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효과의 기술’ 리뷰: 참여라는 타성적 좀비를 인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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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중 안대웅의 큐레이션 <효과의 기술>과 강신대의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 포스터. 디자인: 권수진

안대웅이 큐레이션한 <효과의 기술>과 이 전시의 유일한 출품작인 강신대의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를 관람했다. 종로 세실극장의 무대/객석의 구분을 아랑곳 않고 무대를 클럽의 스테이지로 구동시킨 전시이다. 입구에선 입장료를 지불하자 클럽팔찌를 채워주었고 극장 안으로 들어온 관객들은 일차적으로 스테이지에 올라와 디제잉하는 광경을 찍는다. 디제이가 다루는 믹서 바로 앞에선 고용된 듯 몇 명의 바람잡이들이 쉴 새 없이 몸을 흔든다. 관객들은 바람잡이들, 음악, 조명이 만들어내는 정동affect의 선열에 합류할지 말지를 동행한 이들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망설이다가 소극적인 호응을 반복하며 스테이지를 서성인다. 디제이는 여느 클럽처럼 관객을 열광시키기 위해 분투하지 않았다. 사운드는 같은 리듬을 유지하며 알게 모르게 변주되었다. 불규칙적으로 분사된 안개는 오히려 분위기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공연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지속되다 끝이 났다.

세실극장의 무대/객석의 강한 분할을 폐지하려는 시도, 그러니까 사전에 공간의 단절적 자기주장을 충분히 고민했을 것임에도 관객이 강제로 참여하게 만들려는 사전적 노력이 없고, 객석에 앉아 무대를 관람하는 이들을 무대로 뛰쳐나오도록 독려할 만한 장치가 부재할 때 이 기획은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 내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내포한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객석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은 몇 명의 사람들만이 무대 위에서 미온적으로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볼 때 즉각적으로 ‘이것이 다인가?’하는 물음에 직면했을 것이다. 무대에 올라간 관객들은 참여자라고 하기도, 관람객이라 하기도 애매한 위치에서 적당히 예를 표하듯 음악에 반응하다가, 주변을 힐끗거리다가, 사진을 찍다가 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등 디제이가 만들어내는 정동의 흐름에 전혀 감입되지 못한 채 동요했다. 감성의 분배 같은 것을 부여받기는 고사하고 이 위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혼란을 겪는 듯 보였다. 그 때문일까. 무기력하고 퇴영적인 관객들의 움직임은 좀비를 연상케까지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외부 아닌 외부에서 관조하도록 구성된 객석의 보존은 그곳에 앉은 관람객에게 유발할 감성이 있다고 말을 건네는 행위이자 그 감성을 통해 얻어낼 인식이 있다고 예고하는 듯 했다.

안대웅 X 강신대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8, 퍼포먼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양헌 기획)
강신대,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8,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중 안대웅의 큐레이션 <효과의 기술> 출품작

무대의 관객들은 자신이 느끼는 당혹감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같이 온 무리들과 끊임없이 말들을 주고받으며 객석과 무대를 간헐적으로 오갔는데 그 모양은 동시대 예술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인 관람객의 ‘참여’에 대해 재고하도록 요구했다. 자발적 관람객을 통해 자폐적인 예술로부터 벗어나 친화적인 예술의 장을 구성하겠다는 일련의 시도들을 의심하는 일. 이를테면 불온한 참여를 만들어내 기존의 숱한 참여의 파벌들을 탄핵하려는 듯 보였다. 이 주장을 밀고나가기 위해선 작가가 클럽의 장치를 구현한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는 일이 우선이겠다. 클럽은 단순히 이성을 공략하기 쉽게 분위기를 고양시키도록 고안된 장소가 아니다. 클럽이란 공간이 주체에게 주려는 효과는 집단 속에서도 타인을 의식하는 일 없이 춤을 통해 무아지경에 다다르게 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이것은 원시적 공동체의 종교 제례와도 유사한 면이 있는데 말초적인 EDM 사운드의 반복적인 리듬은 최면처럼 춤추는 이의 의식을 지우고 내적인 영역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조명은 계속 점멸하며 타자의 실존을 기만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분사되는 안개는 주체의 인지에 가장 영향이 큰 시각을 훼방 놓는다. 위의 기술들이 상보적으로 작용해 온전한 효과를 이루어 냈을 때 유최면 상태의 주체는 외계와의 링크가 두절된다. 리듬과 춤을 일치시키고, 심장의 박동과 묵직한 베이스사운드의 공명을 통해 더욱더 몽환적인 영역에 도달하는 것만이 과제가 된다. 오롯이 개인만을 무한의 전체로 느끼도록 하는 일이 이 사운드스케이프에서 동원되는 온갖 장치들이 갖는 목적이다. 낯선 외부와의 연대를 목적으로 하는 송가나 투쟁가의 성격과는 달리 EDM은 자신이 속한 시간/공간의 단절을 통해 지금-여기를 뛰어넘어 쾌락적 법열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그것을 완수하지 못하는 관객, 즉 음악, 조명, 무대효과 등이 절합적으로 조성하는 특수한 정동적 생산의 흐름 속에 유기적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갈 때 주체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 때 무대 위 관객의 동적 명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건 배후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꾸준히 인식하게 만드는 객석 때문이다. 의식을 환기하도록 주시하는 시선이 뒤통수를 괜히 간지럽히기에 주체의 몰입은 객석에 앉는 익명의 타인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방해된다. 주체를 놀라게 하는 사르트르적 응시로 인해 결과적으로 무대는 불안하고 분열되고 어긋날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세실극장이 몰입과 참여 따위는 입장시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던 것이다.

