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_소녀상과 미술 담론-‘소녀상의 예술학’ 토론회를 통해 본 한국 진보 미술계의 의식

 

소녀상 청소
사진출처: 국제뉴스

최 범/ 디자인 평론가

미술 작품으로서의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를 표현한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은 조각 작품이다. 그러니까 미술 작품이다. 하지만 소녀상은 미술계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별로 없다. 물론 그것은 소녀상이 미술 작품이기 이전에, 미술 작품을 넘어서 이미 격렬한 정치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녀상은 단순한 조각 작품도 순수한 미술 작품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소녀상이 미술 작품으로서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는 말은, 그것을 순수한 조형적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유감스럽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말하는 미술적 대상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술이라는 형식이 사회문화적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나는 소녀상이 순수한 시각적 형상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녀상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그것의 시각적 형식을 통해 해석하는 접근이 없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녀상을 미술 작품으로 보자는 것은 그것을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미술을 순수하게 보아야 한다는 관념 자체도 낡은 것이다. 소녀상을 미술로 본다는 것은, 오히려 미술을 순수하지 않게, 즉 그것을 둘러싼 맥락들 속에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소녀상에 대한 미술적 접근이란 조각 조형물로서 소녀상이 어떤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는, 말 그대로 미술을 중심으로 한 의미론적 접근을 가리킨다. 그동안 소녀상에 대한 논의에서 이런 방식의 접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소녀상은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미술계의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별로 없다. 그나마 미술계 내에서 화제가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 외적인 스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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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sbs

아무튼 나는 소녀상의 정치적 담론과는 별도로,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 미술 담론의 대상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나 자신도 소녀상의 미술 담론을 깊이 있게 전개할 능력은 솔직히 없다. 다만 이런 가운데 아주 드물게 소녀상에 대한 미술계의 논의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16년에 있었던 ‘소녀상의 예술학’이라는 토론회였다.1) 이 토론회는 7명의 참가자 거의 대부분이 미술인들로서, 이것이 이제까지 한국 미술계에서 목격된 소녀상에 대한 거의 유일한 공개적 논의의 장이었다. 나도 이 행사에 토론자로 참여하였는데,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이 토론회에서 거의 유일한 소수 의견자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소수 의견자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이 날 소녀상을 바라보는 한국 미술계(정확하게 말하면 진보 미술계)의 의식 구조를 확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수 의견의 구조를 말이다.

한국 미술계의 지형과 소녀상에 대한 관심

이러한 구조의 이해를 위해서 먼저 내가 보는 한국 미술계의 지형을 간략히 그려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한국 미술계를 미학적,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크게 보수 계열과 진보 계열로 구분하는데, 이는 다시 보수 아카데미즘, 보수 모더니즘, 진보 리얼리즘 계열 들로 삼분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보수 아카데미즘 계열은 말 그대로 현대미술 이전의 낡은 아카데미즘 추종 집단으로서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두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에 반해 보수 모더니즘 계열은 미학적으로는 20세기 현대미술에서의 형식적 모더니즘을, 정치적으로는 한국 권위주의 정치 세력과 친화성을 가지는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견 미학적으로는 진보적인 듯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20세기 후반 한국의 우익 정치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모더니즘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러한 정치적 의식과 무관하지 않게 순화, 변형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합적으로는 보수적이다. 흔히 ‘한국적 모더니즘’, ‘앵포르멜’, ‘단색화’ 등으로 불리는 미학적 특징을 지니는 이들이야말로 한국 미술 제도를 지배하는 주류 집단인데, 그런 점에서 미학적 아카데미즘과는 별개로 정치적 아카데미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한편 한국 미술에서 진보 계열이란 통상 ‘민중미술’이라고 불리는 리얼리즘 경향의 미술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실 이들을 진보라고 칭하는 것도 다소 모순적인 것이기는 한데, 그것은 리얼리즘이라는 19세기의 보수주의 미학과 20세기 한국 사회의 변혁이라는 정치적 진보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미학적으로 리얼리즘은 보수, 모더니즘은 진보, 이렇게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체로 현대 미술사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경향을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 라고 하는 것은 미학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미학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역시 얼마든지 선별적이고 모순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통상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부르는 모더니즘이, 내가 보수적 모더니즘이라고 칭한 계열에서처럼 정치적 보수와 결합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이해되는 리얼리즘이 정치적 진보와 결합하여 진보 리얼리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 전제하에서 말하자면, 민중미술 계열의 리얼리즘을 보수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19세기 이후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서,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와 친화성을 갖기 때문에 흔히 진보적이라고 불리기는 한다. 여기에도 미학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으면서 일체화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 미술계를 이렇게 구분하면 결국 앞서 예시했듯이 아카데미즘과 모더니즘은 보수, 리얼리즘은 진보라는 등식이 일단 성립된다. 이러한 갈래는 이들의 예술 정치관과도 연결되는데, 일단 아카데미즘과 모더니즘으로 이루어진 보수 미술계는 예술에 대해 반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미술을 순수한 것으로 보고 미술에 대한 정치적 접근을 반대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실제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상식이라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정치적이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인데, 실상 한국 보수 미술계는 그 정도가 아니라 매우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우익 권력에 협력하면서 정치화된 집단이라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

