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표범_퍼포먼스 아티스트를 위한 계약서

안녕하세요, 흑표범입니다. 블록버스터 전시 행사들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한편 행사 속 개개인들에 대한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작가로 살아온 지난 십오 년간 공기관과 대형 행사들에서 여러 문제들을 경험해왔습니다. 그리고 미술계의 개개인들이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특정 개인이나 전시/조직 등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아티스트로서 직접 겪은 문제 상황들을 통해 예술계 구성원들의 인권 향상과 평등 문화 발전을 위한 계약서 조항의 근거 사례로서 작성하였습니다.

근거 사례를 통해 세운 계약서 조항들은 기존 미술계 전시 계약서 약 스무 개를 재편집하여 초안을 작성하고, 다시 열 분의 예술가, 기획자, 비평가, 공간 운영자, 변호사, 변리사, 디자이너,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자문과 도움을 거쳐 실효성 있는 계약서로 최종 완성되었습니다. 협력해주신 김종휘, 로위에, 류한길, 백경태, 안민혜, 장현준, 장홍석, 하장호, 홍태림, 이도진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누구나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하실 수 있도록 PDF와 워드 파일의 다운로드 링크(http://www.black-jaguar.com/31.html)를 공유합니다. 퍼포먼스 아티스트뿐 아니라, 미술 전반의 구성원 모두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미처 다루지 못한 다양한 필요 조항들은 각각의 작성자 스스로 더해주시고,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 맞게 변용하시어 자기만의 계약서로 활용해주시면 더욱 의미 깊을 것 같습니다.

* 다만 본 계약서는 비엔날레 및 대형 행사, 국공립 기관과 개인 작가의 전시 계약을 위해 작성된 것으로, 개인 기획자나 독립 공간, 민간 행사 등과의 계약에 맞지 않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 “퍼포먼스 아티스트를 위한 계약서”(부적지에 주먹_73x223cm_2018) 드로잉을 2018 유니온 아트페어 D동 3층 유니온 X 섹션에서 동시에 전시합니다. (유니온 아트페어: 9.28-10.7_성수동 S factory, D동_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2가 273-13)

근거사례

제6조 (A의 의무와 권리)

5. A는 B를 포함한 모든 퍼포머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며 작업할 수 있는 제반 사항을 마련해야 한다.

5-1. A는 B를 포함한 모든 퍼포머가 분장 등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냉난방 시설을 구비한 대기 공간을 마련해줄 의무가 있다.

: ① A 비엔날레에 참여했을 때 주최 측은 지역 소수자들이 직접 두 개의 대형 전시관과 그 사이 야외 구간을 이동해 다니는 참여형 퍼포먼스를 요청했다. 이에 퍼포먼스 시작 전에 미리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분장과 리허설 및 퍼포먼스에서 사용할 각자의 오브제도 손볼 준비 공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주최 측에 설명하고 공간을 받기로 몇 달 전부터 합의했다. 당시 영하의 날씨였기에 야외 퍼포먼스 전후로 퍼포머들의 몸을 녹일 공간이 절실했는데, 개막 전날 저녁 갑자기 공간 예약을 못 했으니 인근 다른 건물 복도에 있는 오픈 카페를 사용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니 당일에 공간을 예약하려 하니 당시 국가 행사가 열리는 시기여서 이미 모든 공간이 예약된 상태였던 것이다. 큐레이터가 추천한 카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열려있는 공간이라 분장을 하거나 의상을 갈아입을 여건이 아니었고, 오브제를 만들거나 리허설을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참여자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문을 닫을 수 있고, 따뜻하고, 전기와 테이블을 사용할 수 있는) 준비 공간을 어떻게든 구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변경에 대한 사전 고지가 없었음에도, 큐레이터로서 본인은 대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는데, 이 말은 작가와 참여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처사였다. 이런 여건에서 퍼포먼스를 하기 어렵다는 항의에 대해 큐레이터는 그럼 내일 퍼포먼스를 취소하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당시 계약서 상 작가는 계약 해지나 실연 취소의 권리가 없었고, 오히려 합의한 일정을 지키지 않으면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고, 그 경우 작가보상금, 작품제작비, 교통비 및 일비, 기자재 비용 등 일체의 경비를 전부 작가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근거사례

