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4)

이영욱(미술평론가), 박찬경(작가)

6.문화번역 -전통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가 쓰여 진 것은 1964년이다. 당시는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4ㆍ19와 5ㆍ16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동 이후 ‘근대화’의 기치가 막 내걸렸던 시기였다. 또한 국민/민족 통합을 위해 국민/민족문화의 계승 혹은 개발의 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기도 했다. 김수영이 이미 당시에 관제 전통 개발의 허위성을 인식하고 전통 이해의 새로운 단초를 제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제안이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무얼까? 한편으로 그것은 상황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전통 소멸’이라는 일종의 기억 억압 내지 상실의 기제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긴 시인의 제안은 지나치게 이른 선취였다. 관제 전통문화 개발의 허구성, 곧 왜곡된 규율권력과 전통의 결합이 낳은 폐해 내지 허장성세로 생동감을 일어버린 전통보존의 난맥상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제안이 지금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었을까? 또한 우리 스스로 근대를 쟁취하기 위해 고투를 거듭한 결과 근대가 더 이상 그렇게 매혹적인 것 혹은 당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 설득력은 또한 전지구화(=세계화)가 초래한 최근의 문화지형의 변화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매체를 통해서 혹은 현실에서 무수히 다양한 타문화들과 맞닥뜨린다. 문화들 간의 조우와 혼성, 횡단은 거의 일상적인 사안이 되었다. 게다가 이 같은 문화적 충돌은 최소한 그 추이를 짐작은 할 수 있었던 예전과 달리 요사이는 미처 가늠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우리에게 닥쳐오곤 한다. 하지만 좀 더 주목해야 보아야할 사항은 이런 변화가 오늘날 그간 세계와 이곳의 일상적 삶 사이에서 완충 공간으로 작용해온 국민(국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거의 직접적으로 부딪쳐 온다는 점이다. 이는 전지구화로 인해 자명하고 영원한 것으로 여겨져 온 국민/민족문화의 경계들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그간 이곳에서는. 굳이 관제 전통 개발의 맥락은 아닐지라도 국가/국민문화의 경계 내지 틀을 설정하고, 그것의 문화적 본질과 기원을 탐구하며, 그 특수함 내지 우월함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지속돼 왔다. 이는 동시에 국민/민족 문화 내부의 모든 이질적 문화들과 비동시적 시간을 억압하고 동질화하려는 시도를 동반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같은 국민/민족 문화의 경계와 틀들이 결국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우연적인 것이었음을 나날이 좀 더 분명하게 깨달아 가고 있다. 또한 닫힌 공간 속에서 동질적 시간을 유지해 오던 국민/민족문화의 체계에 틈새들이 생겨나면서, 이 틈새들로부터 억압되고 단절되었던 이질적 문화, 비동시적 시간들이 마치 억압된 것들이 귀환하듯 되돌아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46) 변용을 거듭하며 지속해 온 전통의 흐름이 무의식과 육체로부터 풀려나와 무성한 나뭇가지처럼 자라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제안이 현재에도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바로 이 새로운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제 문화의 접변, 충돌과 관련한 문제는 제국의 문화와 피식민 문화의 조우라는 논점만으로는 해소되기 힘들다. 이제 우리 모두는 곳곳이 터져버린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가로질러 문화와 문화를,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빌려주고 되받는 21세기의 상호의존적인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일상문화건 고급문화건 대중문화건 그 어떤 층위의 문화적 흐름도 서로 다른 문화들이 뒤섞이고 협상하는 초문화적이고 초국가적인 국면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새로운 전지구적 문화경제는 이제 더 이상 중심-주변 모델로부터 유래한 한정된 용어나 개념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경제가 다양한 스케이프들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탈구적인 질서라고까지 말한다.47) 따라서 전통을 기억하고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이에 상응하여 변환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문화번역’ 이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주목해 볼만하다. 문화번역 이론은 문화 간 대면을 일종의 번역관계로 이해하고 이 관계로부터 새로운 의미가 생산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는 특징이 있다. 일본에 의한 식민 지배 이후 이곳에서는 당대의 문화를 평가할 때 끊임없이 이식의 공포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 시달려왔다. 물론 이식과 오리엔탈리즘으로 판정할 수 있는 층위들은 엄연히 존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식과 오리엔탈리즘 다른 한편으로 허구적인 국민/민족문화의 구성이 혼재하는 가운데, 외래문화와 조우하여 그것을 가공하거나 변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온 경과를 적절히 평가하고 격려할 수 있는 이론적 시야를 확보하는 일은 계속해서 지연돼 왔다. 하지만 문화번역 이론은 타문화와의 조우, 교차, 횡단을 이전과는 다른 열린 시각을 갖고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문화번역 이론의 논지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번역은 궁극적으로 문화번역일 수밖에 없다. ② 문화 간 조우, 교차, 횡단을 통해 발생하는 문화 교섭 현상 또한 일종의 번역 행위, 즉 문화번역으로 간주할 수 있다. ③ 문화번역은 자신이 처한 입지와 맥락에서 타문화의 언어, 행동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한 의미를 파악하고 이로부터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④ 이 때 번역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권력 메커니즘(예를 들면 식민/반식민)이 작동하는 상황에서 진행되며, 때문에 모든 번역은 일정정도 부분적 편파적 의도적일 수밖에 없다. ⑤ 번역에서 타문화의 완전한(등가의) 번역은 불가능하다(번역불가능성). 하지만 요점은 번역불가능성 자체에 있다기보다 이 번역불가능성, 곧 이동과 변형에 저항하는 차이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있다. ⑥ 양 문화 사이의 이 같은 간극, 틈새로부터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 따라서 문화번역은 따라서 고정된 문화(의미체계) 사이의 번역이기보다는 동일성에 기반한 기존 문화를 탈안정화시키고 또 다른 감수성을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활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⑧ 번역 과정에서 핵심적인 가치는 충실성이다. 하지만 이때 충실성은 좁은 의미의 충실성(원 텍스트에의 충실성)이 아니라 ‘타문화에 대한 […] 위험을 감수하는 거대하고 고통스럽고 폭발적인 사랑’48)으로서의 충실성이다. ⑨ 결론적으로 문화번역은 차이를 생성하는 끊임없는 반복수행으로 세계 속으로 새로움을 들여오는 실천적 활동이다.