그에 반해 진보 미술계는 예술의 정치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무리들로서 소위 민중미술 계열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다. 이들은 미술이 정치적인 것이며 현실 참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변혁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회 변혁 세력의 일부이며, 기존의 낡은(?) 예술 관념에 충격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낸 집단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아카데미즘이나 모더니즘과 달리 리얼리즘을 주된 미학적 경향으로 삼고 있다. 이들 민중미술계 또는 진보 미술계는 실천적인 예술 의식과 함께 한국 진보 진영의 공통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있다.

일단 이렇게 분류해보면 이들 각 집단의 소녀상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먼저 아카데미즘이건 모더니즘이건 간에 보수적인 미술계는 소녀상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순수예술 관념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인데, 소녀상과 같이 정치적인 작품은 불순하다고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또 다른 측면에서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은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기로 한다. 사실 소녀상 자체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에 충실한 조각상이기 때문에, 모더니즘 계열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형식적인 리얼리즘 조형관을 가진 아카데미즘 계열도 소녀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소녀상이 정치적인 표현물이라는 것 때문이겠지만, 사실 미학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소녀상은 비교적 평범한 리얼리즘 조각품일 뿐 특별히 언급할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진보 미술계에서는 소녀상에 대해서 관심을 표하고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이 소녀상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히 보수 미술계와 정반대의 이유에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녀상은 정치적인 미술이며, 그것도 반일 민족주의의 직접적인 표현물이기 때문에, 바로 한국 좌파와 민중미술계의 이해 및 인식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미술계에서 소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거의 유일한 집단은 진보 미술계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예의 토론회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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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소녀상의 예술학’ 토론회 참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 왼쪽부터 안태호 부천문화재단 팀장, 디자인평론가 최범씨, 장수희 연구모임 아프꼼 연구원, 이나바 마이(광운대), 이태호(경희대), 이택광(경희대) 교수, 김준기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예술가 홍승희씨. 사진출처: 한국일보

소녀상의 예술학’ 토론회와 진보 미술인들

이 토론회에 참석한 인사들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인사들이다. 주로 미술인들이 중심이 된 3명의 발제자와 4명의 토론자 모두 그러하다. 물론 진보 인사라는 분류와 그들의 의식이 실제로 진보적인가, 또 어떤 부분에서 진보적인가 하는 문제는 좀 다르다. 당연히 인간의 의식은 복잡하며 심지어 모순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진보의 개념 역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러한 본질적인 측면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분류되는 것은 분명 존재하며, 그런 점에서 예의 토론회의 참석자들이 모두 그렇게 분류되는 사람들임도 사실이다.

