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주_[대림동의 아프리카]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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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주(모든이의민주주의연구소 연구활동가 / ptothek@hanmail.net)

답변의 경위

이형민, 김지애, 조민아기자님 그리고 국민일보 ‘데스크’님께

기사 잘 읽었습니다. 난민이라는 ‘상태state’에 놓인 이들이 난민신청을 ‘좋은 일자리 티켓’으로 여기는 탓에 ‘남용적 난민신청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현재 한국사회에는 난민신청자들의 ‘불법/미등록취업’이 횡행하고 있다는 식의 기사를 쓰셨길래, 저 역시 기자님들께 전해드리고 싶은 몇 마디의 말들이 있어 이렇게 답변을 적게 되었습니다. 다만 막 진지하게 잘 알고 쓴 것은 아니니 양해를 부탁드리며 그저 ‘독자편지’ 정도로 이해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사의 링크:

  1. http://v.media.daum.net/v/20180426050135247
  2. http://v.media.daum.net/v/20180427050626386
  3. http://v.media.daum.net/v/20180425050116007

기사의 주된 논의 흐름

작성하신 기사는 -조금 거칠게 요약하였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논의의 흐름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1. 한국이 ‘난민협약국’인 것을 이용하여 난민신청을 통해 ‘불법노동’을 하려는 ‘허위난민’들이 있다.
  2. 심지어 취재 시 만난 이들의 대부분은 허위난민들이었으며 이들은 향후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3. 난민신청자들 역시 신청 후 6개월 이내에 혹은 그 이후에도 ‘불법노동’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4. 신청자들은 작업장에서 폭력과 임금체불 등의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고 있다.
  5. 허위난민신청자들과 난민신청자들의 불법노동은 진짜 난민들과 국민들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
  6. 따라서 법을 확대하고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아래의 글에서는 이러한 기사의 내용과 논의 흐름을 짚으며 제 나름의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제 답변은 -제가 아는 것에 한하여 제시된 -매우 한정적 것임을 밝힙니다. 제 글이 다루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께서 또 다른 ‘답변’들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난민신청자의 ‘허위난민화’

먼저, 여러분은 ‘허위난민’과 ‘난민신청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종국에는 난민신청자를 허위난민으로 ‘환원-환유’함을 통해 난민신청자의 ‘허위난민화’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이를 정식화해보면 “허위난민은 난민신청자의 ‘대체-보충’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 대체-보충이란 A개념과 B개념이 있다는 가정 하에 -A개념이 B개념의 대체보충일 때- A개념이 B개념의 공백을 보충하면서 B개념의 A개념화를 이뤄내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B개념은 자신의 속성을 ‘잃기’보다 A개념으로의 ‘대체적 경향’을 갖게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속성을 보충 및 강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난민신청자’ 역시 ‘불법노동’이란 스펙타클한 계기를 통과하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난민신청을 ‘악용’한 이, 즉 ‘허위난민’으로 ‘둔갑遁甲’되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개념의 이해가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애초에 ‘허위난민’을 상정한 채 ‘난민신청자’를 바라보는 여러분들의 기본적인 관점의 발현 때문은 아닐까요? 대체-보충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기보다 ‘사회적인 힘-의지의 작용’입니다. 즉 표면적으로 취재의 시작부터 계획을 했든, 무의식적인 의지가 작동했든 이유는 같습니다. 여러분과 -현재로서는- 여러분들 그 자체로서의 기사가 허위난민과 난민신청자를 등치시키는 ‘경향’은 (필시必是) 여러분들의 관점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또 다른 설명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허위난민신청과 이들의 불법취업이 증가하고 있는 긴급한 현실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저라면 “난민신청자는 왜 불법/미등록 취업을 하게 되는가?”와 같은 ‘취재질문’을 설정하고 취재에 임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불법노동’ 자체를 탓하기보다 이들을 불법/미등록 노동시장으로 몰고 가는 현실에 대해서 추적했을 겁니다. 이는 제가 여러분보다 착하거나 정의롭거나 혹은 ‘공감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 여러분과 난민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허위난민’인가?

