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헌_정오에 낯선/녹색의-기호들

에릭 로메르 <녹색광선> 1986

 

이양헌 / 미술비평

거의 완벽한 어둠, 공백에 갇힌 코기토(Cogito), 언어를 잃은 장소 그리고 미세한 빛을 발산하는 스크린들. 이곳에서 우리는 점멸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집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서로 공명하다가도 결국에 엇갈리는, 충돌하면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감각의 지평선이자 스스로 거대한 풍광을 이루는 하나의 세계다. 불안한 쇼트와 어긋난 조성으로 직조된 스크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세계를 대면하게 될 것인가. 이곳에서 이미지는 어딘가로 향하면서도 종국에 누빔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영원히 미끄러지고, 사운드는 도치와 전도를 통해 반복되지만 안착에 실패하여 공허한 기표로 수렴된다. 확증된 의미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불확정적 원리들이 지배하는 시공간. 자욱한 안개 속에서 위치를 잃고 환상방황(Ringwande rung)을 야기하는 검은 숲, 이정표가 사라진 순례자의 길 혹은 오작동하는 영사기가 끝없이 상영되는 영화관.

스크린은 일종의 열쇠 구멍으로 그 너머를 훔쳐보게 하지만, 동시에 베일이자 불투명한 장막으로서 부분을 가리거나 시선을 왜곡하고 심오한 간극을 촉발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만들어낸다. 더 이상 외부를 투과하는 창도, 내부를 반영하는 거울도 아닌 것으로 오직 그 이면을 드러내면서 또한 닿을 수 없게 획책하는 기묘한 영사막. 그러므로 베일을 걷고 비결정성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지표를 모으거나 이름을 배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모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리고 실어증을 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이의 여행(Voyages extraordinaires)’은, 그럼에도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에릭 로메르(Eric Rohmer)의 <녹색광선(The Green Ray)>(1986)에서 주인공 델핀이 조우하게 되는 녹색의 기호들은 그녀를 우연한 만남과 정서가 교차하는 여름 해변으로 이끈다. 녹색의 전단지, 초록으로 칠해진 타로카드, 채식주의와 “녹색이 올해의 색”이라는 점괘. 우연과 희망을 암시하는, 때로는 권태와 절망으로 보충되는 이 녹색의 상징들은 다층적인 의미로 산개하지만 동시에 광의의 기호들로 겹겹이 포개지면서 오래된 사어(死語)처럼 해독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모호한 표식들을 따라 도시와 바다를 오가는 그녀의 여정은 고독감 속에서 위태롭게 전개되다가 녹색광선의 시퀀스에 이르러 마침내 찬란한 일몰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둠의 전조이자 극명하게 빛나는 섬광이 투사하는 여행에 종착지. 봉합에 실패한 불순한 몽타주들이 인도하는 그곳은 정오의 그림자와 같이 비가시적이지만 언제나 잔존하는 언어의 바깥, 그 외화면을 지시하고 있다.

이제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델핀과 같이 “혼자 산에 오르는” 산양자리의 운명을 타고났으므로 이는 외로운 노정이 될 것이다. 텅 빈 기호들이 충만하게 펼쳐진 적막한 백야를 상상해보라. 누군가는 여기서 길을 잃고 또 다른 이들은 지도를 찾아 헤매겠지만 이 여행의 결말은 점성술의 은밀한 계시가 그렇듯 이미 예정되어 있다. 전체를 부르는 통일된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언어의 구조를 넘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순수한 다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풍경. 그것은 단순히 물-자체(thing-in-itself)로 환원되는 불가해한 영역을 넘어서 의미-부재가 스스로 현시하는 어슴푸레한 존재의 장소에 가깝다. 이 식별 불가능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낯선 시구를 입안에서 되새기며 길이 아닌 곳으로 지금 막 발을 내딛으려 하고 있다.

*이 글은 강민정 개인전《국지성 백야》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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