그러면 이 날 토론회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과 성향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미술평론가 이태호와 김준기는 모두 이른바 진보적인 리얼리즘 계열, 즉 민중미술이라고 불리는 계열에 속하는 인사들이다. 이들은 미술의 사회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추구한다. 평론가 이태호는 진보 미술계에서는 비교적 원로에 속하는 인물이며, 순수예술 개념을 비판하고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평론가이다. 그가 2015년에 펴낸 평론집 <미술, 세상을 바꾸다>(미진사)는 제목에서부터 그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김준기는 큐레이터이자 평론가로서 몇 해 전부터 ‘사회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미술의 사회적 실천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둘 모두 한국의 진보적인 미술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날 발제를 한 문화평론가 이택광 역시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인 인사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꽤 대중적인 명성을 가진 스타 지식인으로서 특히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의 마르크시스트라고 불러야 할 슬라보예 지젝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여러 차례 밝혔듯이, 그에게 문화 평론이란 곧 다른 방식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토론자 중 일본인인 이나바 마이(稻葉眞以)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술평론가이다. 그녀는 한국 민중미술을 연구하여 국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광운대학교 교수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남미로의 이주 경험으로 인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재일한국인인 서승 씨와 정신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한편 미술가 홍승희는 스스로를 소셜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사회 참여적인 행동주의 미술가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세월호 사건 등 사회적 사건들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특히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협상 타결을 환영하는 ‘어버이연합’의 집회에서 ‘대한민국 효녀연합’이라는 피켓을 들고 나타나 맞불을 놓으면서 유명해졌다. 또 한 사람의 토론자인 장수희는 내게 생소한 인물인데, 부산 지역의 ‘연구모임 아프꼼’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한다고 한다. 아마도 지역에서 인문학적 실천을 이끄는 모임의 구성원인 것으로 판단된다.

나는 디자인 평론가이지만, 1980년대 말부터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해왔다. 그러므로 나 역시 진보 미술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한 주된 동기는 정치적인 것으로서 당시 군부 파쇼정권에 대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주로 모더니즘 미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민중미술의 리얼리즘 미학에는 그다지 미학적 친화감을 가지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민중미술의 정치적 지향에는 동의하였지만, 미학적 측면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민중미술 집단 내에서는 소수자에 속했다. 대략적으로 그려본 토론회 참여자들과 나의 성향을 통해서 이하의 논의들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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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8월 14일에 을지로입구역 버스정류장에서 소녀상이 설치된 151번 버스에 올라 소녀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서울시)

소녀상을 보는 관점들

이 토론회에서 대부분의 진보 미술인들은 소녀상을 실천적인 미술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편이었으며, 어쨌든 ‘일본-가해자 : 한국-피해자’라는 단일 구도를 전제로 접근하였다. 이들이 한결같이 위안부 문제의 모순 지점을 민족 갈등으로 보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반면, 문화평론가 이택광만은 좀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문제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은 이택광과 나 둘 뿐이었다. 그러나 이택광과 나의 관점이 내용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토론회 참여자들의 핵심적인 견해를 하나씩 점검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태호와 김준기는 무엇보다도 소녀상의 ‘장소성’을 공통되게 강조했다.(이하 괄호 안은 <문화+서울>에 실린 해당 기사의 쪽수 표시)

  “이 작품은 어디에 세워졌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위치에서는 표현에 상당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피가 심하게 흐르거나 속살이 드러나는 등의 표현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동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들의 고통에 비해 너무 얌전하고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일본대사관이 움직이지 않는 한 ‘평화의 소녀상’은 그 어떤 협약이나 권력에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은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위치를 떠나면 허약해질 수 있습니다.”(33쪽)

이태호는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지는 바람에 그들의 고통이 더 강렬하게 표현될 수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아쉽다고 했다. 김준기 역시 소녀상의 장소성이 갖는 효과와 함께 그것이 갖는 상징투쟁의 측면에 주목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는 상투적인 어법이지만, 소녀상이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는 역사성과 장소성으로부터 나옵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있다는 점, 그것이 위안부 의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소녀상은 그냥 소녀가 아니라 상징투쟁의 장으로 증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위안부 관련 합의 때문입니다. 상징투쟁의 장이 한국 대 일본의 국가주의 프레임에서 국가와 시민으로 전환된 겁니다. 이 대목에서 민족 정동(情動)으로부터 사회 현상으로 이 작품에 대한 독해의 방향을 틀어볼 필요가 있습니다.”(33쪽)

그러면서 그는 소녀상을 리얼리즘으로서의 비판적 예술,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가 주도한 공공예술, 예술가가 시민사회단체와 협업한 공동체 예술, 나아가 역사적 의제를 쟁점화 하는 데 성공한 행동주의 예술이라고 하면서, 그가 ‘사회적 예술’이라는 부르는 것의 거의 모든 성격을 소녀상이 구유하고 있다고 하면서 높이 평가한다. 이태호와 김준기는 소녀상이 피해자의 비참함을 재현하고 그들의 투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데에 일말의 의문도 가지지 않고 그것의 비판적, 저항적 성격을 적극 지지, 강조하고 있다. 그에 반해 문화평론가 이택광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을 말한다.

