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어떤 가능성에 대한 끈질긴 사랑_하므음: 둘, 셋의 공통감각

하므음, 묘리기, 2017, 예술공간 서:로
하므음, 묘리기, 2017, 예술공간 서:로

1
사랑하는 당신의 선물을 고르다 망설였다. 나는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통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검은색이고, 그렇지만 꽃을 고를 때는 파스텔톤을 선호하고. 코코아를 좋아하지만 정작 쓰고 달지 않은 코코아를 찾는 당신까지는 내가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와 느낌 앞에서 나는 한참이 모호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검은색이 어떤 위안을 주는지 몰랐고, 파스텔 톤이 당신을 어떻게 물들이는지, 그런 코코아에 심심함 말고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모호하지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모호 속에서도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의미와 느낌에 관한 문제를 물음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불투명함은 묻고 답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불가능은 의미와 느낌이 정신에 속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신은 도무지 그것의 하위거나 이종(異種)의 세계일 물질 세계를 향해 뛰쳐나올 수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 수 없으면서도, 차마 뻣뻣이 다가갈 수 없는 마음이면서도 불쑥불쑥 은밀히 맴도는 의미를 시인은 “풀잎은 모두 대지를 향해/ 지친 허리를 누이는 밤/ … / 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 튀어올라 물보라 치는/ 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기형도, 1982作)라고 적는다. 온몸의 반이 무너져 내린, 돌이킬 수 없기에-혹은 돌이킬 경우 남는 것은 절망이기에-그 뒤로 희망을 반강제적으로 각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퇴폐적인 희망’이란 얄궂은 의미로 프리다 칼로의 그 꾸덕꾸덕함 안에서 건네진다.

의미와 느낌 그러니까 정신의 현전 불가능성으로부터 언어가 언성을 높이거나, ’너무’나 ‘엄청’ 그리고 ‘존나’와 같은 부사의 수식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수많은 비유를 향해, 또 색채로, 멜로디로, 점토로, 필름으로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모두 정신이 물질을 빌려서 하는 일이자, 예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언어는 또다시 정신에 도달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다시, 그러나 언어는 주춤거렸던 발을 다시 구른다. 어째서 언어는 가망 없는 여로를 지속하는가. 그리하여 언어는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은 언어가 한갓 그릇으로, 도구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면 예술의 존재론에서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에 속한다. 작가 하므음은 스스로를 ‘이름짓기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작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에 ‘이미’ 주어진 것일 이름을 짓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을 되새길 때,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존속될 때, 전시는 가망 없는 것에 대한 아름다운 헌신처럼 보인다.

2
《둘, 셋의 공통감각》이 소유한 근심은 예술 안에서 낯설지 않거나 유습한 일일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 이론은 ‘이름’을 사물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무연적(無緣的)인 것으로 보았고, 그로부터 자의적인 이름을 짓는 것으로써 기존의 이름에 침착된 권력에 맞서는 것은 충분히 존재해왔다. 이제 그곳에 남는 것은, 작게는 결론 없는 놀이, 크게는 궁극적 진리의 부재다. 해체주의는 이 지점에서 사물의 정체와 이름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예찬하고, 그것이 해방시키는 차이와 차연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한동안 미술계는 결론적인 것과 진리에 대한 의심이 함축하는 차이와 개별성에 관한 소생을 미학적 진보됨으로 곧잘 치환하곤 했다. 그러나 바디우가 말했듯 ‘차이’는 주어진 것이며, 사고에 어떤 흥미도 유발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니다.(알랭 바디우, 「윤리학」, 38p) 중요한 것은 진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방법론을 의심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차이의 윤리학에서 예술의 지위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므음은 기존에 유습하게 존재한 담론들 그리고 해체주의와 구별된다. 하므음도 놀이를 한다. 그러나 놀이는 ‘현전’에 대한 어려움을 감내하는 기꺼운 태도에 머문다. 그는 그것의 결론이 ‘명명된 것’과 ‘인식된 것’이 일치하는 아담의 언어이길, 그리하여 본질에 닿기를 끈질기게 열망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디 신의 입에서 나온 ‘언어’였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세기 1:3)부터 “하시매”와 “가라사대” 그리고 “칭하시”는 것. 세 가락의 운율 반복되며 창세(創世)는 시현된다. 그래서 언어적 본질로 비롯된 모두는 그때만 해도 자연과 인간의 구분 없이 그리고 위계도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다. 과육이 떨어질 때 유년기의 인류는 나무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잉여가 될만한 필요 이상의 채집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풍차를 연기하고, 고양이와 대화하듯 자연과 동등하게 눈높이와 눈빛을 맞출 수 있었던 그 때에, 자연은 결코 도구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19) 신은 발화로써 세상을 짓고 인간은 제 이름함(Namensparche)으로써 신의 창조를 존속한다. 소리 없는 사물의 (언어적)’본질’을 발견해서 인간의 음성으로 번역한다는 것. 이때 번역은 ‘인식’이었으며 약속도 논증도 없이 그것은 소리내자마자 저절로 본질을 인식 속에 알렸다. 아담의 언어에서 ‘명명된 것’(주어)과 ‘인식된 것’(술어)은 직접적으로 일치하기에 명명은 규정이 아니며 결코 폭력도 아니다.

