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안광휘 개인전 ‘The Pathetic Rhymes’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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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thetic Rhymes》 전시광경

홍태림(미술비평, 크리틱-칼 발행인)

최근 서교예술시험센터에서 열렸던 안광휘의 《컷팅매트》(2017.5.21~6.11)를 놓쳐서 아쉬웠던 중에 인스턴트 루프에서 《The Pathetic Rhymes》(2017.08.01~08.12)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전시장을 방문하기 전에 웹상에서 전시 홍보물을 살펴보니 《The Pathetic Rhymes》에는 컷팅매트 연작 몇 점과 안광휘의 랩 6곡이 출품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컷팅매트 연작이야 홍보물 속 사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안광휘의 랩은 전시를 직접 보기 전까지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한 치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컷팅매트 연작을 전시하는 안광휘도 낯선 마당에 랩을 하는 안광휘는 더욱 낯설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러한 낯섦은 내가 그동안 안광휘를 작가가 아니라 ‘크리틱-칼’의 필자 혹은 《비평실천》(산수문화, 2017.2.1~2.7)을 기획했던 ‘MMM’1)의 멤버로 만나왔던 탓이리라.

인스턴트 루프에 도착하니 넓지 않은 공간에 소박하게 배치된 안광휘의 작업들과 만날 수 있었다. 전시장 각 벽면에는 컷팅매트 연작이 몇 점 걸려있었다. 그리고 전시장 안쪽에 펼쳐진 접이식 침대 위에는 안광휘의 랩이 담긴 패드와 헤드폰이 널브러져 있었다. 컷팅매트 연작을 먼저 살펴보다가 접이식 침대에 앉아서 패드를 들고 이번 전시제목과 똑같은 4번 트랙 <The Pathetic Rhymes>(2분 53초)을 들어보았다. <The Pathetic Rhymes>은 희망이 없는 승패, 정치인의 기만, 은행 대출, 생존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내가 고자라니’2)나 게임 ‘원더보이2’ 에 나올법한 하트모양 생명력 아이콘 등을 아스키 아트(ascii art)3)로 변환한 것과 맞물린 뮤직비디오였다. 대략 3분간 <The Pathetic Rhymes>을 즐겁게 감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마음에는 안광휘에 대한 낯섦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어서 6번 트랙 <break>(3분 33초)를 듣다가 “이건 너도 몰랐을 걸, 이런 노래들을 줄은~”이라는 가사를 듣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The Pathetic Rhymes》 안에서 편하게 뒹굴뒹굴할 수 있었다. 인맥 카르텔, 주량, 학벌, 열정, 돈, 열정페이 전시에 대한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break>에는 주로 미술계에 대한 안광휘의 애증이 담겨있다. <break>와 마찬가지로 <Lying>(2분 24초)에도 미술에 관련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Lying>의 내용은 정치적 비판성이라는 코스플레이(cosplay)4)로 돈과 권력에 아부하는 어느 꼰대 민중미술가에 대한 분노의 비수가 서려있다. 예를 들어 “이런 소리 했다고 나를 겁박하고 싶겠지만, 할 테면 해봐. 다 캡쳐하고 녹취할 거야,”라는 가사가 분노의 비수라 할 수 있겠다. 사실 <Lying>의 가사 속에서 꼰대짓 하는 민중미술가가 누구인지는 미술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안광휘가 <Lying>에 나오는 내용은 픽션이라고 못을 박았으니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기엔 일단 무리가 있다.