  “소녀상은 민족과 국가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국가는 합의해주었는데 국민은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면, 국가는 도대체 무엇인지 그 질문을 소녀상이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녀상의 미학적 효과로 등장한 것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상황과 소녀상이라는 오브제가 만났기 때문이고 위안부 문제라는 정치적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술이 파급력을 갖는 것은 정치와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작가가 맨 처음 빚어서 놓았던 그 소녀상이 아닙니다. 기존의 자리를 이동해 있는 조형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동시킨 것이 민족주의라고 생각합니다.”(34쪽)

이택광은 민족은 실재인 반면 민족주의는 그 효과로 보는 것 같다. 그는 민족이란, 국가에 완벽하게 포섭되지 않는 채 누락된 것으로서, 그 존재와 권리를 끊임없이 주장하는 일종의 정치이며, 그런 점에서 소녀상 옆에 여공상(女工像)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위안부 소녀상은 국가에 의해 포섭되지 않고 누락된, 민족이라는 숭고한 대상의 요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효과를 발휘하는 매개물이라는 점에서 소녀상의 리얼리즘을 옹호한다. 말하자면 이택광은 민족주의를 기각하는 대신에 현대 국가 정치가 배제하고 있는 민족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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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재단은 제5회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인 2017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는 조형물 ‘작은 소녀상’ 500점을 설치했다. 사진출처: 한국일보

토론자 이나바 마이는 소녀상의 장소성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태호, 김준기와 완전히 동일한 입장이며 특별히 차별화된 의견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홍승희는 거기에서 나아가 “소녀상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이 기존의 예술은 만지지 말아야 하고, 무언가 하면 안 되잖아요. 사람들이 소녀상을 안아주고, 목도리도 둘러주는 것이 새로운 예술이고, 예술이 어떻게 사람들과 공존하고 관계 맺는지에 대한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소녀상은 사회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하는 작품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그 작품이 시민들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민사회의 장에 예술이 존재하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37쪽)라고 말하며, 행동주의 예술가답게 소녀상의 이러한 관객 참여적인(?) 효과에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소녀상이 표상하는 의미의 층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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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장수희는, 이태호가 중국의 위안부 조각상이 격정적인 표현을 하는데 비해 한국의 소녀상은 너무 얌전한 것 아니냐고 한 지적에 대해, 중국의 경우 국가의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위안부의 재현에는 오히려 과잉된 표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위안부가 소녀인가 성인인가 하는 분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기억을 어떻게 잘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기억과 재현의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다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토론자로 참석한 나는 다른 모든 발제자, 토론자들과 다른 견해를 내보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기본적으로 진보 미술계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그 진영 내에서는 아웃사이더로서 민족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녀상이 갖는 민족주의적인 표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나는 재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소녀상을 해석한다. 그럴 때 두 개의 문제틀이 만들어진다. 하나는 ‘재현의 정치학’이고 또 하나는 ‘재현의 미학’이다. 먼저 ‘재현의 정치학’은 소녀상이 재현하는 역사상(歷史像)과 관련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소녀상이 이분법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했다.

  “소녀상이 재현하는 방식은 아주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입니다. 이는 역사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분법적인 세계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공산주의와 일본에 대한 태도입니다. (중략) 이분법적인 세계는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세계입니다. 소녀상이 맑고 슬픈 모습이지만 사실 재현의 정치학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인문주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 모순된 것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소녀상에서 한때 진보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 민중미술의 지독한 역설을 봅니다.”(36쪽)

재현의 정치학은 결국 재현이 어떠한 경계와 갈등을 드러내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는 재현 이전에 문제를 어떤 종류의 모순으로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로만 보는 것은 그것이 가진 젠더 모순이나 계급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 되며, 이는 결국 위안부를 둘러싼 폭력과 인권의 문제에 대한 사유를 보편화하지 못하고 민족 갈등이라는 특수한 문제 내에 가둬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역사적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의식은 필연적으로 ‘재현의 미학’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역사의 근원적인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이는 예술작품이 역사를 재현할 때, 심지어 역사 속의 고통을 재현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그러한 재현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저는 재현하기 위해서는 재현의 불가능성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재현만이 아니라 너무 쉬운 재현이 문제인 거죠. 사실 위안부의 고통이라는 것은 재현할 수 없는 거예요. 전쟁의 고통도 재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이지요.”(37쪽)

