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예술과 윤리, 그 불행한 동거

가끔 그런 예술이 있다. 보고 있자니 화가 나고,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눈살이 찌푸려지고,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고, 전시장을 나가버리고 싶거나 아예 전시 자체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예술들. 그것들을 관람할라치면 먼저는 감수성을 건드려 불쾌감을 자아내더니 곧 이성적으로는 시민적 윤리의 영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훼손하는 듯 보여 무례하다는 인상까지 준다. 사회적 격률로부터의 탈선이 어느 정도 용인되던 전통적 인정이 내외부적으로 재고되면서 점차 예술 또한 예술이라는 이유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끈끈한 속박이 죄여오고 있다. 이는 분명 우리 시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중 하나이다. 특히 요즈음의 피드백들을 둘러보면 미욱한 감수성을 거쳐 제작된 예술들은 모두 씬 내에서 퇴출당하여야 한다는 혹독한 비판들이 늘어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작업의 내적인 동기와 의도의 문제를 아무리 강변하더라도 참작되기가 어렵다는 듯 말이다. 특정 논쟁이 시대의 사상적 단락을 구성한다고 가정해보자. 가령 중세가 보편과 개별에 대한 정의를 두고 거세게 논쟁한 시대로 기억되듯이 성적인 것을 필두로 윤리나 감수성 같은 것들이 후일 하나의 챕터로 편집될 듯하다.

윤리>예술?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의 체계에서 내면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수행되는 도덕이란 이성이나 오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분할된 영역의 행사로, 객관적 실재에 뿌리를 두지 않는 독자적인 수행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각 개인은 자신의 준칙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이므로 정언명령의 당위에 대한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을 거부하게 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행사된 윤리는 어떤 메타적인 논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행사되면 족할 뿐이다. 허나 실천과 당위의 적합성을 두고 시시때때로 달아오르는 사회적 풍경을 보노라면 칸트를 따라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칸트의 주장은 전의식적 수준에서 이미 내파된다. 그러니 윤리에 대한 가치판단의 사회적 성격을 자연히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것이 예술과 접 붙을 때 어떤 가치를 우위를 두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문제는 제법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 유전 결손을 선험적 수준에서 고려한 근친상간의 금기를 보더라도 윤리는 다른 사회적 요인과 관계된 당위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 피임의 발달로 근친상간의 배덕이 재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는 것에 비춰본다면 윤리 역시 역사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범주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사회에 누적된 어떤 윤리들은 당위를 상실하여 인습이 되었으면서도 시간의 마법을 둘러 모두를 속인 채 전통 행세를 하고 있다. 때문에 퇴적된 불순물들의 현재적 당위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는 일도 과제가 될 테지만, 그보다 심각한 일은 요사이 잇따르는 추세를 방종하여 예술에 대한 윤리의 우위를 수긍한다면 파시즘 국가에서 당의 검열을 거쳐 예술을 해야 하듯 윤리의 자성적 검열을 거쳐 예술을 해야만 하는 새로운 억압의 기제가 작동할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당에서 윤리로의 예속은 검열이 더욱 교묘해졌음을 뜻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억압하지 않는 방법으로 억압할 것이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듯 복종주체에서 성과주체로 넘어가는 시대적 구분이 옳다면 억압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작동할 것이다.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개인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자율적 성과를 강제하는 사회적 효력에 둔감하다는 점에서 미진하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너 자신이 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필두로 자기계발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착취 모델이다. 따라서 체제는 자율적 주체가 되도록 강제한다. 주체가 자기 의지로 체제에 뛰어들도록 유인한 몇 토막의 치즈야말로 통치의 근간이다. 윤리의 외재성도 그와 다르지 않다. 윤리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성적인 공정을 거쳐 양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지만 아버지의 질서를 내면화했다는 점에서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초자아와 관련된 부분으로, 만약 예술이 윤리에 포섭된다면 우리를 훈육하는 아버지의 질서가 유례없이 과시될 것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순차적으로 내면화된 아버지의 법은 직접적으로는 덜 혹독하지만,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집요함으로 예술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윤리와 예술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먼저 극단적이라 생각해도 좋으니 단 두 종류의 예술만이 존재한다고 여기자. 이 세계엔 오직 반성적인 예술과 비반성적인 예술만이 존재한다. 예술이 세계의 광경에 의해 규정된 의식을 고스란히 대변할 때 그 예술은 비반성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적인 예술로서, 기꺼이 그 시대에만 말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예술은 비평의 조력을 요하게 된다. 비반성적 예술이 시대를 대변하는 의식을 내포한다면 그것이 이 시대에 말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한 무의식적 골조를 추론하는 것이 비평의 책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적 예술, 곧 정치적인 것이 되는 예술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러한 예술의 가치와 급진성을 논구하는 일 역시 비평에 요구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술과 비평의 상호증진성은 윤리적인 성토와 관련된 경우에 기존의 예술에 씌워진 오해를 극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둔해야만 한다. 윤리함양의 풍토가 별문제 없이 번식하고 있는 오늘날엔 우리 사회의 윤리적 지평이 어떤 객관적 당위를 토대로 경계 지어져 있는지 검토하는 일이 예술과 비평 양자에게 모종의 절실함을 배가할 것이다. 정치적 능력이 와해된 시민이 내세울 것은 윤리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래서 윤리가 우리 스스로를 옥죄면서도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지고의 철칙이 된다면 그것 자체로 새로운 모순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모순이 세계를 압박하게 될지 직관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성과 지각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예술뿐이지 않을까? 예술은 한 사회의 모순을 관통할 수 있는 일종의 벌충분으로서 안티테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예술은 자신에게 쏟아질 숱한 곡해를 무릅쓰면서 윤리와 그것의 근간을 추궁해야 할 책무를 지게 될 것이다.

