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경_‘예술 만세’를 외치는 비엔날레와 짧지 않은 감상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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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Viva Arte Viva’[1]전체 인상에 대해서

2017년, 올해는 4개의 현대미술 이벤트-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전,아트바젤-가 10년 주기로 동시에 열리는 날이다. 이 중에서도 베니스 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는 1895년에 설립되어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중단되었다가, 올해 57회를 맞이한 제일 역사가 오래된 ‘동시대 미술’‘국제’ 전시회이다. 이 세계 규모의 전시회는 베니스 섬의 지아르디니(Giardini)와 아르세날레(Arsenale)를 중심으로 열리며, 두 구역 외에도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아르세날레와 지아르디니를 합친 주요 전시장 총 면적은 (500m 축적의 구글 지도로 비교했을 때) 양천구 목동 아파트 2, 3 그리고 4단지 합친 면적보다 살짝 작다. 한마디로 전시 스케일이 마을 3개 합한 것보다 조금 작은 수준으로, 매우 크다.

2년마다(biennial), 오직 전시목적으로만 쓰이기에는 좀 거대하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필자는 2박 3일을 보냈다. 하루는 지아르디니를, 그다음 날은 아르세날레를 관람했다.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여덟 시간씩 이틀이라는 한정된 기간 안에 각 구역을 하루 만에 제대로 감상하기엔 그 장소는 너무 거대하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전시회와 비교도 안 되는 양의, 120명의 초대 작가들과 86개국의 예술 작품들은 순서대로 혹은 무작위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알다시피, 이 행사의 규모, 분량, 그리고 혼종성은 다른 전시회와 구별되는 특성이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비엔날레를, ‘플랫폼(Platform)’으로 정의하곤 한다. 본래 ‘플랫폼’이란 말은 ‘기차나 전철에서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승강장’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수많은 공급자와 수많은 수요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원하는 가치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조성된 거점’이라는 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비즈니스·IT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전세계의 예술 작품들을 비교·대조하고, 그와 관련된 사회 이슈와 담론을 나누는 장소’라는 뜻이 되겠다.[2]

플랫폼에 입장하고서, 어떤 작품은 급행열차 마냥 정거장을 빠르게 지나치기도 했고, 혹은 그 자리서 오랫동안 정차하기도 했으며, 또 몇몇은 한국에 돌아와서 곰곰이 의미를 되새겨본 후에야 찾아올 정도로 길게 연착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한동안 잠시나마 거류했던 플랫폼의 큰 그림을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할 수가 없었는데 거시적 시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의 경험이 없기도 하고 비엔날레의 특성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올해 2017 베니스 비엔날레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감독이 애초에 거시적 주제를 갖기를 거부했으니까.

2015 베니스비엔날레 ‘All the World’s Futures(모든 세계의 미래들)’은 하나의 주제 아래에서 사회 정치적인 성향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성향은 당시 예술감독인 오쿠위 엔위저(Orkuwi Enwezor)의 단독 인터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과거와 미래는 이러한 의미에서 깊게 꼬여있다. 이러한 잔여물들은 과거로부터 온 검게 그을려진 호박(화석)과 같다. 그 파편은 그 자체로 여전히 신선하며, 그것은 다 쓴 잿더미가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중동, 나이지리아, 남아시아와 방글라데시의 충돌처럼.”[3][4]

반면, ‘Viva Arte Viva’의 예술감독인 크리스틴 마셀(Christine Macel)은 오쿠위 엔위저와의 대담 영상 초반부부터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각 예술가들의 작업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주요 아이디어였다. 비엔날레는 매번 주제를 묻는다고 오쿠위가 알고 있는데[5], 나의 반응은 주제를 고르지 않는 것이었다.[6] 그리고 내 자신에게 말하기를.. 주제는.. 당신도 알다시피 실제로 그 예술 작업 자체에 반응하지 않은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제를 불러오게 되어있다, 아마도, 하지만 그게 비엔날레의 주제이고 핵심이다.”[7]

그녀의 전시 서문에 마침 ‘이번 비엔날레는 예술가와 함께, 예술가에 의해, 그리고 예술가를 위해, 설계되었고 그들이 제시하는 형태와 그들이 묻는 말과 그들이 발전시켜 나간 행위들과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해 설계되어 있다’고 적혀있다.[8] 3개의 챕터[9]로 나누었던 엔위저와 달리 9개 챕터[10]로 구성했고, 각 챕터는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유동하는 존재라 했다. 즉, ‘이동하는 파빌리온(Trans-Pavillion)’이라는 것.