[도판 8] 박이소, <무제>, 1994

박이소의 작업들, 특히 그의 미국체류 시기(1982~94) 작업들은 그가 ‘만남주의’49)의 딜레마를 문화번역의 문제틀로 재구성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학 시절 팝음악을 즐겨 학교 앞 다방에서 DJ까지 했었던 그가 막상 유학생으로서 서구문화의 실체와 접했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그야말로 면모를 달리하는 수많은 황당한 ‘만남’을 적나라하게 경험한 듯 보인다. 그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끊임없이 타문화에 의해 번역되고 규정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동시에 그 타문화를 해석하고 번역하여 그 문화의 내부로 진입해 들어가려 고투를 거듭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이 상호 규정과 상호 번역이 오해와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번역이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차라리 오역과 오해가 문화번역의 자연스러운 양태가 아닌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본 듯하다.

<무제>[도판 8]의 경우는 이 같은 정황 속에서 문화번역 그 자체를 화두로 삼은 작업이다. 이 작업의 초점은 (문화)번역의 불가능성/가능성에 있다. 작업은 간장을 담은 길쭉한 실험용 유리용기에 야구배트를 가로로 잘라 넣은 것으로 이루어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야구배트는 미국문화를 대표하는 야구의 상징물이며 간장은 한국 전통음식의 기본을 이루는 소스다. 미국문화와 한국 전통문화의 만남? 물론 양자는 남성적/여성적, 스포츠/음식, 고체/액체, 서양/동양 같은 또 다른 이항대립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양자는 실험관(과학용기) 속에서 절임 내지 숙성(자연적 과정)의 절차를 밟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간장이 배트로 스며들까. 아니면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인가, 혹은 특이한 혼성체가 만들어질까? 박이소는 무언가를 주장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사태를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성찰을 촉발시키기를 위한 장치를 고안해 냈을 뿐인가? 아마도 그는 수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하고 수많은 가능성 보여주는 것 그 자체를 작업의 목표로 삼지 않았나 싶다.