윤리의 매무새, 김홍석과 베르가스의 사례

윤리와 대질하며 예술의 가치를 획득한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국내와 국외라는 당장 떠오르는 허접한 기준으로 나누어 소개코자 한다. 2008년 개시된 김홍석의 <창녀 찾기>는 120만 원을 내걸고 전시장 내에 섭외된 창녀를 찾는 퍼포먼스로 이루어졌다. 창녀는 전시 개막으로부터 3시간 동안 6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전시장에 초대되었고, 창녀를 찾아낸 이에겐 120만 원을 ‘상금’으로 준다던 퍼포먼스. 그것이 가져왔던 사회적 파장은 아직도 어제 일어난 일처럼 익숙하다. 비판적 기사, 예술을 빙자해 도를 넘었다며 꾸짖는 단체들의 비난, 대중여론의 악화, 안티 퍼포먼스, 잠정적인 갤러리 봉쇄까지. 김홍석 개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 역시 줄을 이었다. 급기야 작가가 섭외된 여성은 창녀가 아닌 배우였다고 해명하기에 이르렀는데, 민주성노동자연대의 한 활동가는 “담당자가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여러 언론을 통해 ‘실제 성노동 여성을 썼다’고 말하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모든 언론을 농락하는 발언이다”1) 라 주장했고, 김연호 대안영상문화발전소아이공 대표는 “퍼포먼스 속 성매매 여성이 배우였다고 해도 이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들이 입었던 상처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2) 전시장 내 여성들을 잠재적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시켰다는 날 선 어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의견으로 남아있다.

조선일보 2008년 4월18일자 14면

퍼포먼스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서문에서 밝힌 대로 우린 원하건 원하지 않건 종종 그런 예술들과 조우하게 된다. 다만 그런 예술이 주는 시사점은 어떤 것이 있을지 따져보는 일이 앞서의 분노로 인해 소각되어선 안 될 일이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기도 하다. 김홍석의 퍼포먼스는 우리에게 몇 가지의 화두를 던져준다.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오늘날의 논의들과 결부시켜 세 가지로 줄여 아래와 같이 나누어보겠다.

