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_당신은 청년입니까 -청년 예술가 담론에 대한 소고-

청년에게.

설익은 생각입니다.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한, 그래서 확신에 미치지 못한 사념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쓰기로 결심한 데에는 주체가 침묵하는 사이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해석의 오판과 남용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체의 이름을 ‘청년’으로 하겠습니다. ‘2030세대’, ‘8090세대’, ’80년대 세대’, ‘청춘’, ‘잉여’ 등 이와 인접한 다른 단어도 있고 미술계로 말한다면 ‘신생공간 세대’라는 표현도 가능하겠지만, 넓은 장의 논의를 가져오는 데 ‘청년’만큼 유효한 단어는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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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청년입니까”

포스터에 있는 이 하나의 단문이 ‘당신은 청년이어야 해!’라고 확언한다고 본 것은 《2017 문화활동가대회》(2017.9.1.-9.2)가 열린 옛 충남도청사 곳곳에서였습니다.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징병 모집 도상을 차용한 포스터에 쓰인 글귀이니만큼 당신은 청년이 주체가 되어 문제를 환기해 야 한다는 자못 강한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주최 측이 제시한 슬로건 ‘접촉불량’은 ‘청년’과 ‘비청년’의 양극을 염두했고, ‘활동’과 ‘정책’, ‘현장’과 ‘기관’으로 치환해볼 것이기도 했습니다. 몇몇 프로그램 참관으로 그 ‘불량’의 열기를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열기가 화기로 발전해 기존의 고루한 문제 제기를 그 이상의 것으로 점화시킬 정도는 아쉽게도 아니었습니다. 혹자가 젊은 층을 가리켜 ‘청년 당사자가 발언해보기’를 권했었다 해도 말이죠.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청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논제가 단지 생물학적 연령을 준거로 한 세대문제로 소급될 불안을 느꼈습니다. ‘청년’이나 ‘신진’, ‘젊음’의 미명을 -아직은- 유효하게 쓸 수 있는 나이 당사자인 제가 ‘비청년’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계급화된 그편의 권력 때문이지 나이 듦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면 청년 대신 ‘비주류’라는 말로 주체를 명명하고,

“당신은 무명입니까”

로 포스터를 바꿔야 하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청년은 유명일 수도 있고 무명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화두가 예술계에 급속히 진전된 2015년 초, 여기서 파생된 저의 생각을 텍스트로 옮겨놓은 적이 있습니다.

(…) ‘잉여’의 사전적 정의로 돌아가 이것이 ‘쓰고 남은 나머지’를 뜻하는 것임에 냉철히 주목했을 때, 우리는 왜 ‘나머지’를 ‘유용성을 잃은 노폐물’과 등가해오며 개념의 과잉 해석을 범해왔는지 진단하게 되지 않는가? 나는 어디에서도 ‘잉여’라는 ‘비주류’가 저들의 비루한 삶을 청산하고 ‘주류’로 재탄생하기 위한 불필요한 전초라고 말한 바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문화활동가대회》에서 외견상 ‘청년’이나 ‘비청년’로 보이는 각 당사자가 발언자로 자원하거나 호명될 때마다 ‘난 20대가 아니므로 청년이 아니오’, ‘은발인 나는 비청년 세대이기는 하나 주류는 아니오’, ‘나는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88만원 세대의 청년이 아니다’ 같은 말로 자신을 응변했다는 건데요. 그분들의 이런 재치 내지 항변은 ‘청년담론’에 기생한 자본과 권력에 대한 감지와 무의식적 방어기제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청년 없는 청년담론을 지속해야 할까요. 당사자 없이 누적된 청년 이야기는 어느덧 #청년세대라는 테마만을 기득권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생각에서 《문화활동가대회》가 한 프로그램의 이름과 컨셉으로 정면화한 것이 ‘탈청년’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KakaoTalk_20170903_210444297  ⓒQrator

청년예술가에게.

저는 지금의 청년을 둘러싼 문제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세대문제로 치부되거나, 권력의 향유자가 교묘하게 청년임을 자칭하며 청년에 대한 얕은 미적의식과 지원책을 소비하는 모습을 방기하지 않기 위해 숨어있는 진짜 청년이 외부로 나와 실체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청년이 등장할 수 있는 발언대는 희소하며 강한 파급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한때 발언의 장으로서 미술계 신생공간은 자생적이었습니다. 개별적으로는 약했지만 그것이 현상이 되고 연대가 지어지면서는 힘이 생겼죠. 그러나 스스로를 공론화하고 담론화하는 데는 주체 밖 외부에게 빚을 졌거나 결정적 시기를 놓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때문에 공간 생성의 배경에 있던 소위 ‘그들만의 리그’와 바늘구멍 같기만 한 등용문, 확장된 작업형태에 비해 여전히 정형성을 고집하는 전시장과 고액 대관료, 기준 없는 아티스트 피와 계약서, 무급 예술노동, 젠트리피케이션 등 사회·문화에 동시다발적으로 관계된 문제를 숙고하기보다 신구세대 간 갈등으로 현상을 넘겨짚어 버리게 되지 않았나 하고요.
저는 일단의 정점을 찍은 신생공간 이후의 향방을 볼 수 있는 작금이 청년예술가 움직임의 진정성이 드러날 본격적인 시기라 보고 「취미가」, 「소쇼룸」, 「퍼폼」같은 포스트 신생공간의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들 활동의 태동과 휘발, 변곡의 궤적 뒤에서 직간접 영향을 미치고 관계한 예술가 지원사업이나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소급해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공간 운영의 종결과 견해의 차이로 흩어진 그룹이 모 기관의 예술가 지원사업으로 하여금 협업 팀으로 모아진 사례도 호기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관심이 가는 것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현상담론에 편입조차 되지 않고 거푸 정체성 희석을 당한, 숨은 ‘청년’의 실체와 그들이 발휘할 뒷심입니다.

요즘의 예술가 삶을 보고 ‘관노비’, ‘좀비 예술가’라 일컫는 말이 있습니다. 불편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지만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나온 표현인지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기관으로부터 받은 기금 수혜이력에 죄책감을 갖는 예술가도 있던데 스스로의 작업에 명분을 찾지 못한다면 시장을 통한 자생이라도 ‘노비’나 ‘좀비’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주체 스스로가 정의한 ‘청년’을 듣고 싶다고. 그렇지 않으면 선배 세대와 등돌리기를 고집해 스스로 뿌리없는 식물을 자처한 젊은 세대, 오직 주류가 인가한 범위 내에서의 비주류 예술, 미술 내 방언으로써만 성취를 이룬 허울의 액티비스트, 그리고 강사를 육성하거나 자본시장에 공헌할 뿐인 본말전도의 예술가 지원사업만 확장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설익은 청년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2017 문화활동가대회: 접촉불량×문화지대전》 http://culturalactivist.net
“또 다른 잉여전을 준비하며”, SPACE_0, 2015.02.25
http://blog.naver.com/aquablue_0/220283144893
“신생인의 자족, 자위, 자존의 생존투쟁에 부쳐”, SPACE_0, 2016.11.19.
http://blog.naver.com/aquablue_0/220865395544
“또 다른 잉여전을 마무리하며“, SPACE_0, 2016.12.26
http://blog.naver.com/aquablue_0/220894942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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