[도판 9] 박이소, <자본=창의력>, 1986

<자본=창의력>[도판 9]은 박이소가 문화번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일정정도 정리한 뒤 제작한 작업으로 보인다. 작가는 스스로 이 작업이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creativity=capital창의력=자본>[도판 10]을 ‘번역’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것이 번역 가능한 것인가? 어떤 식으로든 거의 똑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모사, 차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를 번역이 수행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시각언어에서 문화 간 번역을 위한 최소한의 대응관계라는 것이 존재할까? 물론 대응하는 요소나 국면이 있겠지만 사실상 번역가능할 정도의 대응이 가능한가는 회의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림의 번역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사태는 역으로 박이소가 문화번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여기서 번역은 처음부터 번역 불가능한 것의 번역, 혹은 이동과 변형에 저항하는 차이에 접근하는 문제로 제기된다. 그는 서로 유사성(아이디어, 스타일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그림들을 ‘번역’의 결과로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초점은 일단 텍스트로 된 번역대상인 ‘creativity=capital’에 있다. 그는 이를 ‘자본=창의력’으로 의도적으로 순서를 바꿔치기 했다.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는 인쇄체로 새겨졌던 글자 ‘자본’을 크기를 확대해 한국의 민간 서예체의 금빛 글자 ‘자본’으로 변환시켰다. 첫눈에 두 그림을 확연히 다른 것으로 느끼게 하는 분위기의 차이 혹은 재료나 매체 기법의 차이 역시 번역의 결과다. 그리고 그는 화면 위에 작은 글씨로 “독일의 조셉 보이스의 그림을 내가 번역했다”는 문장을 적어 넣었다. 나는 박이소가 이 작업을 몇 가지 의도를 갖고 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는 이 그림이 문화번역의 작동구조를 예시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그림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화번역의 요건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아마도 그는 이 작업으로 타문화(서구)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차용하는 작업들의 허실을 넌지시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특유의 난해하고 모호한 지점들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작업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판 10] 요셉 보이스, <자본=창의력creativity=capital>, 무브지 위에 석판화와 실크스크린, 1983

① 번역 대상의 의미파악(자본=창의력)을 위해 노력하라. 곧 사랑으로 번역하라. ② 그 의미와 사랑을 적극적으로 자신이 그것을 들려 줄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속으로 도입하라. ③ 오독과 오역은 불가피하고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나 충실하게 번역하라. ④ 그 과정에서 창조적 오독이 발생하기도 하고, 새로운 감성, 의미도 생겨날 것이며, 번역 대상 뿐 아니라 번역하는 문화 역시 재해석된다(민간 서예체 등). ⑤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의 의도가 작동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그 의도를 가능한 한 투명하게 만들라. ⑥ 작업 결과가 번역의 결과임을 노출시켜라(그렇다고 작업 위에 누가 번역했다고 꼭 써넣으라는 것은 아니다). ⑦ 이런 사항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번역은 권력이 전달되는 통로에 그치거나 자의적인 구성에 빠질 수 있다. 이는 번역의 윤리에 어긋난다. 그의 작업 <자본=창의력>은 이렇게 하여 보이스의 작업을 자문화의 언어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자문화 자체도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 작업이 된다.50)

‘만남주의’를 표방하는 작업들 역시 일종의 문화번역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 혹은 ‘동서의 만남’ 같은 당대의 이슈들은 최소한 극단적인 복고주의나 근대주의의 양극단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식으로든 문화 변용을 의식하고 번역의 긍정적 가능성을 모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문화번역을 대하는 태도는 박이소의 그것과는 여러 점에서 다르다. 우선 만남주의 문화번역은 만남을 통해 양 대당(동/서, 전통/현대)에서 일종의 통합, 혹은 조화를 이끌어 내려 한다. 물론 이들도 양 대당 간의 문화적 차이, 간극, 틈새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에는 양자가 어떤 식으로든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한마디로 차이의 심연, 곧 ‘번역불가능성’ 내지 오역의 불가피성에 대한 성찰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 다른 지점은 만남주의에서 번역자의 위상이다. 만남주의에서 번역자는 통상 고도의 정신성으로 출현하곤 한다. 물론 만남주의 또한 번역자의 수행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경우 수행성은 양 문화 간의 차이와 어긋남으로부터 또 다른 제 3의 의미(차이)를 창출해 내는 세속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그것은 양 문화의 조화로운 통합 속에서 봉합되는 일종의 방법적 수행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수행성은 동어반복을 거듭하는 가운데 너무도 쉽게 허위의식에 빠져들곤 한다. 결국 만남주의의 문제점은 그 만남 자체의 고정성 혹은 폐쇄성으로 귀결된다. 오리엔탈리즘의 근본적 문제점은 앞서 지적했듯 타자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것보다는 자신과 타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타자를 특정한 방식으로만 고정시켜 바라보는데 있다. 만남주의는 이 고정성(이분법)을 해체하기보다는 그것을 승인한 채 일종의 초월을 시도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는 만남주의 번역이 오역을 절대화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도판 11] 박이소, <그냥 풀>, 종이에 먹, 1988