안대웅 X 강신대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8, 퍼포먼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양헌 기획)
강신대,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8,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중 안대웅의 큐레이션 <효과의 기술> 출품작

작가 강신대는 아티스트 토크에서 자신의 기획이 두 개로 분할된 시선, 즉 무대에서 스크린을 소비하는 시선과 그러한 관객을 객석에서 관람하는 두 개의 시선으로 나누어 사유를 촉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디제이 뒤에 걸린 스크린에선 작가 본인의 이전 작업인 <루드비코: 미적 향연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전의 그 전시가 락 사운드를 입혀 폭력의 부정성은 제거되고 스펙타클만 남은 세계에 대한 겨냥을 행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도 그러한 의도가 내재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무대의 관객은 클럽의 팔찌를 두르고 입장할 때 입장권과 화폐를 교환한 소비자이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 남은 자리를 점유하고 전시를 체험할 때 그는 참여자이다. 그것도 배경에서 상연되고 있는 폭력적 이미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충동과 감각의 생산을 위한 장치 중 하나로 간주하고 즐기며 스펙타클을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는 참여자이다. 주체의 충동만을 거듭하도록 이미지가 전개될 때 전쟁의 참혹함, 비극, 원인, 비판 같은 것은 더 이상 없다. 탈감정적으로 마모된 일말의 윤리조차도 흔적 없이 사라진 공간에서 폭력의 이미지는 우리의 자율신경계를 자극하기 위한 이미지로서만 끊임없이 제시된다. 명백히 그것에 노출되고 있는 무대 위 관객에게선 한 톨의 자성조차 없다. 지금 하나의 스펙타클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스펙타클은 끝나지 않는다. 강신대가 시선을 두 개로 분할하였을 때 아직 하나의 스펙타클이 남는다. 객석에서 경험하게 되는 스펙타클. 무대에 오른 참여자들도 모종의 당혹감을 느꼈겠으나 객석에서도 물음은 스쳐지나간다. 위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을 때, 참여를 통해 수행된 하나의 스펙터클을 관조적 위치에서밖에 바라볼 수 없는 관객. 그러니까 무대/객석의 단절 속에서 정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관중’에게 또한 참여라는 것이 화두로 제시된다. 즉 작가는 이중의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은 무대에서 시연되는 스펙타클을 외부의 시선에서 견지하고 비판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입장권을 결제하고 들어온 소비자라는 점에서 묘한 정치적/윤리적 문제를 마주하게 한다. 무대/객석의 단절이 그것을 더욱 배가하는데, 무대의 스펙타클을 비판적으로 목도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어떤 식의 수행으로 그러한 비판과 일치된 ‘참여’를 구성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 당도하는 것이다. (물론 객석에 짐을 두고 자유롭게 무대에 오가는 것이 가능했으나 그것은 앞서의 스펙터클로 종속되는 행위다.) 전시가 작동되고 비판될 수 있는 위치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제공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수행성도 불가능한 주체에게 무대를 편하게만 바라볼 수는 없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참여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그러나 관중이 문제를 파악했건 말건 이 공간은 그에게 어떤 역할도 할당하지 않고 그의 인식과 상관없이 스펙타클은 계속된다. 공간과 장치들을 사유하지 않은 채 무대에 뛰어드는 이들의 참여 아닌 참여를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을 간파해낸 관중을 향한 참여불가능성의 비판. 무대를 통해선 눈 먼 참여의 무비판성을, 관객을 통해선 비판적 참여의 불가능성을 작가는 동시에 전개한다. 결국 위협받는 것은 무대 위에서의 관객의 정동적 몰입 뿐 아니라 객석에 앉은 관객의 정치적 불구가 된 신체이기도 한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는 입장권을 구매했으므로 최고로 스튜핏한 소비자이자 찌질한 참여자가 된다.

