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균_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와 하루키의 소신(所信)

하루키의 신작기사단장 죽이기와 하루키의 소신(所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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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이번 신작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하루키의 소설에서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사람조차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 정도라고 하는데.

알려진 대로 이 소설에는 ‘난징대학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소설 제목인 『기사단장 죽이기』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기사단장’이라는 존재 또한 어쩌면 일본의 비도덕적이고 극악한 광기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지, 추측하게 된다. (아직 소설을 읽지 않았기에 제목이 왜 『기사단장 죽이기』인지, 기사단장이란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쓸 수는 없다. 다만 추측하는 정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대대적인 전범 재판과 처벌이 이뤄졌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독일에는 여전히 네오나치와 스킨헤드들이 인종차별적인 폭력행위를 저지르곤 하지만, 사회의 시스템을 관장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한 제도와 환경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태도에는 늘 반성과 참회가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는 것 아니냐, 라는 우려의 소리가 나올 정도로 독일은 과거 2차 세계대전 때 당국이 벌였던 전쟁행위의 일체를 ‘만행’, ‘범죄’로 규정짓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와 전범자들에 대한 문책을 관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어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2번의 원폭에 의한 항복 이후, 미군이 일본에 상륙한 이후, 일본의 만행과 전범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을 확실히 하기 어렵다. 일본도 사실상 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전쟁책임자와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문책과 심판을 진행해야 했지만 과연 그것이 독일의 그것에 준하는 수준으로 진행되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을 현재의 일본을 통해 대신할 수 있다. 지금의 일본을 보면, 아시아국가를 전쟁의 악몽에 몰아넣었던 군부의 실권자들이 제대로 된 책임이나 심판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한국에서 친일활동을 벌였던 이들에 대한 청산이 해방 이후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본 또한 그토록 극악무도한, 지옥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과 살상을 현실 속에 재현하는 것을 승인하고 주도한 이들에 대한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지금 일본의 모습에서 감지할 수 있다.

일본은 헌법을 바꿔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가 되려 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했던 전쟁범죄들, 아시아권 국가의 시민들과 전쟁포로들에 대한 강제노역징용과 생체실험, 위안부 강제동원, 전쟁 도중이라 하여도 최소한 지켜야할 선마저 어긴 광기에 찌든 대학살과 인권유린까지, 수많은 증언과 기록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들을 전부 없었던 일이라며 부정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왕정국가가 연상될 정도로 (대한민국도 불과 2016년까지는 왕정국가였지만) 권력 독식이 심화되어 있으며 권력 상층부의 비리 또한 횡행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까지 사회 전반에서 신드롬으로 다뤄질 정도였던 ‘혐한운동’까지, 일본 사회는 과거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있으며 세계공동체 안에서의 화합을 도모하기보단 폭력과 강압을 내세우려는 경향이 강하다.

바로 이런 부분들에서 과거 독일, 이탈리아와 손잡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도덕성을 상실한 비인간적 군대를 양성하고 통솔했던 군국주의자들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이들의 특징은 압도적인 힘에 대한 숭배, 약한 이들에 대한 경멸과 학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권력과 욕구에 대한 천착, 침략과 정복에 의한 지배구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응집하여 네 글자로 나타내면 바로 ‘제국주의’가 된다. 혹은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과 제노사이드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 즉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러한 군국주의자들의 냄새가 가장 강하게 풍기는 매체 중의 하나가 포르노이다. 일본 내 산업규모 2위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즈니스인 av(adult video)사업. 이 사업을 이루고 있는 av레이블, 혹은 av엔터테인먼트들이 만드는 av 영상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혹은 모두 착취당하고 유린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av영상을 촬영했던 배우들의 폭로나 증언에 의해서, av사업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이나 성폭력을 야기하는 사기범죄의 실체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av배우를 전문적인 직업으로 삼아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여성들이 세뇌에 가까운 강요나 설득, 강압적인 분위기에 의한 강제, 혹은 연예인이 되게 해주겠다거나 단순화보촬영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타의적으로 av를 촬영한다. 심지어 얼굴이나 몸에 좌상을 입히면서까지 이루어지는 협박에 못이겨 av를 촬영하기도 하는데, 이런 범죄행위가 만연한 av산업계의 뒤에 이들과 유착한 정치인들이 있다.