<그냥 풀>[도판 11]은 앞의 두 작업과는 결이 좀 다르다. 앞의 작업들이 문화번역 자체를 논제로 삼았다면, 이 그림은 그냥 문화번역을 실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번역은 좀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며 진행된다. 우선 작가는 소멸돼 버렸거나 소멸돼 가고 있는 전통51)이미지를 번역한다. 구체적으로는 사군자 이미지(굳이 특정 한다면 추사의 <부작란不作蘭> 그림)다. 여기서 번역대상은 타문화가 아닌 자문화다. 작가는 여기서 번역 대상(사군자)으로부터 오랫동안 그것에 부착돼 왔던 봉건적 요소들을 떨어버리고는, 그것을 당대 서민의 입지에 서서 그 어법으로 번역해낸다.52) 선비적 전통이 맥락을 얻어 현재화된 것이다. 이로써 소멸돼 가는 전통은 다시금 살아있는 전통으로 작동한다. 번역은 또한 다른 층위에서도 진행된다. 이 층위는 회화라는 매체의 층위다. 이 그림은 전통을 변용한 서민들의 서체(민간체?)의 어법을 확장하여 캔버스에 그려지는 서양회화의 장르 관습과 일종의 자기 수양을 위한 여기餘技적 산물인 사군자의 관례를 동시에 번역한다. 양자의 틈새로부터 번역을 통해 동양 전통회화도 서양 현대회화도 아니 새로운 유형의 회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냥 풀>은 이로써 전통과 타문화를 동시에 번역하고 현재화한 ‘동시대’ 회화로 자리 잡는다.53)

문화번역은 근본적으로 나(의 현재)와 나의 전통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 나-우리의 전통에서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54)실상 하나의 문화가 한 지역에만 적용되는 배타적 문화적 프레임에 갇혀있게 되면, 전달이나 번역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문화번역은 그 자체로 자신의 상황(성)=로컬리티에 근거해 또 다른 상황(성)으로 이어지는 보편의 자장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제국/식민의 틀을 벗어나 타문화와 자문화, 타자화된 자문화 그리고 현재가 상호 교차하고 횡단하는 세계화 시대의 문화번역은 이런 식으로 열려진 공간을 상정한다. <그냥 풀>은 이 공간에 위치해있다.

 

6.나오며

고향이 그립다(고향 회귀),

어디나 고향이다(타향 인정),

고향 타향 모두 낯설다(고향도 타향도 없고, 모두 고향이며 타향이다)