① 창녀를 비롯해 매춘과 관련한 기존의 언어를 순화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것에 대해서

② 창녀로 초빙된 여성의 자발성에 대해서

③ 당사자 중심성과 관련해 생기는 상반된 주장에 대해서

여성에 대한 성 착취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논의는 아직 여성계 내부에서도 분분한 토론이 인다. 한 편에서는 창녀라는 단어를 금기시하며 성노동자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열렬하고, 다른 편에서는 성노동자를 성노동자로 명명하는 것부터 성적 착취가 은폐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 착취를 ‘성 노동’이라고 부를 때, 성 착취할 권리를 돈을 주고 산 사람을 ‘고객’ 또는 ‘서비스 이용자’로, 남의 몸을 팔아서 수익을 취한 포주를 ‘사업가’ 또는 ‘운영자’로 정당화해주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3)⌟ 여성의 성노동이 자발적이냐, 사회적 강제이냐에 대한 의견도 아직 종합적인 결론을 내지 못했다. (제2회 광주국제영화제의 <레드 마리아> 상영회 이후 토론에 대해 상기하라.) 작년 9월 중앙대에서 열린 ‘매개되는 욕망, 거래되는 몸’이라는 심포지엄에선 AV에 관해서 현대의 노예제라고 말하지만, 반면 필드에서 AV배우로 활동하는 한 여성은 “야동이 남성의 성욕을 조절하여 사회적 범죄를 감소시킬 것”이라며 옹호한다.

이때 사회적 합의는 예고된 실패처럼 보인다. 당사자 중심성에 따른다면 어쩌면 성 착취는 성 노동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그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자발적 성격도 인정되어야 하며, AV 또한 순기능과 역기능을 따로 평가해야 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문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이와 같은 불일치는 우리가 사회의 이면을 진단적으로 들추어내는 시도를 포기할 수 없게끔 만든다. 당사자 중심성만을 덮어 놓고 우선시한다면 우리는 개개인의 인식과 경험을 초과하며 미시적 주장과 별개로 작동하는 구조적 배제를 방관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될 때 문제를 올바르게 명시하고 넘어서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성적인 문제는 성별적인 문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성에 관한 영역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포주와 성매매 여성의 착취 관계를 포함하며, AV 산업이 이윤획득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해 성, 윤리, 여성이라는 다른 모든 가치를 파괴하는 문제 역시 공유하고, 심지어는 자발적 여성 노동자의 사적인 이윤노동의 이면에 존재하는 자유로운 계약의 모순적 문제 또한 함의한다. 그러니 성매매의 문제를 단순히 일부 여성의 성적 특수성에서 비롯한 성별적 계쟁으로 예단할 때 올바른 문제설정에 실패한다.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매개가 자본인 이상, 언제나 성의 매매는 존재할 것이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고 구체적 사례에 맞붙어 싸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례 일반을 직조하도록 안배된 사회적 법칙과 대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사건이 항시 재발할 여지를 남겨두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이율배반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발생할 때 구체적 사례의 급진성은 휘발된다. 위처럼 상반되는 주장이 얼마든 가능한 이유는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와 별개로 주관적 의식은 매개된 상태에서도 충분히 직접적인 것의 체험이 가능하다는 착각에 기인한다.(더 정확히는 매개된 관계가 직접적인 관계의 외양을 띠고 나타난다.) 그것이 가장되고 은폐된 것 위에서 전개되더라도 그릇된 인식 속에서 얼마든지 진정성이라던가, 자발성이라던가 하는 식의 경험을 누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편이라는 것은 산재한 여러 범주의 의견을 모두 포섭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보편일 수 있는 이유는 개별적인 모든 문제를 일거에 뿌리 뽑을 진실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포주의 감언이설에 속아 기지촌 창녀가 되어버린 기구한 여성의 사연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동시에 바에서 일하며 고소득을 올리는 것이 편하다는 여성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당사자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일은 찬반양론에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구조적 병리를 확진하는 일은 당위의 갑론을박을 뛰어넘는 일이다. 상기했듯 사건을 발생시키는 모체가 가진 모순에 대해서 올바르게 지적할 수 있을 때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성 노동은 아무리 자유로운들 성매매이고, AV는 어떤 명시적 계약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합의한들 노예계약이며, 성노동이란 이름하에 매춘을 서비스로 치환하려는 획책을 저열한 속임수로 간주하고 거부하려는 몸짓은 보편적인 주장이 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모든 주장이 화해 가능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는 망상에 가까우며, 모두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일은 개울을 더욱 세차게 휘저어 진흙탕을 만드는 일이다.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나 다원주의의 대두는 각 개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긍정되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을 억압할 때 모순을 찾는 일은 요원해진다. 이제 보편성을 만장일치 따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보편성은 다자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를 대변한다. 이는 대의민주적 환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양태를 조건 짓는 내부의 동력을 정지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이 김홍석의 퍼포먼스가 주는 교훈이다. 그의 퍼포먼스는 일차적 감응으로는 우리에게 심한 불쾌감을 준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줄 인식을 떠올린다면 퍼포먼스가 폄훼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시장의 여성이 창녀라는 치부를 들킬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실 배우였건 아니건 상관없다.) 전시장에 오게 될 때와 상금을 위해서 창녀를 찾게 만들 때 우린 돈이라면 어떤 짓이든 기꺼이 하게 만드는 체제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물론 보다 윤리적이거나 의식적인 개인은 자기의 내적 통제를 따라 그런 행위의 부추김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성취와 별개로 이는 우리 세계가 지배적으로 행하고 있는 사실이란 점에서 개인적 거부는 알량한 위선이 되어버린다. 김홍석의 퍼포먼스는 언뜻 보면 충분히 비윤리적이란 비난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린 그런 세계를 살고 있다. 그의 퍼포먼스는 세계의 치부를 고스란히 까발렸다는 이유로 빈축을 샀지만, 예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싫다면 김홍석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꿔야 한다.

