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헌_비평으로의 항해

전소정 『EUQITIRC』 2016
전소정 『EUQITIRC』 2016

 

이양헌

비평이 광활한 예술작품 안에서 그 항해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18세기의 디드로(Denis Diderot)가 텍스트를 통해 하나의 회화를 온전히 구현해 내었다면, 20세기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비평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면서 “최상의 취미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항상 만장일치의 판단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과 예술을 매개하고 취향을 감식하며, 예술가의 감각을 번역하는 비평가 모델은 인상주의비평에서 역사비평, 신(新)비평으로 이어지면서 루카치(Georg Lukacs)의 표현처럼 “별이 빛나는 창공”을 따라 거대한 서사시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전통적인 비평의 권능은 다원주의의 세례 아래 상대적으로 무용해졌지만, 선재하는 작품을 목표로 그 항로를 설정하는 방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파라-텍스트로서,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호명하여 비평적 담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준거점을 세우는 선후(先後)의 방식은 비평을 지지하는 본질적인 시간성에 닿아있다. 그런데 이 시간을 전복시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작품”에 대해 비평해야 한다면 비평과 작품 간의 관계는, 그전에 비평이라는 특정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이전 작업에서 삶과 예술의 경계에 놓인 사이-존재들을 탐구하던 전소정은 ‘EUQITIRC’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이상적인 작품에 대한 비평문을 써 줄 것”을 8명의 비평가와 기획자에게 요청했다. ‘시간’의 도치 혹은 ‘자리’의 전도라 부를만한 이 사건은 비평과 작품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양태를 드러내면서 질문의 연쇄를 만들어내는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부재하는 작품에 응전하는 필자들의 태도다. 현시원이 작가의 꿈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작업에 대해 오직 정박해야만 하는 비평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면, 김홍기와 안소현은 작가가 선취해야 할 미적 규범과 창작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상적인 작품’을 어림하고 나아가 비평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

작품을 향한 방혜진의 진술은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기이한데, 전소정의 이전 작품들을 경유하면서 하나의 가설, 그러니까 <감각운동 형상학>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향해 끝없는 침잠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작가가 그 동안 관찰했던 탁월한 기술자들 대신 ‘기관 없는 신체’가 등장하고 영상을 통해 운동-감각을 조율하는 한편, 무대 없는 연극성을 실험해낸다. 잠재태를 형상화하는 비평은 역전된 관계 안에서 작품화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영상과 퍼포먼스에 지속적으로 천착해 온 방혜진의 비평을 떠올린다면 글이 재현하는 작품의 귀속권은 모호해진다. <감각운동 형상학>은 누구의 작품인가? 작가인가 아니면 비평가인가?

확고했던 비평의 시간 축은 이제 유동하면서 작품 앞으로 이접되거나 창작과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이성휘의 글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김해주는 기억과 주관의 세계 안에서 작가를 바라보면서 온전한 독립항으로 서있다. 깊은 바다 속에서 거대한 크라켄을 잡아먹다가 이내 용연향을 토해내는 향유고래는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이수연은 작가의 창작 과정 안에서 이상적인 예술을 만들어내는 장치로서 이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지만, 바다를 떠도는 용연향은 동시에 비평가의 실천과도 포개진다. 사라진 이정표 앞에서 오랫동안 항해를 이어온 비평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대신 ‘EUQITIRC’는 하나의 항로를 제시하고 있다. 그 자체로 창작의 위상을 품은 비평, 작품의 파생을 넘어 더 넓은 대양으로의 출항을 준비하는 비평의 가능성을 말이다. 바야흐로 비평의 존재론이 진동하면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글은 월간 퍼블릭아트 2017년 5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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