미술과 전통이 관계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다면적이다. 미술에서 전통을 되살리는 일 또한 꼭 의도적으로 전통 이미지를 활용하고 그것의 재해석과 현재화에 집중하는 유형의 작업에 한정할 수 없다. 미술은 미적 층위가 지닌 파괴력에 힘입어 기존의 감성체제를 전복하거나 그것에 문제제기하려는 활동의 소산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감각이자 언어이고 문화이자 세계관인 전통이 작가의 작업 과정에 개입하고 자신의 징표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수준과 방식으로 어떻게 개별 작품들에서 작동하는가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통의 요소가 그야말로 장기-지속하는 감각과 리듬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전통 이미지나 여타 전통 소재(민담, 설화 등)를 활용하여 전통을 재해석하는 비교적 전형적인 유형의 작업도 있다. 또한 기법이나 재료, 장르의 연속성 상에서 전통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전통에 대한 인식을 화두로 삼거나 전통적 사유에로의 지향성을 보이는 유형의 작업도 존재한다. 이 글은 때문에 구체적인 작업 과정에서 전통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구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또 어떤 전통 활용의 일반론 같은 것을 제시하려 하지도 않았다. 하긴 그럴 수도 없다. 단지 필자의 입장에서 주로 전통 인식과 관련하여 그것이 일제의 식민 이후 어떻게 왜곡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 인식과 이해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집중했으며, 특히 80년대 이후 미술사의 경과에서 전통 이해의 전환의 계기가 되었거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업들을 이 같은 전통 이해의 맥락과 관련지어 예시하려 했다. 그러는 가운데 직ㆍ간접적으로 전통이 미술과 관계하는 방식 그리고 구체적인 미술작업에서 전통을 활용하고 구현하는 방식들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 예시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근자에 들어 일군의 젊은 동양화 작가들은 자신들에게 ‘전통으로 강제된 전통’에 대해 강력한 의구심을 표명하고 탈출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 미학의 내부로부터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80년대 민정기의 작업은 죽어버린 전통이 죽지 않은 채 일상을 압박하는 정황을 탁월하게 드러낸 바 있다. 오윤은 기억을 통해 억압된 역사/전통을 발견하고 그것이 잊혀 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임을 전통적 조형 요소들을 활용하여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신학철은 제단화 양식을 활용하여 역사/전통의 거대함을 상상하는 가운데 그 재현 불가능한 거대함이 그야말로 재현 불가능하고 상상하기 힘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형상화해냈다. 최정화는 변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살아남은 억압된 전통의 생명력을 그 생명력을 내장하고 있는 사물들을 결집하여 제시함으로써 가시화해냈다. 박이소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문화번역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고, 타문화와 전통이 교차, 혼성, 횡단하는 상황 속에서 전통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다양한 탐구의 결과를 제시했다.

물론 주목해야 할 더 많은 작품들과 작가들 그리고 이슈들은 얼마든지 더 존재한다. 필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집어보면 우선 시간을 거슬러 적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재평가하고 재해석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박생광의 후기 작업들에서 엿보이는 성취가 그렇다. 민중미술에서 논의되고 실행된 ‘민족형식’이나 탈식민적인 전통해석과 관련된 작업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 역시 시급하다. 동양화 혹은 한국화 같은 소위 전통을 보증 받았던 장르들의 공과에 대한 좀 더 과감하고 심도 있는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근 ‘전통’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출현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55)그 밖에도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전통, 오리엔탈리즘, 근대성과 문화번역의 새로운 관점에 의해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는 명백하다.

박생광(1904-1985)

시인은 <거대한 뿌리>를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첫 문단에는 시인이 지인들의 앉음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스스로 앉음새를 고치곤 하는 모습이 나온다. 시인은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 하긴 ‘앉는 법’ 뿐이겠는가. 아마도 ‘서는 법’, ‘생각하는 법’, ‘나는 법’. 기타 모든 일상이 혼돈과 균열로 삼투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문단이 국가의 틀, 체제의 틀, 왜곡된 인식의 틀로 인해 전통이 이곳의 삶의 생동하는 윤리와 전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훼손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전통의 단절을 민족주의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일상의 불안정과 연결시킨다. 시인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억압되고 단절된 그리하여 육체와 삶 속에 무의식으로 잠겨있는 전통을 감지하고 기억하는 일은 이렇듯 삶의 현실이 요청하는 과제에 연계되어 있으며, 미래의 가치 지평을 근원적으로 형성하는 일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나는 오리엔탈리스트 비숍과 사랑에 빠졌다는 시인의 고백을 되새길 필요를 느낀다. 이 고백은 일종의 역설이다. 시인은 시적으로 극화된 타자(향)와의 사랑으로 고향의 위기를 논하려 한다. 고향과 타향의 위계가 사라지며, 결국 모두가 낯선 고향이며 타향인 경지에 이르려면, 고향을 너무 일찍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타자(향)가 계속해서 당신을 속일 것이다. 이는 이중화된 시각을 요구한다.56) 나는 미술이 전통을 기억하고 단절을 극복해 나가는 이 모든 도정에서 적절한 매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모색은 또한 감각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적실하고 풍요로운 미술을 이루는 바탕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 이영욱, 박찬경의「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은 2016년 10월 20일부터 11월 13일까지 인디프레스에서 열린《앉는 법》(기획: 이영욱) 도록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은 1주일에 한 편씩 총 4회에 걸쳐 크리틱-칼에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 연재글 목록

