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위_‘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 또 다른 시작’

포스터 출처

빛나는 별이나 몽환적인 점묘법처럼 감성적인 관점이 아니라, 튜브형 물감 제조라는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인상파를 보고도 A.T. (Art & Technology)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무엇을 A.T.라고 해야 할까? 인간의 예술활동 중 자연법칙의 장악과 통제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간에서 A.T.라고 불리는 것은, 기술과 예술의 노골화된 만남이다. 수단이 목적에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조신하게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목적화 되어 맹목성을 띄기 시작할 때 우리는 ‘노골적’이라 한다. 다시 말해, 융복합은 원래 목적론이 아니라 수단론인데, E.A.T.는 마치 뤼미에르와 에디슨이 영화 촬영 기술을 두고 그랬듯, 기술과 예술의 만남 자체를 즐거워하고 축하하는 축제인 것이다.

노골의 축제로 입장하는 길목에 회전목마가 있다. 산업사회적 생산수단의 전형을 엉성하게 흉내낸 외형의 <뉴욕 찬가>는 “부품이 떨어져나가고 굉음과 연기를 내며 파괴”되는 거대한 작품이다. 주요 구성품 중 가장 눈에 띄는 자전거 바퀴는 대지와 자전거 사이를 부드럽고 안전하게 매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전통적인 회전기능을 한다거나, 뒤샹의 정지된 바퀴처럼 고고하게 개념conceptual을 제시하지 않고, 부조리 기계 속에서 자기파괴를 촉진시키는 톱니바퀴 역할을 한다. 이 초가속화된 감가상각에서 기계의 가치는 장기간의 생산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락하는 것이 아니라, 1960년 3월 17일 18시 30분부터 반시간에 불과한 시간 동안 역동적으로 자폭하며 자기 자신과 주인(팅겔리)의 몸값을 높인다.

몸값? 라우센버그는 ‘아이디어는 부동산이 아니다’고 했는데, <뉴욕찬가>는 급조된 부동산이자, 움직이는 동산이자, 놀이동산이다. 동/부동의 변증법은 1960년대적이다. 혹자는 1960년대를 위치이동changement de lieu의 시대라고 했다. 예컨대 학교에 있어야 할 학생이 길에 나와있는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1968년, 김구림은 미술관에서 한강으로 위치이동하여 이른바 대지예술을 펼치다가 구치소로 위치이동 될 뻔 했는데, 뉴욕 전선avant-garde의 예술가는 <아홉 번의 밤 : 연극과 공학>(1966)을 공연하기 위해 69기병대 무기고 ‘아모리’에서 군용 운송트럭을 위치이동 시켰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수도방위사령부 간의 기계적인 MOU체결과 나란히 두고 보면 재미있다!)

다른 한편, 미군 샌드위치 포장기술은 군납품 공장을 빠져나와 <은빛 구름>이 되었다. 떠다니는 전구인 <은빛 구름>의 위치이동은 르네상스 회화 속의 플라톤적이고 초역사적인 구름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구름을 통과하는 햇빛과 떠다니는 물 알갱이라는 물질성을 추출한 자연과학적인 구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960년대는 앞뒤로 산업사회와 정보사회가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보인다.

<변주곡 V>는 무용수의 움직임과 소리에 변주를 가져오고, 반경 1.2미터 내에 변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파드되(pas de deux)가 아니라 아되파(a deux pas: 두 발짝 거리에, 지근거리에)인 것이다. 아무리 현대예술이 형상의 빈곤이자 관념의 과잉이라지만 장 뒤퓌이의 <심장 박동 먼지>(1968)가 작동하지 않는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은 A.T. 축제를 망치는 주범이다.

스피노자를 따르면 최고의 인식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다. 칸트를 따르더라도 외적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을 잘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또 다른 시작’이라는 부제를 단 이번 전시는 문제적이다. 이제는 더는 차이를 동반한 반복이 아니라, 단절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이 아닌가? 혹은, 소개문에 적혀있던 “기계 시대의 끝”이라는 표현과 달리, 그 ‘끝’이야말로 계속 위치이동 중인 것 아닌가?

‘또 다른 시작’이 예컨대 백남준처럼 추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새삼스러운 만남만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면 지속성을 가질 수가 없다. 현실 속 장벽을 맞닥뜨릴 때 희망의 가능성을 추상으로부터 길어와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관건인데, 과학적인 개념 혹은 과학철학적 개념이 미학적으로 표현되고 예술적 깨달음이 과학적 통찰로 이어지는 쌍방 교환 없이는 아무런 유의미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기술과 예술에 대한 당대의 전지구적 담론을 집대성했던 1993년 대전 엑스포에서의 대토론회부터 MB정권 하에서 좌절된 어느 예술대학교의 U-A.T. 사업까지 잘 살펴보자. 한낱 축제였을 뿐이다. <뉴욕찬가>의 “brief noisy life cycle”(MoMA 보도자료)은 창조의 불(용접)로 시작하여 자기 파괴의 불로 끝난다. 에피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로의 이행을 기획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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