연애와 결혼 생활을 하며 느꼈던 우울을 다룬 5번 트랙 <blues>(2분 35초), 일상 속에서 삭여왔던 스트레스를 랩으로 꺼내봤으나 그것조차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음을 다룬 3번 트랙 <Respiration>(2분 42초), ‘허슬hustle’하고 ‘힙hip’한 삶을 동경했지만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패배자임을 읊조리는 <88>(3분 21초)은 <break>, <Lying>과 살짝 다르게 미술과 일상의 경계, 삶과 생존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씁쓸함을 담담한 음색 위에 띄웠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break>과 <Lying>도 이러한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다만 앞선 두 곡은 미술과 일상의 경계보다는 미술에 초점을 확실히 맞추고 있다는 점이 다른 곡과 다를 뿐이다. 안광휘의 랩에서 전반적으로 씁쓸하고 담담한 기운이 드러나는 이유는 우리가 마주했거나 마주할 현재가 너무나도 불투명하여 그 불투명함이 미래까지 삼켜 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6개의 트랙에 언급되는 루저, 학벌, 겁쟁이, 꼰대, 우울, 속물, 힙스터, 현실, 예술, 카르텔, 외로움, 가정, 학교, 돈, 맹세, 실망, 빚 같은 키워드는 너무도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의 부분집합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기 위해서 이제 안광휘의 랩과 연동되는 아스키 아트를 살펴보자. 지금도 종종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재미로 사용되는 아스키 아트는 1990년대 PC통신 시절에 기술적 한계 때문에 이미지를 텍스트와 특수문자로 변환해 게시판에 업로드하던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안광휘의 뮤직비디오에는 이 아스키 아트를 거친 심영5), 싱하형6), 고승덕7) 같은 인터넷 밈(internet meme), 2D 게임 혹은 3D 엔진을 기반으로 구동되는 게임영상 등이 사용되었다. 안광휘가 선별한 아스키 아트 소스는 대부분 심각하지 않고 대중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것들인데, 이 소스들을 아스키 아트로 변환하면 삭막하면서도 명랑한 흑백영상이 탄생한다. 안광휘가 삭막하면서도 명랑한 영상을 자신의 랩과 동기화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1990년대의 PC통신을 단서 삼아 아스키 아트가 실질적으로 사용된 시대와 안광휘의 아스키 아트를 관련지어보자. 아스키 아트는 87년 체제를 거쳐서 출범한 ‘준’문민정부(文民政府)와 사회문화적 자유, 세계화, 거품경제, 대중문화의 급성장으로 요약되는 1990년대 한국의 호시절에 탄생했다. 아스키 아트를 IMF 체제 이전의 1990년대의 호시절과 연결해서 살펴본다면 안광휘의 아스키 아트는 그의 랩에서 드러나는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를 비교적 선명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포장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안광휘가 다룬 아스키 아트 영상은 그의 랩에서 드러나는 불투명한 현재, 미래와 살짝 나사가 풀린 맛으로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광휘의 아스키 아트를 1990년대 호시절과 연결한다면 뉴 잭 스윙(New Jack Swing)8) 장르를 다루는 가수이자 미술가인 기린(1985~)이 떠오르기도 한다. 기린 역시 패션, 춤, 영상을 통해서 1990년대 호시절의 감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안광휘나 기린에게서 검출되는 복고적인 감성은 단지 자신이 어릴 적에 좋아했던 것을 지금도 즐긴다는 것을 넘어서 그 복고적인 감성이 실제로 한창이던 사회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물론, 기린은 1990년대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단지 아스키 아트를 뮤직비디오에 건조하게 끌어올 뿐인 안광휘와 상이한 점이 있다. 그러나 강도는 다를지언정 1990년대에 대한 향수는 안광휘와 기린의 공통된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실 1990년대에 대한 향수가 어디 안광휘와 기린에 국한된 것이겠는가. 근래에 우리는 <응답하라 1994>,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같은 대중문화를 세대 간의 격차조차 초월하며 소비해왔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 끝없이 스쳐 지나가는 현재가 한없이 불투명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시선을 둘 수 있는 곳은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과거의 호시절일 수밖에 없나 싶기도 하다.

 2017. 혼합매체, 45 x 62 cm
안광휘, <컷팅매트-1702>, 2017, 혼합매체, 45 x 62 cm
 2017. 혼합매체, 45 x 62 cm
안광휘, <컷팅매트-1701>, 2017, 혼합매체, 45 x 62 cm