1. 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1)

2. 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2)

3. 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3)

4. 이영욱, 박찬경_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4)


46) 이 문단과 관련해서는 김용규, 「포스트 민족 시대 혼종과 틈새의 정치학: 호미 바바 읽기」, 『비평과 이론』, 10권 1호, 2005 봄/여름 29~33쪽을 참조할 것.

47) 그는 전지구적 문화 흐름의 다섯 가지 차원들, 곧 에스노스케이프ethnoscape, 미디어스케이프mediascape, 테크노스케이프technoscape, 파이낸스케이프financescape, 이데오스케이프ideoscape 사이의 관계를 탐사하여 이 탈구적인 질서를 확인하려 한다. 아르준 아파두라이, 『고삐풀린 현대성』, 현실문화연구, 2004, 60~61쪽 참조.

48) 정혜욱, 「문화번역의 사적 전개양상과 의의」, 『세계의 문학』, 2011 가을, 356쪽 참조.

49) 박이소는 70년대 유행했던 ‘전통의 현대화’니 ‘한국적인 것의 탐구’니 하는 논의 맥락에서 유래한 “전통과 현대의 만남‘ 혹은 ’동서양의 만남‘을 내건 시도들을 ‘만남주의’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표현하곤 했다.

50) 박이소 작업을 이 같이 문화번역의 맥락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해석한 글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김현도, 「두 겹의 지평-박모와 박이소의 학예경험」, 『동시대한국미술의 지형』, 학고재, 2009. 최규성, 『박이소 작품에서 번역과 문화정체성의 문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9.

51) 전통은 원칙적으로 현재까지 계승되어 남아있는 전통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상 언어에서는 전통이라는 용어가 문맥에 따라 완전히 사라져 버린 전통, 소멸해가는 전통, 변용을 통해 남아있는 전통 등 전통의 서로 다른 국면들을 지시하는데 쓰이고 있다. 전통이라는 용어의 일상어법으로 인해 야기되는 이 같은 혼란은 전통에 대한 현재의 빈약한 이해 수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52) 소멸해 가는 전통은 현재와의 연계를 상실하고 점차 사라져가는 가운데 한갓 과거의 현상이 되어 버리곤 한다. 이 경우 과거는 일종의 타문화로 변환된다. 타문화로서의 과거(자문화)의 번역은 이질적 타문화의 번역과는 약간은 다른 측면을 지닌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화번역의 기본 원칙, 번역불가능성에 근거한 새로운 의미 생산 가능성은 그대로 작동한다.

53) 김현도, 앞의 글, 118~119쪽 참조.

54) 이 부분은 정혜욱, 「주디스 버틀러와 문화번역의 과제」, 『비평과 이론』, 제 20권 1호, 2015. 봄, 144~147쪽 참조할 것.

55) 노재운이 시도하는 불가, 도가의 전통 서사와 미디어의 환상적 장치들을 교차시키는 일련의 작업이 눈에 띠고, 김상돈, 임흥순, 송상희, 조습 등이 한국 고대의 설화나 무속적인 상상을 한국근대사의 상처들과 연결 짓는 작업들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불, 이수경, 배영환 등은 꽤 오래 전부터 근대주의의 이면으로 배제된 ‘전통’을 중요한 코드로 사용해왔는데, 이에 대한 비평적 논의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56)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소설 『제2세대』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민족주의란 어떤 점에서 계급과 같다. 그걸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걸 가지고서 느끼는 것이다. 만약 민족주의를 주장 않거나 너무 일찍 포기해버리면 다른 계급이나 다른 국가가 당신을 속일 것이다.” 테리 이글턴,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 인간사랑, 2011, 43쪽. 여기서 이글턴은 민족주의의 효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궁극적으로 민족주의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로컬리티에 대한 강조가 동시에 전통/로컬리티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이는 이중화된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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