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헌_중립의 사진 : 인덱스, 디지털, 메타-미디엄

Sierra Nevada Wallpaper.GIF, 2017
윤호진, Sierra Nevada Wallpaper.GIF, 2017

 

이양헌 / 미술비평

카메라가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일종의 창이라면, 우리는 만화경과도 같은 이 투명한 유리 너머로 무엇을 보게 되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자명해서 어떤 오차도 없이 대상에 수렴하는 이미지, 미라 콤플렉스라는 오랜 강박을 넘어 존재를 결빙하고 그 영속을 보증하는 이미지, 무엇보다도 이 기계장치에 비친 잔상은 전혀 이질적인 감각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담지한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깊은 심연을 여는 하나의 이정표일 수 있고 토리노의 성의와 같이 실재에 닿으려는 열망을 증거하는 동시에 혁명의 발화점으로서 한 장의 ‘사건’으로 인화된다. 그러나 어떤 추문, 사실은 우리가 창밖으로 목도하게 되는 풍경이 유리표면의 작은 얼룩을 깨고 대면하게 되는 피안이나 이데아 혹은 실재의 사막이 아니라 여전히 불투명하게 남아있는 물자체의 표상일 뿐이라는 절망과 불신이 감돌고 있다. 카메라와 그 파생물인 사진은 더 이상 투명하지도, 어떤 가능성도 현상해내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와 기호로 점철된 불쾌한 광학 장치로서 기껏해야 담론의 구성체이자 코드에 의해 삼투된 통합체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을 분기로 한 어느 시점에서 세계를 비추던 카메라의 렌즈는 더 이상 외부를 투영할 수 없는 작은 틈으로 축소되거나 완전히 산산이 조각나버린 것처럼 보인다.

윤호진은 이 혼탁하고 균열로 가득 찬, 거의 기능을 상실한 렌즈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프레임과 유리의 굴절도, 이곳을 투과해 산란하는 형상들을 가늠하면서 카메라가 산출하거나 왜곡하는 이미지, 은폐되어 있으나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는 이면의 원리들을 관찰해 왔다. 그러나 카메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외부를 응시하는 대신 사진의 역사를 경유하면서 그것이 오랜 세월 집적해 온 이미지들을 탐색하고 있다.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와 같은 이미지 아카이브, 수천만 장으로 이루어진 코르비스 필름 저장소, 다종의 사진 컬렉션들이 이제 디지털과 네트워크에 의해 창출된 이미지-생태계 안에서 압축과 전송, 재가공, 신속한 배포를 통해 거대한 궤도를 그리는 데이터의 순환을 이루고 있다. 마치 천구의 운행을 떠올리게 하는 이 트래픽을 통해 사진은 스스로 독자적인 프로토콜을 정립하거나 그 자체로 유동하는 이미지의 흐름을 가속화하고 종국에는 물적 지지체로 안착할 수밖에 없는 폐쇄된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첩된 자장 아래서 그녀는 이러한 이미지의 근본적인 속성을 포착하는 동시에 물성을 동반한 사진의 형태로 출력해낸다.

윤호진, Re:re:re:, 2011

초기작인 <Re:re:re:>(2011)에서 윤호진은 재현수단으로서의 사진이 세계를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인식론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비슷한 채도를 가진 배경과 피사체는 카메라의 특정한 프레임 안에서 위치값을 잃고 평면적 이미지로 수렴하는데 여기서 마스킹테이프에 의해 다시금 심도를 얻게 되면서 사진은 이전과는 다른 기이한 시각장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Perspective Study>(2012)에서 보다 구체화되는 것으로, 여기서 3차원의 실재는 사진기로 매개됨으로써 단순히 2차원으로 환원되는 물리적인 납작함을 넘어 선형 원근법이 지탱하는 가상의 공간감마저 무너뜨린다. 깊이와 거리, 음영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표면만이 남은 것인데, 이로써 르네상스 이후 발명된 인위적인 광학이론은 의문에 붙여지고 미세한 투사기하학이 강조되면서 오랫동안 관습화된 이미지-읽기는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는 실재를 바라보는 눈과 광학적 렌즈 사이의 어떤 시각적 균열을 전면화하면서 사진기에 내재된 재현-인터페이스를 드러내는 ‘기술 이미지(Technical Images)’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윤호진, Upside Down, 2015

사진이 실재와 맺는 간섭과 반복, 상호참조 대한 고찰은 이후 작품에서도 지속되는데 특히 <Upside Down>(2015) 경우,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라는 기원적인 사진술의 원리를 통해 사진적 재현과 그 원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병치된 두 개의 맥주병은 상하로 반전되어 중력에 역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안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렌즈로 들어 온 상(像)이 반사경과 프리즘을 거치면서 상하좌우가 전도되는 사진기의 프로토콜을 시각화한 것이다. 미디어 이론이 축적한 방대한 성찰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여전히 ‘보는 자’의 시점에 집중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역전된 형상은 카메라를 든 주체가 모종의 개입을 통해 사진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해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우리가 사진을, 나아가 세계를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서 어떻게 지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현상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닥에 설치된 거울과 그 위에 실제 맥주병은 특정한 각도에서 배후에 맥주병-사진과 동일하게 포개지는데, 이는 오브제를 재현하는 이미지와 실제 오브제가 모호하게 뒤섞인 채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되는 <Photo Object>(2011)와 공명하면서 이미지와 오브제 양자 간에 끊임없이 진동하는 사진의 위상을 재고하게 한다.

