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제보_날조된 수사와 싸구려 향연의 유통기한

1980년대 동아시아는 그야말로 혼돈과 저항의 시대였다. 한국에서는 1989년 여행 자율화와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 아래 세계화의 반열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1989년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태와 함께 민주화의 대한 열망의 폭발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곳을 둘러싼 민주화 바람은 활발한 서구 문화 유입의 계기가 되어 자본주의의 전환을 더 촉진시켰다. 1980년대부터 발기된 아시아의 역사성, 현재성, 세계 동시성에 대한 의문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세계화와 아시아의 지금・여기에 대한 시각문화연구의 물결은 미술계의 여러 과제 중 하나로 엄중히 다뤄지기 시작한다. 지난 2010년 미술을 진로로 선택한 이래  나는 탈구조와 현상학을 앞세운 뻔뻔한 미사여구로 난도질되는 미술을 지켜봐왔다. 물론 미술의 현학성은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2016년 몇 명의 경솔한 자들에 의한 한국 미술계의 ‘세대교체’의 주장과 근거가 ‘신자유주의식 생존 의지’로 담보되고 있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일들은 본 논고를 작성하며 결국 종잡을 수 없는 ‘무’의 허무함에 맞설 용기를 자각하게 하였다.

2007년 DMZ를 넘어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곳은 민간인이 절대 넘을 수 없는 곳이다. 그것은 1953년 휴전과 동시에 남과 북의 38도선에 존재 하는 경계선, 하나의 물리적 실체다. 이데올로기의 최전방을 목전에 둔 편협한 자유에 의심할 필요가 없어서 였을까? 그 명확한 경계선의 실체는 모든 것이 자명한 세상에서 묘한 위로가 되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민족의 애환을 앞에 두고 마음 편한 위로라니? 몰매 맞을 일이다. 다음으로 나는 페이스북에서 겪은 하나의 사건을 전제로 38선에서 받은 위로의 당위성을 서술하며 한 젊은 평론가의 경솔을 비판해본다.

2016년 막 미술대학을 졸업한 한국의 젊은 평론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동세대)가 인지할 수 없는 과거의 집적(역사)을 소환하는 일은 오류라며 불편한 기색을 표한다. 그의 주장은 한국 미술계에서 꽤 의미있는 환호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정당했을까? 만약 동시대 외부의 역사를 소환하는 일이 동시대의 오류라 주장한다면, 역설적으로 동시대를 어떤 하나의 시대로 구분하는 블랙홀에 빠지고 만다. 동시대를 하나의 근거없음의 윤리적, 미학적 태도를 떠맡은 ‘무엇’이라 주장함은 이곳에 무엇이든 혼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여기에 소환된 외부의 것들(역사)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인지가 불가능한 역사를 주목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외부로부터의 역사)의 실체를 순순히 인정하고 그것을 소환하는 일이 윤리적 문제가 있다 주장할 때, 반대편에 서 있는 무언가를 상정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윤리적 문제는 이항대립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윤리적 선택은 선과 악, 다름과 옳음 등의 분명한 실체를 기반할 때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동시대인가? 동시대의 정체는 그렇게 간단한 물리적인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반대항과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38선이 상징하는 민족의 한과 윤리적 분노가 경계의 실체와 확정성에 대한 부러움으로 기여한 일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한 파주와 북한 개성을 잇는 경의선 철로가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 철책에 가로막혀 있다. 사진출처

우리는 시대 소환의 윤리적 판단을 시원스레 외칠 수 없는 블랙홀에 서 있다. 우리가 현재라는 자명된 것을 실체화하려 할 때, 어김없이 ‘세대론’을 견인하는 일은 아시아의 동시대성을 포함한 한국의 현대성에 대한 논의가 생각보다 활발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한국 미술의 현재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2016년 논의된 신생공간 세대의 ‘위치짓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짧은 소논고의 특성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신생공간 세대를 언급할 때, 평론가들은 어김없이 1990년대 전반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신세대’와 ‘대안공간’세대를 소환한다. 아마 희미한 계보성을 알리바이로 두기 위함이 아닐까. 아무튼 그들은 전(前)세대의 이데올로기와 실체에 대한 반향과 달리, 지극히 신자유주의적 정치를 미술에 개입한다는 논리로 세대간 차이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과연, ‘정치’는 동시대의 경계선을 실체화시키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공간적’인 것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경솔한 자들은 왜 그토록 새로운 그럴싸하게 치장된 ‘가능성’ 내지 ‘발견’을 제조하려 하는가? 왜 그토록 정사를 만들어보겠단 천박한 욕망의 블랙홀에서 경직되어있는가? 우리가 만약 동시대의 지적 경향을 나열하며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날조된 수사와 싸구려 향연의 유통기한을 지켜보는 것 외에 마땅히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본 논고는 수학계획서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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