이동하는 파빌리온에 관해, 엔위저는마셀에게‘모양과 형태가 없어 보이는 지점까지 확장하는 전시를 어떻게 결행하게 되었는지’ 질문했고[11], 그녀는 ‘어떤 것을 체계화하려고 시작할 때,나는 해체시키고 싶었다. 물론, 균형이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는 아티스트들을 어떠한 틀 안에 함께 두고 싶어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한계점 없이 움직일 수 있기를 원했다’라고 답했다. (결국 나중에 엔위저가 대놓고 “비엔날레를 조직oragnize하려 할 때마다 당신의 혼잣말, 자기 연설self-speech이 있다”며 한마디 던졌다.)

확장하는 비엔날레와 그 속에서 서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파빌리온. 그녀의 전시 디자인은 더욱 나를 박람회에서 배회하는 손님으로 만들었다. (물론,비엔날레는 본질적으로 박람회 같은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12]) ‘주제가 없는’ 비엔날레는 유독 구경거리를 계속 찾아 돌아다니게 했고, 아무런 인상을 나에게 남기지 못했다. 인상이 남은 것은 각각 개별 작가의 작품일 뿐, 이것을 그녀가 의도했을 지라도, 개별 작품의 인상이 짜임새 있는 전체 구성에서 오는 감동을 뛰어넘는가? 나는 전시를 본 것인가? 아니면 4D로 된, 9장에 걸친 현대미술 도감을 본 것인가?

이런 나와 달리, 여타 관람객들은 마셀의 말마따나 어떤 주제에 깊이 천착하면서도 사고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을 실로 유희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런 놀이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법이고, 별도의 튜토리얼이나 설명 없이 납득하거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덕분에 나는 플랫폼을 헤매다 나에게 와 닿은 몇 작품들 중 두 가지만 소개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소개 해줄 작품 둘 다 비엔날레 전시관 작품이 아닌 국가관 작품인데, 그 나라의 커미셔너가 따로 국가관을 구성하고 꾸미다 보니 각 나라가 다루는 주제를 잘 알 수 있었다.

-Greek Pavilion: Laboratory of Dilemmas[13]

그리스 국가관은 지아르디니의 어떤 다리를 건너 한구석에 위치해 있다. 파빌리온 안으로 들어서면 위층으로 올라가서 6개의 작은 화면에 재생되는 비디오 클립을 볼 수 있다. 각 비디오 클립은 한 실험실에서 처한 딜레마 상황을 보여준다.

딜레마 상황은 이렇다. 한 연구팀은 실험실에서 강화 세포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화 세포를 키우는 초기 목적을 달성했는데, 실험 막바지에 지금껏 연구하던 세포와 다른 종류의 새로운 세포가 발견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세포는 기존 세포 바깥으로 분리시키면 바로 죽어버리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고, 기존 세포와는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딜레마 상황에 대해서 격렬하게 논쟁하는 영상이 같은 층의 이어지는 방에 큰 화면으로 재생되고 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미로 형태의 공간에 이 실험과 관련된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실험 기록 일부분이 벽에 전시되어있다.

그리스관에서 나눠준 팜플랫에 따르면, 지오르지 드라이바스(George Drivas)의 이 설치 작품은 그리스의 고대 희곡인 Aeschylus’s Iketides (Suppliant Woman, 463-464 BC)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왕 또한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한 무리의 외국인 여성이 왕을 찾아와 제발 자신들을 이 나라에 피난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애원했고,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이집트와의 전쟁을 감수할지 아니면 그녀들을 거두지 않고 그가 서약한 인도주의 및 환대의 신성한 법을 위반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만약 그 여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소멸 직전의 위기에 처한 우주 속의 극미한 세포 조직이었다면?’ ‘만약 아르고의 시민들이 이 세포를 살릴 지 말지 고민하는 과학 공동체였다면?’와 같은 질문을 통해, 이 작품은 사회 정치적인 층위에 놓여있던 고대의 딜레마를 과학과 윤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주론적인 층위로 옮겨놓았다[14] 그리고, 우주론적인 층위로 옮겨간 딜레마는 다시 동시대의 사회 정치적 측면의 딜레마로 옮겨간다.

2015년 여름부터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들의 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이 난민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말 것인지 격렬하게 토론했다. 그리스 내부에서는 2008년부터 2015년을 거쳐 구제금융을 3번이나 신청했고,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난민이 공식 의제에 오르기 전부터 많은 양의 난민들을 마주해 왔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사정이 안 좋은 그리스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다. 이 순간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관람객들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아닌 제 3자이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든 작품이 반영하는 현실에 대해서든 당사자가 된 것 마냥 계속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계속 고민하면서 미로를 따라 걷다 보면, 심지어 이 실험은 실제 있었던 일이었는지, 실제를 바탕으로 한 허구인지, 아니면 100% 허구인지 계속 헷갈려 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스스로 묻게 된다.