안대웅 X 강신대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8, 퍼포먼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양헌 기획)
강신대,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 퍼포먼스 기록사진, 2018,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중 안대웅의 큐레이션 <효과의 기술> 출품작

참여.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무대를 마련해놓았을 때 관객은 사전에 참여를 의도적으로 요청받는다. 그때 이미 참여의 자율성은 의심을 사게 된다. 불이 있으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관객은 무대가 있으니 반사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렇다면 무대는 관객이 떨어지도록 패여 있는 공간이다. ( 실제로 세실극장의 무대도 객석보다 아래에 위치했다.) 거기서 어떤 몸짓을 하더라도 그는 기획된 스펙터클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요소로-강신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자본주의의 병리를 자신이 직접 체현하는 것으로 일축되어 버린다. 무대가 아니면 객석에 자리해야 한다는 공간적 구성 때문에 그는 두 가지 역할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셈인데, 그러니 애초에 참여란 것은 쌍방의 합의로 구성된다거나 호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참여? 그것을 고안한다는 데서 이미 문제적이지 않은가? 오늘 날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이미 이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유기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동자에게 자기계발을 강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참여란 그런 자본주의적 얼굴의 미술적 판본이 아닌가. 자기계발을 스스로의 수양처럼 느끼는 것을 느끼는 일이 터무니없는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저급한 술수임에도 그런 흐름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자 애쓰는 대중이 존재할 때, 예술가가 관객의 참여를 고안하는 일은 자본가가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관객들의 참여로서 완성되는 예술이 있다고 할 때, 거기엔 자본과 노동의 모순적 관계가 그대로 투영되었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자본의 유아적 관성을 낯짝도 두껍게 모조해서 참여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예술을 하겠다는 기획은 이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못된 예술’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예술에게 과제 같은 것이 있다면 이런 허위적 참여를 때려 부수는 일일 것이다. 강신대는 그러한 비판을 참여 아닌 참여로 수행함으로써 좋은 전시를 보였다. 자신 또한 디제이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이러한 스펙타클의 외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다루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모순적 위치에 존재했을 때, 막연한 방식의 거부가 아닌 내적 성찰을 통한 패러디의 형태로 참여의 모순을 제기하는 이 전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마치며.

위의 논의를 중점적으로 개진하느라 다루지 못한 부분들에 제언을 붙인다. 이제 위의 스펙타클은 단지 스펙타클로만 머물지 않는다. 차라리 민주적 스펙타클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전의 스펙타클이 일방향적이고, 맹목적이고, 고압적이었다면 포스트-스펙타클은 민주화된 스펙타클이다. 그것에 매료된 이들이 자유자재로 스펙타클을 조형하고 퍼나르며 파종하는 새로운 유형의 스펙타클. 오늘날의 대중이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공유, 인스타그램의 팔로우 등을 통해 하루아침에 만들어내고 또 소외시키는 스펙타클. 기획되고 고안되고 유도된 스펙타클을 넘어 그러한 공정을 대중이 탈취한 듯한 스펙타클. 전시서문에서 큐레이터 안대웅은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현현presentation을 강조하며 명명되지 않은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탐색하겠다고 사전에 호언했지만 일회성 클럽 형식의 공연 역시 재현을 피할 수 없다. 사진 찍는 주체의 손에 들린 갤러리로 세계는 귀신처럼 빙의한다. 세계란 선재하는 유일한 로고스이자 인간은 바로 관계들의 조직망이라던 메를로 퐁티의 말은 거품처럼 터져버린다. 이제 관계들의 조직망은 인간이 아닌 소셜네트워크다. 가상에서 인격-인터페이스를 형성하지 못하는 인간은 부분적 신체를 가진 듯 여겨진다.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대표되는 클럽의 휘발성조차 마저 연소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핸드폰 어딘가에 그 불씨를 도난당하게 되는 것이다. 클럽의 전시는 관람객의 참여를 자율적으로 조직하며 오늘날의 스펙타클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관람객은 전생에 사관史官이었는지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다. 다음날부터 이어질 세속적 사도들의 이미지-전도는 오늘날 산업홍보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유비될만한 지점을 만들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내가 아닌 다른 명석한 비평가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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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과 엮인 글

1.《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의 전시서문

2. 홍태림_강신대 작가론: 자기반성적 시간의 붕괴가 낳은 불투명한 광경들

3. 심이나영_동시대의 시대정신을 위하여: 강신대X홍태림 대담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