국외의 사례로는 코스타리카 출신의 예술가 기예르모 베르가스(Guillermo Varga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기견을 전시장에 끌어와 스펙터클로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세계적인 비난에 시달렸는데, 도의적인 면을 제하고 보면 그는 우리 세계의 일부이면서도 인식되지 못하던, 즉 하나의 바탕에서 방치되던 부정성을 찾아내고는 전시장에서 폭로하는 데 성공한 예술가이다. 길거리의 유기견에게 우리가 갖는 관심은 매스컴에서 종종 접하는 기사로 만날 때야 탈감정적이고도 의례적인 애도를 잠깐 표하는 정도 아니던가. 타임라인의 홍수 속에서 금세 그것을 인식 바깥으로 밀어내고 파편적인 감정만을 누리는 것이 동시대 주체의 지각형태이지 않나. 시민의 관행처럼 되어버린 인간중심주의적 삶의 제스쳐를 넘어서서, 그는 당대의 인식에 직접적인 일격을 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동정적 사건들을 방임하고 심지어 조장하면서도 감정적 층위에선 슬픔을 표하는 사회의 위선을 고발할 때 그의 기획 역시 예술이 된다.

기예르모 베르가스, <굶어 죽은 개>, 2007

전시는 인터넷을 타고 급속도로 전파되었는데 이후에 작가의 전시 반대 서명이 일어나는 등 숱한 논쟁에 부딪혔다. 거기에 굴하지 않고 도살 예정의 개들을 전시하고 시민에게 입양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그 개들이 다시 박스에 입양되길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버려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일상화된 윤리의 고갈을 고발하는 일이 성공했음을 증명했다. 당시 국제 동물 보호단체는 유기견을 잡아서 묶어두고 전시에 이용한 점과, 적절한 치료 없이 도로 놓아준 것에 대해 비난 성명을 냈다. 이에 베르가스는 빈곤한 현실을 외면하는 대중의 위선을 폭로하고 싶었다고 작품의 의도를 밝혔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실을 기꺼이 건져내 우리에게 내보였다는 사실은 예술가들에게 윤리적 비난을 가하는 일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그것을 직시할 만한 감성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역으로 그들은 우리보다 윤리적이다. 우리가 윤리로 치장하고 있는 반응 일반은 사실 치졸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술을 통해서 알려주었다.