물론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해야만 하고, 또 재현하기도 하는 것이 예술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여기에는 윤리적, 미학적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역사는 단지 현재의 인식을 위한 소재로 전락하여 너무 쉽게 소비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역사적 고통에 대한 손쉬운 재현은 결국 예술적 재현이 되기보다는 단순한 권력의 재현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급기야 소녀상을 사회예술이기는커녕 “국가주의 예술”(36쪽)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른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토론회 참여자들은 소녀상이 진실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는데 반해, 나는 소녀상이 진실을 재현하고 있지 않다고 본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나는 소녀상이 식민 지배의 현실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하며 그런 점에서 역사 인식상의 왜곡을 초래한다고 보는 것이다.4) 이는 미학 이전에 인식의 문제이다. 쉬운 재현은 그러한 단순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소녀상에 드러난 이분법적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단순화하고,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예술은 재현의 지난(至難)함에 대한 의식 없이 상투화된 키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위안부 소녀상에서 그러한 인식과 미학의 덩어리를 발견한다.

8월 13일 인천시 부평구 부평공원에 건립된 징용노동자상 '해방의 예감'. 이원석 조각가가 제작했다.
2017년 8월 13일 인천시 부평구 부평공원에 건립된 징용노동자상 ‘해방의 예감’. 이원석 조각가가 제작했다.

한국 진보 미술의 과제

‘소녀상의 예술학’ 토론회 참여자 다수를 통해 드러난 현실 인식과 예술 의식은 결국 한국 진보 미술계의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다.5) 이것은 한국의 진보 미술인들이 식민지 역사를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민족주의의 서사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란 피해 경험의 특권화를 통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역사적 현실의 복합성과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역사적 현실의 복합성과 모순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의 결여, 이것이야말로 가장 반인문주의적이고 반예술적인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는 결국 한국의 진보 미술계가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는 역설적 사실을 증명한다.

  한국의 진보 미술계는 미술의 인문주의와 보편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들이 말하는 진보, 이들이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비극은 민족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대미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술이 언제나 기존의 인식과 관념을 깨뜨리면서 나아가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 미술은 현대적이지도 않고 진보적이지도 않다. 결국 한국 진보 미술의 과제는 민족주의라는 한국 좌파 일반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다. 한국 미술의 진보는 이러한 의식의 개혁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에 의해 침윤된 일면적 피해 서사의 조형물로서의 소녀상의 극복은 민족주의 예술관으로부터 벗어나 인문주의 예술관으로 나아가는 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한국의 진보 미술이 진정 진보적으로 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 심포지엄 <‘위안부’ 동원과 재현의 정치학>, 2017년 7월 1일.


1) 이 토론회는 2016년 3월 19일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문화공간인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렸다. 정확하게는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의 <현장+담론>이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술평론가 이태호, 김준기, 문화평론가 이택광 등 3인이 발제를 하고, 일본인 미술평론가 이나바 마이(稻葉眞以), 디자인 평론가 최 범, 미술가 홍승희, 인문학 연구자 장수희 등 4인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 날 토론회의 내용은 서울문화재단 기관지인 <문화+서울> 2016년 4월호에 실렸다.

2) 한국 보수 미술계를 대표하는 한국미술협회(미협)는 줄곧 권위주의 정권을 지지하고 협력해왔다.

3) 나는 홍승희가 ‘대한민국 효녀연합’이라는 피켓을 들고 나왔을 때, ‘어버이연합’이라는 보수 노인집단과 싸우는 것은 지지하지만, ‘어버이’라는 말과 맞짱 뜨기 위해 ‘효녀’라는 봉건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불만스럽다는 글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홍승희는 눈앞에 드러난 불의와 싸우는 데는 용감하지만, 기존의 인식과 언어가 가진 한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4) 소녀상이 순결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는 비판은 더러 있는데, 이 역시 민족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부분이다.

5) 나는 이들의 의식을 한국 진보 미술인 다수의 의식으로 치환해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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