《둘, 셋의 공통감각》이 함유하는 서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전시는 그것이 이미지로 작업화되기 이전에 두 개의 단계를 선행한다. 첫 번째는 “ㅌ” 연작 등에서 보여지는 소리의 시각화이다. ⟨“ㅌ”-눈썹⟩과 ⟨“ㅌ”-수염⟩에서 소리는 시각화된다. 입에서 나온 ‘언어’(소리)가 ‘사물’(시각화)이 된다는 것은 신의 창세와 닮아있다. 그러나 창세한 것이 고작 눈썹과 수염인 일부일 때 그것의 소박함과 엉뚱함은 ‘창세’가 아니라 언어에 창세의 권능이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소리의 시각화 단계의 작업들은 창세기를 연상시켰다가 패러디인 체 끝난다. 그리고 패러디로 끝나기에 창세기의 서사는 지속된다. 창세기에서 낙원의 존재는 주어가 술어와 곧바로 일치하기를 넘어서 그 인식의 외부 즉, “판단”을 원했다. 열매를 통해서 아마 그들도 “좋았더라.”(창세기 1:4)와 같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눈썹과 수염은 그 무엇보다 판단에 의지적인 사물들이다. 눈의 근처에 있더라면 눈썹으로 알려졌을, 반대로 턱에 근처에 있었더라면 수염으로 알려졌을 그것들이 그저 눈썹과 수염으로 명명될 때 본질에 해당하는 것은 ‘판단’(규정)이 된다. 첫 번째 “ㅌ” 연작은 그것의 연상(聯想)적 전개를 통해서 창세기부터 ‘아담의 언어’의 타락까지 가볍게 도달한다.

두 번째는 “묘리기” 연작 등에서 보여지는 사물의 소리화이다. ‘아담의 언어’는 타락했다. 바벨의 언어만을 가지게 된 인간은 도무지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인식할 수 없고, 개념으로만 사물을 인식한다. 개념으로만 사물을 보는 인간에게 자연(사물)은 이제 말이 없으려 한다. 자연은 “늘 슬픈 예감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이미 시들어버린” 인간의 언어 안에서 명명된다는 것은 더더욱 슬픈 일이다.(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93p) 이 지점으로부터 개념만 남은 채 인간은 의미와 느낌으로부터 그러니까 정신의 현전 가능성으로부터 요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했듯 인간은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 침묵에 빠진 자연에게 그리고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 타인과 타자에게 말을 건네고자, 정신은 하위 세계인 물질을 향해 다시 내려간다. 비유로, 색채로, 멜로디로. 그것은 그때 예술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그러나 이는 갸륵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갈망이 예술로 번질 때, 대부분의 예술이 망각하는 것-그러나 은연 중에 매개되는 것- 그리고 진리의 부재의 선언(특히 해체주의)이 소거하고자 하는 것은 바벨의 언어가 낙원의 언어에 제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므음은 바벨의 언어만 기억되거나 언어의 무의미에 천착한 것을 지나쳐 바벨의 언어 속에서 근원적 언어의 흔적을 응시한다. 그리고 정면에서 감히 그 가능성을 끌어 안는다. 그가 분무기에게 “묘리기”라고 언어적 본질을 가정하고 명명하여 말을 걸 때, 그것의 의미화는 당연히 정신의 현전의 불가능성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의 출발은 정신의 현전의 가능성, 진리에 대한 포기가 불가능하다는 태도에 고정된다. 여전히 자연은 말하려 한다는 것. 그러니 예술가는 그것을 물질로 번역하는 일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낙원의 언어에 대한 끈질긴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 그 가능성에 대한 끈질긴 사랑으로 하므음의 실천은 아담의 언어에 닿아있다.

3
소리의 시각화가 담는 창세, 창세에 대한 패러디 그리고 사물의 소리화가 담는 언어의 타락, 아담의 언어에 대한 복권의 시도. 이 두 단계의 서사를 따라 전시가 소망을 다 하는 동안 전시 앞에 선 이는 몇 마디의 말도 오래 입안에 굴려보며 아끼게 된다. 가망 없는 것에 대한 시도가 과장돼서는 안 될 것이다. 전시 한 번이 바벨을 낙원으로 되돌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가망 없음을 인정하고 주변에 다른 것을 매개하는 것-물론 이것 역시 과소 평가돼서는 안 될 것이다-을 넘어 가망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포기 없이 헌신함은 그 자체로 숭고한 자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헌신만이 사건의 계기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

지금의 언어는 사물의 참된 모습을, 전달하고자 하는 정신을 흩어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예술 속에서 불쑥불쑥 매개되기도 하고, 낱말들을 희미하게 비추기도 한다. 정신이 내려와 하위 세계의 물질로 번역되었을 때 그것은 외려 흩어진 아담의 언어의 흔적을 내보인다. 그래서 벤야민은 모든 상위 언어가 하위 언어의 번역이라 말한다. 그리고 《둘, 셋의 공통감각》은 그 언어로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하위의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될 것의 참된 현전을 위하여-언어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더 천한 하위의 번역으로 내려간다. 그 번역이 더 천한 까닭은 그것이 이미 불신에 처하고 있는 ‘말’-그리고 이름짓기-을 다시 선택하기 때문이다. ‘말’에 의해 사물과 자연은 그들의 고유성을 잃는 배신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므음은 다시 ‘말’을 선택한다. 고유성과 차이를 무시하는 폭력을 휘두르고, 신을 패러디한 ‘말’은 세계를 훼손시켰다. 그러나 고유성과 차이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그 고유성과 차이를 부각시키고 돌보는 것만으로 마련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차이를 이해하는 일이란 우리가 만나고 모습을 볼 공통의 지평이 마련되는 것에 있다. 결국 그 고유성은 말씀에서 나온 언어적 본질이라는 보편성에서 완전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므음은 그 공통의 지평을 공통감각이라 불렀으리라 생각했다. 더 천한 하위 언어의 번역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었을 때, 《둘, 셋의 공통감각》은 마땅히 더 숭고한 상위의 언어로 발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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