저는 ‘허위난민’ 더 정확히는 경제적인 이유, 즉 일자리 구하기’만’을 위해서 난민신청을 하는 사람은 없다”라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처럼 난민지위신청을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주와 난민신청의 동기-어려움은 결코 경제적인 것’만’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주는 (노동자를 포함한)’경제인’이 국경을 넘어오는 사건이 아닌 ‘삶인人’이 -여러 삶들과의 연결된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 국경을 넘어 당도하는 사건이며 (어찌되었든) ‘삶의 문제’는 ‘경제문제’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Frigga haug, 2008, “For a life more just, the four-in-one perspective” in English. This is a short version of my essay on politics by women for a new left; 장훈교, 2015, 삶을 위한 노동, 울산저널) 이런 설명에 불충분함을 느끼실 것으로 압니다.

그럼 이번엔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1) 도대체 누가 ‘허위난민’일까요? 예를 들어 난민지위인정을 받기 위해 긴 시간을 노력했지만 결국 불인정을 받은 ‘신청자A씨’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A씨는 아마도 오랜 심사기간을 견디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며 다니셨을 겁니다. 어쩌면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여러분들이 밝혀 놓으신 것처럼 ‘불법취업’을 한적도 있을 거고요. 자! 그렇다면 ‘난민지위불인정’ 판결을 받은 A씨는 ‘허위난민’이 되는 겁니까? (2) 여러분들의 문법에 따르면 허위난민이라는 말은 ‘진짜난민’의 개념을 전제로 하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난민은 누구인가요? 허위난민을 가려내기 위해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더더욱 그래야만 하고요. (3) 하나 더!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통해 ‘진짜난민’을 알 수 있는 걸까요? 현재로서는 난민심사가 충분히 ‘공정’하다는 전제 하에 ‘난민심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안보엘리트의 상징권력/폭력(피에르 부르디외/김현경 역, 2014, 언어와 상징권력, 나남)에 의해 이 영역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철저히 통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법무부의 ‘난민과’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난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국가가 ‘난민문제’를 안보문제로 치부한다면, 제가 삶을 살아가는 이 공간의 안보문제에 대하여 십분 양보를 하더라도 이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과 이것을 결정하는 이들의 정보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하튼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4) 따라서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떤 ‘근거’로 허위난민을 분별하셨는지요? (3)에서 이야기 한대로 신청자들 중에서 ‘허위난민’의 식별은 결국 ‘심사결과’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여러분들은 어떤 권한으로 ‘난민심사’를 자체적으로 진행하신 겁니까? 혹시 국민일보가 법무부입니까? 아니면 법무부가 “엄중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할 ‘난민지위인정심사’를 약식으로 진행하여 당신들에게만 그 결과를 알려준 겁니까? 기자로서 여러분들은 이에 답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문장을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대림동의 아프리카인들을 취재하면서 고국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서 이곳까지 온 난민이 아니라 취업을 위해 한국을 찾아온 구직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에 가서 난민신청만 하면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며 편법을 부추기는 내용이 떠돌고 있다고 한다(2번 기사 하단).

허위난민의 효과

다음으로, 여러분들은 “허위난민이 진짜난민들과 국민들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라는 매우 “정의로워” 보이는 논조를 전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하신 듯 보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잠시 언급해보자면 여러분들의 생각은 절반만 맞습니다. 왜냐면 실제로 ‘허위난민’의 존재가 난민신청자의 인권 및 복지처우나 ‘난민불인정 판결’에 “실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경제적 동기’만’을 위해 난민신청을 한 ‘허위난민’이 “상상된”, 즉 ‘허구적 존재’라는 것이며 이들의 존재는 한국정부가 ‘난민지위불인정’ 혹은 ‘공정한 심사’, 즉 난민들의 진술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기초한 심사를 하지 않을 근거로 사용될 여지를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쓰신 것처럼 ‘허위난민’들은 난민들에게 매우 해롭습니다. 그런데 그 해로운 ‘허위난민’을 여러분들이 또 한 번 빚어서 만들어내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들의 정의로움에 가득한 여러분의 기사가 난민의 상태에 놓인 이들에게 매우 해로운 ‘유해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허위난민’이란 없습니다. 대신에 다양한 처지에서 ‘보호주체국’에 보호에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할 수 있는 ‘신청자들’과 이들 중의 대다수를 ‘허위난민’으로 만들고자 하는 여러분과 같은 기자들과 ‘국가기구’들이 있을뿐입니다.