여성을 극단적으로 대상화시켜 윤락과 쾌락의 도구로 유린하고 전락시키는 일에,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도 부족할 정치인들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선 당연히 범죄행위를 저지른 av사업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도, av사업의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보호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 처우를 개선시키고 이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공동선과 규준을 제시하고 배포해야 할 이들이 여성에 대한 박해를 방조하거나 동업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 과연 이들이 사회를 위해 제대로 된 헌법이나 제도를 만들 수 있을까?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아니, 되려, 이와 같은 사안에 작은 관심이라도 있을까? 되려 이들을 도구화, 대상화시켜 착취해 어떤 식으로든 자본과 욕구를 취하는데 골몰해있지 않을까?

그래서 UN에선 일본 여성들의 인권수준을 매우 낮고 위험한 상태로 평가하고 있으며, 여성의 인권수준이 일본보다 높은 서구 사회에서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러한 면면들을 보고 있자면, 이로 인해 앞으로 발발하게 될 미래의 문제들이,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들이, 마치 만화경으로 지옥을 보듯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군국주의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렇듯 일본은 여전히 스스로 청산하지 못한 ‘군국주의’에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소중한 구성원들을 저당잡힌채 끌려다니고 있다.

만행에 대한 부정, 역사에 대한 왜곡, 좌절된 제국주의 아래 궁여지책으로 수반되고 있는 자국민에 대한 성(性)대상화…이것이 오늘날 일본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이며, 그 중심에 ‘군국주의자’들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나 정치인들, 혹은 시민들이 그간 일본사회의 문제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왔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상황을 tv뉴스나 신문을 통해 지켜보면서, ‘일본에서는 정녕 자국의 곪아 썩어버린 악취나는 존재들에 대항하는 힘이나 목소리가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곤 했다.

이러한 의문이 수년간 지속되어 온 가운데, 마침내 일본사회 내에서 정면으로 이에 맞서는 이를 볼 수 있었다. 바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그의 싸움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리고 그가 2009년 예루살렘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했던 연설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계란이 아무리 바위에 부딪혀 깨진다 해도, 계란은 바위를 부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계란’의 편에 설 것임을 주창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온전히 실천해 보여주고 있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내용에 반발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어떻게 그런 내용을 적나라하게 서술할 수 있느냐’라는 삿대질에 그는 ‘내가 대표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나의 소신’이라고 답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대표한다. 집계에 따른 접근으로만 본다면 그는 단순히 일본인구 1억 2천만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전세계로 치면 수십억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소신’의 무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묵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소신’을 통해 소설을 쓰고, 어둠에 맞선다. 아주아주 작은, 그러나 그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등장했던, 신사(神祠)의 돌멩이처럼 아주아주 무거운 그의 ‘소신’과, 수십 년간 사회를 좀먹어온 끔찍하리만치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어둠’이 대치한다.

그 어둠은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시무시하게 거대하고, 강하다.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그 수면 아래에 있는 것이 무엇이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루키의 ‘소신’ 또한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돌멩이처럼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어둠의 물살에 뒤덮여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의 ‘발현’과 ‘등장’이 곧 어떤 유의미한 ‘변화’의 ‘태동’이자 ‘기점’이 될 때가 있다. 하루키의 ‘소신’이 그런 ‘움직임’의 ‘전조’가 되리라고 본다면 지나친 낙관일까? 아니다, 낙관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이다. 그의 소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처럼, 세상의 끝에서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건, ‘누군가의 의지에 따른 시도와 행동’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世界)’라는 곳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루키는 싸우고 있고, 자신의 ‘소신’을 따르고 있다. 껍데기가 되려하고, 권력의 부속이 되려 하고, 욕망이 되려 하고, 폭력이 되려 하는, 즉 ‘자아’의 전체가 아닌 일부, 포괄이 아닌 편향으로서의 현상적 국소요인들에 자신을 매어두고 침잠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 그것에 빌어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 하는 이는, 그저 ‘아주아주 작은 자기 자신이 되려는 자’를 결코 꺾을 수 없을 것이다.

 

murakami haruki in sweater

 


**이 글은 다음 링크를 통해 들어가면 볼 수 있는 포스트를 보고 난뒤, 이를 동기삼아 작성한 것이다.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eposting.co.kr/bbs/board.php?bo_table=blog_blog&wr_id=4458#fb%23fb%23fb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천재 작가’가 하루아침에 ‘저질 매국노’가 된 이유, 작성자 함부로, 웹사이트 이포스팅, www.epost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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