안광휘의 랩과 영상이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를 그저 선명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덧씌울 뿐이라면 이와 한 공간에서 어우러진 컷팅매트 연작은 어떻게 읽어볼 수 있을까? 사실 《The Pathetic Rhymes》을 보고 나서 왜 컷팅매트를 작업에 사용했는지 안광휘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왠지 안광휘가 컷팅매트를 사용한 이유를 상상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컷팅매트 연작은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은근히 자극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이 연작을 살펴보면 컷팅매트 아래에는 주로 태양계나 설산, 강가, 저녁노을 같은 장엄한 자연이 깔려있다. 그리고 이 장엄한 자연은 컷팅매트가 날카롭게 도려내 지거나 그을려진 부분에 한에서만 드러난다. 얇고 차가운 은색 액자에 들어간 컷팅매트 작업은 왠지 프라모델(Pla-Model)를 조립하는 모델러의 책상보다는 지겨운 반복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작업대를 떠올리게 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노동을 통해서 삶의 충만함을 느끼는 노동자의 작업대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작업대가 떠오르는 것이다. 또한, 각 컷팅매트 작업의 제목에 제작연도와 달을 표기한듯한 건조한 넘버링도 이러한 상상을 뒷받침해준다. 컷팅매트는 주로 자신을 희생해서 작업대에 칼자국이 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컷팅매트와 작업대는 같은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위계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가 을(乙)이고 작업대가 병(丙), 컷팅매트는 정(丁)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컷팅매트 연작을 통해서 갑(甲)과 을(乙)은 암시만 되는 상황에서 병(丙)과 정(丁)이 장엄한 자연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구도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은색 액자와 컷팅매트 사이에 낀 장엄한 자연은 을(乙)과 병(丙)이 공유하는 이상향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이러한 구도를 <blues>에서 “나는 내 삶의 주인이라고, 그렇게 살기 위해 예술 한다 떠들고, 허상과 그것의 특권을 만들고..”같은 가사와 관련짓는다면 앞서 언급한 이상향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발버둥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결국 은색 액자-장엄한 자연-도려지고 그을려진 컷팅매트는 생존경쟁 속에서 삶을 잃어가는 수많은 병(丙)과 정(丁)의 처절함이라 읽을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컷팅매트 연작에 대해서는 안광휘의 랩보다 더 작위적인 읽기를 시도한 것 같다. 어쨌든 나의 멋대로 읽기에 따르면 컷팅매트 연작도 결국 안광휘의 랩과 마찬가지로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에 링크될 수밖에 없다. 물론, 도려내고 그을려진 컷팅매트 사이로 장엄한 자연이 보이는 것은 안광휘의 랩보다는 희망차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컷팅매트 사이로 드러난 자연이 우리 발아래 놓인 생존과 삶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에는 다소 과장된 광경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희망보다는 체념에 무게가 실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치 아직은 가사로만 울려 퍼지는 <Lying> 속 “다 캡쳐 하고 녹취할 거야”처럼 말이다. 안광휘는 아직 다작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 와중에 좁은 인스턴트 루프에 출품된 작업도 매우 적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The Pathetic Rhymes》 읽기는 아무리 전시에 대한 감상자의 해석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꽤 억지스러운 끼워 맞추기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안광휘에 대한 퍼즐 조각이 아직 많이 풀리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억지스러움은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안광휘가 여력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작업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작가 활동을 후원할 것도 아니면서 작업을 이어나가라는 말이 굉장히 무책임한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염치없게 말을 뱉어 보고 싶은 것이다. “안광휘 작가님, 작업을 더 해주세요.”

P.S 전시장에 히든트랙 2개가 포함된 CD를 파는 것을 몰라서 히든트랙을 듣지 못했다, 누구 히든트랙 들었으면 후기 좀 남겨 주시길.


1) MMM은 포스트시네마 연구집단으로 동시대 이미지-생태계 창출에 관심을 둔다. 영상작업을 수집하고 지속적인 이벤트를 통해 무빙 이미지를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순환하게 한다.

2)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공산당 간부이자 배우였던 심영이 상하이 조에게 성기를 저격당해 고자가 된 사건을 다룬 장면과 관련 있다. 심영이 병상에 누워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후 디시인스이드에서 합성필수 요소로 널리 사용되었다.

3) 텍스트와 특수문자 혹은 C언어를 조합하여 사진과 그림을 본뜨는 것.

4) costume과 play의 합성어로 연예인나 만화, 게임 속 인물과 최대한 비슷하게 복장을 따라하는 놀이다.  일본어로 코스프레라고 하며 영어로는 코스플레이라고 한다.

5) 각주 2번 참고.

6) 싱하는 디시인사이드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에서 악플을 남기던 유저의 아이디다. 싱하형이라고도 불린 이 유저는 이소룡의 사진을 사용하며 악플을 남기고 다녔다. 그래서 이소룡의 사진은 싱하형과 동의어가 되기도 했다. 안광휘가 아스키 아트로 변환한 이소룡 얼굴은 이 싱하형을 상징한다.

7) 2014년에 고승덕은 서울시 교육감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미국에 거주하는 딸 고캔디가 ‘아버지는 교육감의 자격이 없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지지율이 하락했다. 그래서 고승덕은 강남에서 열린 거리 유세에서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절규했다. 고승덕의 이 절규는 이후 인터넷에서 여러 맥락으로 패러디되었다.

8) R&B와 힙합을 적절히 섞은 미국의 하이브리드 음악으로 1980,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바비 브라운과 테디 라일리가 이 장르의 대표주자다. 안광휘이 <break>도 뉴잭스윙 비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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