 그곳에 전화를 해서 물건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점주 입장에서는 많은 재고 보유량이 곧 매장의 잠재 자산이므로 타매장에 제품을 보내주는 것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물물교환의 원리를 터득하면 누이도 매부도 좋은 만큼 성공적인 거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회전이 빠른 인기상품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이렇게 대처하여 재고를 지킨다.
아, 그거요? 사이즈 돌아갔어요.
전산시스템에 입력이 잘못된 거다, 실제로는 그 제품이 우리 매장에 없다, 다시 사이즈를 돌려서 정정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그런 말로 대처한다. 상대방은 뜻을 이해하고 더 이상의 간청을 멈춘다. 하지만 정말 친한 매장이라면,
에이. 그거 우리가 곧 팔건데… 급하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음에 우리한테 꼭 보내주기야.
이런 식이다.
여의도 인편을 마친 노인이 양손의 무게가 맞게 쇼핑백을 나눠 들며 E패션매장을 나섰다.
정부가 시행한 노인복지정책과 인편시장의 확장 간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인편업체에 인력으로 등록된 남성 노인은 지하철을 이용해 도심 백화점과 가두매장을 이동하며 물건과 물건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용금액이 저렴한 것이 장점인 인편시장에서 이들의 노동력이 귀해진 데에 ‘만65세 이상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 정책’의 키워드가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한 손에 120만원짜리 정장을, 다른 한 손에 80만 원짜리 코트를 든 노인이 왔던 길을 되짚어 여의나루역에서 무료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입구로 향한다. 거기서 동료들을 만나 서로의 손에 든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노량진 방향, 종로 방향, 청량리 방항, 영등포 방향대로 짐을 모아 교환하고 동선의 효율을 도모할 것이었다.

#욕구이론
인본주의 심리학자 머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분류했다. 인간의 욕구는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위계화할 수 있으며,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상위단계의 욕구로 나아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의식주와 본능적 욕구가 이에 해당한다. 다음 2단계는 안전에 대한 욕구로 신체, 정서적 안전을 추구하는 욕구를 말한다. 3단계는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로 주변의 관심과 사랑, 집단 소속에 대한 열망이다. 4단계는 존경의 욕구로 타인에게 인정과 존경을 바라며 명예와 권력을 좇는 기대심리를 뜻한다.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가장 고차원적 수준이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 사람인가?

누나. 오늘 한강에서 라면 먹고 가자.
직원 중 가장 막내로 곧 있을 2월에 졸업식을 앞두고 있는 열아홉살 C가 O에게 와 말했다.
야. 그래놓고 또 노래방 가자는 거 아니지? 누나 집 일산이다. 왕복 네 시간이야. 내가 출근할 때 달이 떠 있고 퇴근할 때도 달이 떠있다고 말을 했어, 안 했어?
에이, 누나도 재밌게 놀 거면서. 이미 다른 누나랑 형들한테도 다 말했어.
으이구. 그래, 배고프니까 라면은 먹고 가자.
부모와 떨어져 혼자 고시텔에 산다는 C는 종일 서서 일하다가도 뜬금없이 셔플댄스를 출 정도로 활달했다. 그러나 O는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를 연민의 정경이 건조한 시공에 켜켜이 들어가 박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시텔 총무 알바를 겸하며 임용고사 공부를 했던 O였다. 교사가 됐으면 학생으로 대했을 C가 지금은 인턴인 O보다 현장 선배였다. 어린 선배에게 느끼는 가련한 감정.
I는 안 먹는대?
그 형은 원래 혼자 다니잖아!
I는 피팅룸에서 착장을 하고 나와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보는 중년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깡 마른 체구에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I는 손님 앞에서만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그레이가 훨씬 잘 받으시네요. 소재가 특히 좋아서 다른 것보다 구김도 잘 안갑니다만, 구김이 간다면 분무기로 물을 살짝 뿌려 거꾸로 걸어놓으시면 됩니다.
여전히 거울 속 자신에게 시선을 둔 손님은 다소 뚱할 뿐 말이 없었다.
밑단은 일반으로 할까요? 카브라로 할까요?
키가 작은 손님은 잘라낼 옷감의 양이 많아 보였다.
소매를 줄이게 되면 커프스 단추가 하나 없어집니다. 괜찮으시죠?
네. 상관없어요.
L소장과 J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I가 그럴듯하게 신사복 매상을 올리고 있었다. 핏을 맞추느라 손이 많이 가는 정장판매는 캐주얼의류보다 고난도의 일이었다. 손님이 만약 어깨와 품 수선까지 요구했다면 I에게도 역부족이었을텐데 다행히 손님은 기장 수선 외에 진행할 것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까지는 자신 없는 I가 ‘품은 꼭 맞네요’ 라며 선수친 것일지도.
내일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본사 수선실에 보내도 되지만 인근의 수선실을 이용해 수선 시간을 단축한 것은 고객을 배려하는 L소장의 넉넉한 인품이였다. 만족한 손님이 알겠노라고 카드를 내밀었다. I의 월급을 넘는 숫자가 찍힌 영수증을 받아간 손님이 홀연히 사라졌다. 매출 증진에 공헌을 한 I가 그의 시장표 재킷을 벗어 다리미 걸이에 걸고 다림질을 했다. 스팀이 분사되는 소음에 숨어 혼자만 들릴락 말락한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뽀얀 김이 검은 테일러드 재킷 천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인사말씀
어서 오세요. 당신 등에 날개를 달아드릴께요.
예술인에게는 새로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날개를,
기업에게는 색다른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경험의 날개를.
예술인 여러분, 기업 여러분.
등을 대보세요.
H재단이 날개를 달아드릴게요.