이 실험의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실험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뜨거운 감자를 던져놓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나머지는 관람객(나)의 손에 남았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나 최악을 피할 방법만 있을 뿐 최선의 선택지는 없을지라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행위 자체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도망치지 않고 딜레마를 마주하며 각각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우리들은 아름답다.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오롯이 감내하려는 그대들에게, 딜레마 순간을 감당해야 했던 당신과 나에게 격려의 박수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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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nisia Pavilion: The Absenceof Paths[15]& NSK pavilion[16]

키오스크(kiosk) 박스 형식의 간이 건축물이었지만, 튀니지 파빌리온은 1958년 이후 처음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국가관을 세웠다[17]. 이 건축물은 지아르디니 근처에 하나, 아르세날레에 두 개 놓여있다. 관람객들은 이곳에 찾아가면 간단한 질문을 받고 지문을 찍은 후에 파란색 여권을 하나 받는다. 비엔날레 한정이랍시고 아주 어설프게 만들어진 여권은 아니었다.[18]

나는 아르세날레의 아르헨티나관을 향하는 길에 키오스크 박스에 들렸고, 한국에 와서야 그 여권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았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유럽 여행 내내 나는 비자를 한 번도 요구받지 않았다. 이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비자 없이 160개 국가(일본, 대만, 홍콩, 프랑스, 영국, 등)를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인데, 자유롭게 외국을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특히 난민의 54%를 차지하는 시리아, 소말리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가 거의 없다. 비자는 원래 불법체류나 범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입국을 막기 위해 발급되어 왔으나, 난민의 입국을 막는 용도로도 많이 쓰이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튀니지 파빌리온은 국적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지 할 수 있는 ‘Freesa(Free + Visa)’ 여권을 나눠 주었다. 태어난 국가에 귀속되어야 했던 기존 여권과 달리, 프리자(Freesa)는 이러한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대안을 57회 비엔날레에서 잠시나마 실현시켜 본 작업이었다. 난민 위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혹은 알고 있어도 외면하려는 이들에게 그 심각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그 심각한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느냐’는 분명 다른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예술이 할 수 있는 일들 중 하나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게 도와주는 일이 아닌가?

다만, 알고 보니 튀니지는 NSK 파빌리온과 좀 겹치는 작업을 전시한 꼴이 되었다. 1984년에 결성된 예술가 그룹 NSK(Neue Slowenische Kunst)는,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산타 크로체(Santa Croce)에서 한 달[19]간 NSK 국가(NSK State in Time)의 여권을 발행해 주었다. NSK 국가는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하던 1992년 중반에, 아무런 물리적 영토가 없는 국가임을 선언[20]하며 나타났다. 그 해부터 여권은 계속 발급되어 왔는데-당시 여권을 발급하는 초기 목적은 튀니지와 좀 달랐다-현재까지 난민과 같은 절박한 사람들이 NSK 여권을 발급 받아왔고 그 숫자가 15000여명에 이르렀다.[21]

NSK의 여권 발행 작업이 베니스 비엔날레 안으로 들어왔기에[22] 튀니지 파빌리온과 이야기 하는 바가 거의 일치한다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같은 주제에 작업이 겹치기까지 할 정도로, 유럽이 처한 난민 숙제는 예술계 내부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튀니지와 NSK뿐 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리고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작업[23]까지도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의제가 함부로 유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들은 전부 ‘당사자성’을 의식했는지 서류를 발급해주거나 작품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역할을 실제 난민들에게 맡겨 작품에 어떻게든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 작업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가짜 서류가 아닌 진짜 여권과 비자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대중들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의 도덕적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 개개인들을, 베니스 비엔날레의 많은 관중들이 생소하게 볼, 예술의 구경거리로 만들어도 되는가?”[24]

비엔날레 리뷰를 마무리하며

베니스 비엔날레의 큰 주제가 주는 감동을 얻어가는 데 실패했지만, 플랫폼에서 만난 그리스와 튀니지 파빌리온이 나에게 소중한 질문들을 안겨주었다. 전세계의 예술 작품들을 비교·대조하고, 그와 관련된 사회 이슈와 담론을 생각해 보는 1차 목적만큼은 잘 달성한 것 같다. 다만 전체 후기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역사적 유래도 깊은 바로 그 베니스 비엔날레에 다녀왔다’로 끝나지 않기를 원했는데, 그 이상의 메시지를 받아 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은 좀 욕심이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자니,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겪었던 일련의 과정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숙소가 위치한 메스트레역에서 베니스 본 섬으로 향하던 도중 보았던 바다 풍경들과, 산타루치아역에서 내리자마자 내 눈을 찌르던 햇빛, 그리고 새빨간 노을 속에서 타오르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복잡한 골목들, 그 와중에 터지지 않던 3G인터넷 등등. 이런 웃픈 기억들 모두가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다녀온 적이 있다’라는 감상에 기여하고 있었다.