사진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은 빌름 플루서(Vilem Flusser)가 제시한 생산장치와 내재적 프로그램에 대한 연동구조론, 즉 사진이 테크놀로지적 관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떠올리게 하지만, 더욱 핵심적인 분석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선형적 계보학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항적 역사를 발굴하려는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aeology)에서 과거의 미디어 형성체들은 기술이 발전함 따라 우등한 매체로 대체되는 목적론적 내러티브에 종속되지 않는다. 대신 그 속성과 모티프들이 여전히 ‘기입’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되는데, 이러한 관점은 디지털 혁명을 필연적인 승리이자 최상위 심급으로 상정하는 단선적인 사진 담론과 길항관계에 놓인 것이다.

윤호진, 2m7s, 2015

여기서 윤호진은 어떤 방식의 미디어 계보학을 기술하고 있는가? <2m7s>(2015)에서 스캐너와 같은 장치를 거쳐 디지털로 변환된 사진은 스스로 거주하던 물리적 운반체에서 탈주해 사이버 공간으로 이행하는 일련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벡터와 래스터로 갱신된 이미지는 <The Bather>(2015)가 예증하듯이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합성 및 보정, 변형이 가능한 가변성을 토대로 삼고 있음에도 실재 사진이고자 하는 강박에 의해 그 속성은 물론, 투여된 노동까지 은폐되는 모순된 지점에 놓여있다. 동시에 그것은 온라인이라는 가상공간을 끝없이 유영하면서 <Beauty Stock>(2011)처럼 전형성을 매개하는 ‘사진적인 사진’ 혹은 코드가 지워진 이미지의 영도가 되거나 <Depth of Field>(2015)가 증언하는 것처럼 다층적 레이어를 드러내며 스스로 회화적일 수 있음을 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 전체가 사진으로 다시 출력된다는 사실은 선형적 기술사에 어떤 파열을 암시한다. 디지털 이미지가 실재와 지표적인 연결을 끊어내고 유목주의로 전환되리라는 환원론적 패러다임에 어긋나고 있는 것인데, 특히 <Commercial Size ISO A0~A4′(2017)나 ‘T.T.O. and R. (#Transparent, #Translucent, #Opaque and #Reflective)>(2017)에서 사진은 물질적 지지체로 재-안착하면서 자본의 교환가치나 산업적 재료, 사진의 주변적 장치 등과 긴밀하게 ‘재매개(remediation)’되는 교차적 관계망을 이루고 있다. 이제 디지털 이미지는 그 자체로 개념적 차원으로 보존되는 순수한 지시체가 아니라 현실의 특정한 조건과 변수에 의해 작동하는 역학의 장(Force Field)이자 개방된 플랫폼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들은 담론의 선차성과 선별적 기원으로부터 특정한 미디어의 역사를 산출하려는 정전화 된 계보학과 거리를 둔다. 대신 공백과 망각 사이에서 침전된 미디어 사물(media artefact)들을 인양하고 각자에게 동등한 위상을 부여하는, 그럼으로써 다중적이고 분산된 미디어 역사를 재배열하는 편재성 없는 이미지로 남게 된다.

다시 카메라 내부에서 세계를 어림하는 작가의 시선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산타모니카에서 겪은  한 가지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된 서부 해안에서 일몰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들 사이로 누군가 “사진같다”고 말하는 그 순간을. 어쩌면 우리는 대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너무 오랫동안 사진을 경유해 왔으며 무한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광학적 매개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최근작인 <Sierra Nevada Wallpaper.GIF>(2017)에서 그녀는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자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고 있다. 실제 풍광과 디지털 픽셀이 겹쳐진 이미지 앞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지난 날 캘리포니아로 떠난 여행에서 마주했던 절경을, 아니면 모니터의 배경화면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아니면 스마트폰에 남아있는 한 장의 사진을, 아니면 실제 산맥과 구글 이미지가 겹쳐지는 자신을, 아니면… 아니면…  윤호진의 사진은 아우라와 인덱스 사이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무엇보다 이미지와 실재 사이에서 판단과 위계가 사라진 무구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카메라의 검은 방과 같은 이 순수한 색채 위에서 사진은 이분화 된 대극을 조율하고 때로는 분산시키면서 스스로의 존재론을 기억하려 하고 있다.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간직한 중립의 사진처럼.

*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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