오후 6시. E타워 지상층 사람들이 우후죽순 지하세계로 내려온다. E상사 E대리가 E드러그스토어에서 산 E음료를 마시며 E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E통신사 E전자 휴대폰으로 E스포츠 중계실황을 확인한다. E반도체 E계장이 E패션매장에서 E향수를 시향하고 E패션매장에서 E브랜드 머플러를 구매해 E임직원 카드로 결제해간다. E주유소에서 연료를 충전한 E그룹 통근버스가 E건설사가 지은 E타워 앞에서 E전자 직원을 싣고 바깥의 E세계로 떠날 채비를 한다.
누나! 비 온다.
머리 위로 하늘이 보이는 밖으로 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들어온 C가 말한다.
비 온다고? 눈이 아니고?
O가 시계를 보고 대답한다.
응. 눈으로 바뀌면 눈싸움하면서 가자.
그래. 그러자.
I형도 라면 먹겠대.
걔가 왠일이래?
사람이 안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그 형 오늘 죽으려나.
죽기는…
O는 실없는 소리를 함부로 하는 C에게 한소리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정말 누구 하나가 죽는대도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누나. 그거 알아?
뭐?
I형이 여기 오기 전에 백화점에서 일했을 때 말이야. 같이 일한 직원이 친구의 친구라 얘기 들었는데… 어느 날 거기 매니저가 영업시간이 지나도록 출근을 안하더라는거야. 피팅룸 문을 열어보니까 매니저가 거기서 넥타이로 목을…
일순 피로가 육중하게 어깨를 짓눌러 O는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나누는 정다운 담소를 보고있던 마네킹이 상하의를 차례로 벗었다. 욕구를 거세당해 성별을 잃은 흰 알몸이 드러났다. 지상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바람의 길따라 놀지는 한강까지 날아갔다. 어둠이 내린 강물 위로 수은의 눈발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흰 이불을 덮은 여의도가 파고도 없이 잠잠했다. 아니, 저만치 어떤 짐승의 포효가 뽀드득 발자국 소리에 엉겨 들리는 것도 같았다. 티끌 하나 없는 설원 위로 신선하게 잘 익은 홍옥 한 알이 보였다. 입을 벌려 그것을 아삭하고 깨물었지만 포만감이 없었다. 하아… 아…무심결에 뱉은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나갔다. 모두 말이 없었다. 얼른 다리를 뻗고 누워 내일도 없이 푹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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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엮인 글

1.오정은: H고시텔 243호

2.오정은: w웨딩사진

3.오정은: 프로젝트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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