이 두 사례는 우리 사회가 가진 윤리의 매무새를 다잡고 반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야차가 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때 예술가는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느냐고 일갈하던 현장법사와 흡사한 일종의 숭고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니 그들에게 성급하게 돌을 던지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의 표면적인 얼개가 비윤리적이라 해서 비난하는 일들은 지독하게 아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제 깨닫자. 두 예술가는 우리에게 귀중한 예술을 선보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속죄란 그들이 일깨워준 이 정체 모를 위pseudo윤리에 대해 재고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사설이지만 필자가 아는 한 작가는 최근에 한 퍼포먼스를 기획하다가 좌절하였다. 그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구상하였는데, 이젠 27인 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시민이 갖는 의례적 추모의 위선을 고발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계획했다고 알려왔다. 룰렛에 생존자 27인의 이름을 적어 ‘다음엔 어느 분이 돌아가실까요?’ 라는 멘트와 함께 룰렛을 돌린다는 냉소의 끝을 달리는 퍼포먼스로, 이미 시민이 기사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대여명을 대하는 자세는 룰렛을 기다리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이대로라면 모든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뒤 ‘우린 그들을 잃고 말았다는’ 반복되는 탈감정적 슬픔만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러나 퍼포먼스를 집행하는 것은 남은 생을 예술가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앞날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해 포기하였다고 토로하였다. 필자는 그것이 실제로 수행되었다면 예술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가스가 전시장의 개는 그날 가장 살아있었다고 말하듯 우린 이 퍼포먼스가 실현된 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가장 진지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여러 공간에서 예술을 참칭해 횡행하고 있는 조악한 키치들과는 차원이 다른 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중도 포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기에 작업을 끝까지 독려할 수도 없었다.

예술과 윤리의 변증법

결국 예술은 윤리의 반대항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기존의 윤리가 가진 결함을 쇄신하기 위해서 임의의 반대항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 좁은 세계에서 예술과 윤리의 동거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불행만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하는 상태는 없다. 행복은 그저 도취시킨다. 예술은 항상 겹겹이 포개진 오해를 뚫고 나가야 하므로 어찌 보면 못할 노릇이지만 예술에 계속해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 병변의 악성 여부를 살피는 일종의 조직검사를 시행한다는 점에서 진단적인 운동이고 삶을 위한 처방이다. 예술이 죽는다면 윤리는 암적인 전신 전이를 일으켜 손 쓸 도리 없이 자멸할 것이다. 이것이 변증법을 변호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 도식을 긍정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에 잠자코 복종하는 예술은 단지 마약성 진통제의 역할에 머문다. 별 탈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세계를 기만하는 사기술이라 불러도 좋다. 통각을 마비시키는 예술은 증상을 감춘다는 의미에서 지배에 종사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때 예술이 세계에 기여하는 바는 통속예술만도 못한 것이 되고야 만다.

나가며

사실 이 글은 이틀 전 집단오찬에서 게재된 반성착취 운동가 박혜정의 <미러의 미러의 미러>전에 대한 비평의 화답인데, 그녀는「예술의 범주 아래 고인의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성노동론’이 여자들이 몸으로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이를 왜곡해야만 성립 가능한 이론이자 이데올로기이듯, ‘성노동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메루메루님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 또한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을 무화하고 희화시키며 우리에게 ‘거리두기’를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런 것이 예술인가? 난 잘 모르겠다.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볍게 다뤄지며 희화되는 한 예로 보일 뿐이다.」4)라며 예술에 대한 윤리의 우위를 주장하는데, 성에 대한 그녀의 대개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예술이 윤리적인 범주를 초과하지 않는 선상에서만 시행되어야 한다는 근저에 깔린 인식엔 철저하게 불복하기에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는 고인의 죽음을 다루면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수준에서 코드화된 동선을 따라 감정을 처리함으로써 고인의 고통을 무화한다. 그러니 거리두기는 시민이 매체를 대하며 갖는 아주 기초적인 정서이다. 그녀가 분노할 지점은 작가가 예술을 빙자해 고인의 성적 피착취자로서의 삶을 모독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인이 어떻게 생전에 “성노동자라서 행복하다”, “난 자랑할 거야 난 섹스로 돈 잘 벌어” 등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주관적 인식을 초과하는 성적 착취를 검증하고 운동의 보편성을 강구할 방법은 무엇인지 사유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03987 

2) http://news.mt.co.kr/mtview.php?no=2008052116192160143&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 

3) http://jipdanochan.com/96 [집단오찬]

4) 미주 3)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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