[1]‘Viva’는이탈리아어로 ‘만세’ 혹은 ‘파이팅’을 뜻하며 ‘Arte’는 ‘예술’을 의미한다.

[2]https://news.artnet.com/exhibitions/art-demystified-biennials-506903‘특히 2016 상파울로 비엔날레 감독(Jochen Volz)은 ‘비판적인 사고를 행사하고 대안적인 현실을 생산하는 와중에, 다양성과 자유 그리고 실험을 적극적으로 촉진시키는, 독립된 토대로서, 플랫폼이 되는 것’을 비엔날레의 역할이라고 정의했다.

[3]https://news.artnet.com/exhibitions/okwui-enwezor-venice-biennale-karl-marx-havana-biennial-boycott-274420

[4]그런데 이런 의제를 내세웠던 오쿠위의 전시도, 마이크 왓슨이라고 하는 비평가에게 ‘대체 누구의 미래냐?’라면서 ‘정치적으로 예리한 예술이 눕는 관에 박는 맨 마지막 못’과 같다며 욕먹은 바 있다; 원문:https://www.radicalphilosophy.com/news/whose-future 재인용:http://www.drailedmag.com/2017/06/28/alternating-states-at-the-57th-venice-biennale/

[5]물론 오쿠위 생각이다. 2013 베니스비엔날레 예술감독이었던 마시밀리아노 지오니는(Mssimiliano Gioni)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시의 성격이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국가관들에 의해 결정되는 비엔날레인 베니스비엔날레를 제외하면, 현 상황에서 비엔날레의 일반적인 특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전 세계 대다수 비엔날레의 유일한 공통점은 격년제로 개최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정의가 모호하고 매우 단순하게 여겨진다면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현재 비엔날레라고 지칭되는 수백 개의 전시에 적용되는 단 하나의 정의다.” 라운드 테이블 223쪽, 비엔날레를 옹호하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6]필자는 이 부분에서 좀 놀랐다.

[7]Haus der Kunst channel Youtube, March.28th 11분 50초, https://www.youtube.com/watch?v=A2pM8Ox2Cgs

[8] Viva arte viva 약식 도록 38쪽

[9]엔위저는‘filter’라 칭했다.

[10] 1~9관까지 Artists and books/Joys and Fears/The Common/The Earth/The Traditions/The Shamans/Dionysian/Colors/Time and Infinity순.

[11]위와 같은 영상 44분 43초

[12] ‘더욱 주목할만한 사실은 비엔날레라는 형식이 바로 그 시기에 대형 박람회에 대한 무역 특정적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라운드테이블 250쪽 비엔날레 문화와 경험의 미학, 캐럴라인 A 존스

[13] Facebook: @LaboratoryOfDilemmasGreekPavilion / Instagram:@laboratoryofdilemmas_gr / Vimeo: @laboratoryofdilemmas / Homepage: www.laboratoryofdilemmas.gr

[14]http://laboratoryofdilemmas.gr/texts/#txt2

[15] Homepage: http://www.theabsenceofpaths.com/ / Twiiter:@absenceofpaths / Instagram: @theabsenceofpaths / foundation: https://www.kamellazaarfoundation.org/article/absence-paths

[16] Homepage: http://nsk-state-pavilion.org/about/ / NSK Times: http://times.nskstate.com/ / Facebook & Instagram: @nskstatepavilion

[17]솔직히 눈물 난다. 58년 이후로 국가관을 가지지도 못 하다가 올해에 와서 얻어낸 자리가 키오스크…

[18]알고 보니 이 여권의 특정 페이지는 세계의 여러 정부에서 발행하는 신원서류의 65%를 차지하는 Veridos GmbH회사에서 인쇄했다.

[19] 5월 13일부터 6월 17일까지

[20] “이것은 본질적으로 초 국가적이며, 이것의 예술은 공상과 현실 사이의 단면도이고, 우주 최초의 전 세계적 국가 안에 있다.” http://nsk-state-pavilion.org/about-nsk/

[21]이중 마리아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ć),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한스 울리히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도 NSK State in Time 시민이었다…그리고 NSK 여권은 튀니지에서 발급해주는 프리자보다 훨씬 정교하다.

[22]난민 문제에만 한정되기 보다는, 자유로운 세계 시민 공동체를 꿈꾸며 시작된 작업이었다.

[23]지아르디니의 센트럴 파빌리온 건물안으로 들어서면 ‘The Artists and Books’섹션에있다.

[24]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7/may/16/venice-biennale-refugee-crisis-nsk-tuni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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