이와 함께 난민신청자에게 주어지는 생계비 역시 마치 대부분의 신청자가 이를 지원받는 것인 양 적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모든 신청자가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기사의 뉘앙스를 정정하거나 실질적으로 생계비를 지원받는 난민들의 통계를 기사에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쓰여지지 않은)국가의 역할

이와 관련하여 난민신청자는 국민국가에 의해 난민지위를 인정받든 못 받든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되며 이에 기초한 권리체계에 따른 ‘복지’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공부를 더 해야 하겠지만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면 국내에 있는 난민인권의 옹호를 위해 활동하시는 단체들에 문의해보세요. 주요국들의 난민정책 보고서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첫 기사에서부터 난민신청자들의 ‘남용적 신청’과 제도의 ‘악용’만을 비난하며 이에 대한 ‘문제’와 ‘대안’ 모두를 난민들에게서’만’ 찾으려 하신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기사에는 ‘난민심사제도’의 확충과 국제법에 준하는 인권보장 및 ‘복지의 시행’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역할에 대한 비판은 쏙 빠져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심사제도를 유일하게 언급하시는 부분에서도 오히려 ‘허위난민’의 증가가 심사제도를 방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을 돌려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편법 취업에 나서는 난민신청자가 늘수록 심사 적체도 심해진다(2번 기사 중단).”

저는 인정할 수 없지만 여러분의 말대로 진정 ‘허위난민’과 ‘남용적 신청자’가 있고 그들의 ‘장기거주’와 ‘불법취업’이 문제라면 국가의 ‘난민심사제도’를 포함한 난민인권정책을 확충-보완하면 될 일입니다.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모두를 위해 이게 더 낫습니다! “불법이라 낙인찍고” “때려잡고” “가두고” “강제로 내보내고” “크랙다운”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근 30여년 간 이주민분들의 투쟁을 통해 이를 배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보호주체인 국가는 그저 그들이 머무는 동안에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하면 됩니다. 이것이 국제사회 내 ‘주권국가’ 더 나아가 ‘협약국’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문제의식은 오히려 우리의 난민인정심사제도는 “충분히” 공정한지, 국제법에 준하는 권리체계와 복지를 시행하고 있는지, 이를 포괄하는 ‘국경 사이의 민주주의’ -혹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난민을 포함한 이주민들의 권리들을 보장해내고 있는지- 에 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와 함께 현재의 국면에서 국가가 구금-봉쇄와 방치-‘내버려 두기’ 등의 전략과 이것들의 ‘변형태’로서의 새로운 통치양식을 통해 난민의 ‘비참-비체abject화’를 가속-전면화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도 되물어 볼 일 아닐까요?(스피박, 버틀러, 주혜연 역, 2008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14-15, 산책자).

나가며

끝으로 여러분의 기사는 여러모로 ‘비열’ 혹은 ‘비겁’했습니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따른 시민들의 ‘불안’, ‘유동하는 공포’, ‘억울함’ 그리고 극도의 ‘평등주의’를 자극하며 이에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핫한 단어는 다 적어놨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족’, ‘중국인’, ‘대림’, ‘아프리카’ 그리고 ‘일자리’. 제가 이 주제 관련 전공자인지라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기자님들 이건 너무 쉬운 방식입니다. 댓글을 보니 여러분들의 전략은 성공한 듯 보입니다. 저는 난민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그려 놓는 것도 이와 ‘유사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만. 여러분들의 방식이 더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의 기사는 제목과 첫 줄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념비적인 여러분의 첫 문장을 돌려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아 참! 이제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행정문서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거 아시죠.

“조선족과 중국인 일색이던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인력시장에 매일 수백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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