제6조 (A의 의무와 권리)

5. A는 B를 포함한 모든 퍼포머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며 작업할 수 있는 제반 사항을 마련해야 한다.

5-2. A는 작품의 특성을 전제로 관객 안내 및 동선의 설계에 대해 B와 협의할 의무가 있다.

5-3. A는 작품의 시간과 장소, 동선 등 원활한 작품 관람을 위한 기본 정보를 온라인을 통해 홍보하고, 현장에서 관객에게 고지할 진행의 의무가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 방안은 A와 B가 협의하여 정한다.

: ② 야외 공간까지 활용해달라는 주최 측의 요청에 따라 퍼포먼스를 설계했지만, 관객 안내가 없어 야외 구간 퍼포먼스 관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관객들로부터 안내가 없어서 어디서 대기할지 몰라 엉뚱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진술을 들었다. 다음날 주최 측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관객이 동행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안내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오히려 별도의 안내가 없는 것이 의도된 큐레이션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는 합의되지 않은 큐레이터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결국 뒤늦은 요청이 받아들여져 남은 일정 중에는 안내가 개선되었다.

근거사례

제6조 (A의 의무와 권리)

5. A는 B를 포함한 모든 퍼포머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며 작업할 수 있는 제반 사항을 마련해야 한다.

5-4. A는 B에게 작품 장소 주변에 위치한 다른 작품들의 설치 조건에 대해 고지하고 협의하여, B의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 작품의 영상 및 사운드를 조정하여 B가 의도한 표현과 관객의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 ③ 비언어적인 소리들을 발산하며 비엔날레 곳곳을 이동하다가 최종 퍼포먼스 장소에 도착했다.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공감하고 연결하기 위해 서로의 소리와 몸짓을 실시간으로 피드백하는 퍼포먼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참여자들이 각자의 스탠드 마이크 앞에 원으로 둘러 서고, 그 가운데로 내가 들어가 탈의를 하는 동안, 바로 옆에 위치한 다른 작품의 소리가 매우 크게 울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소리는 공교롭게도 여성의 목소리라서 마치 한 작품인 것처럼 들렸고 실제로 많은 관객들이 그렇게 오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참여자들은 옹알이, 흐느낌, 방언 같은 비언어적이고 비체적 소리를 의도한 데 반해, 옆 작품에서는 한 여성이 구체적인 내용을 서술하는 언어적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기 때문에 관람과 실연 모두의 집중에 큰 방해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리 주변의 사운드 작품들을 체크하였고 모두 퍼포먼스 시간 동안 볼륨을 줄여줄 것을 주최 측과 합의했지만 이 작품만은 당일까지 포장이 된 채로 사운드가 오프 되어 있어서 사운드 작품인지 알 수 없었고, 담당 큐레이터가 사전에 고지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날 기록한 영상에도 주변 작품의 소리가 크게 녹음되어 다시 추가 기록을 진행해야 했다. 그 후 주변 사운드 조정을 다시 요청하여 남은 일정에서는 주변 볼륨 조정 및 추가 녹음 여건을 협조받을 수 있었다.

근거사례

제6조 (A의 의무와 권리)

5. A는 B를 포함한 모든 퍼포머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며 작업할 수 있는 제반 사항을 마련해야 한다.

5-4. A는 B에게 작품 장소 주변에 위치한 다른 작품들의 설치 조건에 대해 고지하고 협의하여, B의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 작품의 영상 및 사운드를 조정하여 B가 의도한 표현과 관객의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6. A와 B는 어떠한 경우에든 서로를 포함하여 모든 퍼포머가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위계적인 언행을 하지 않는다.

6-1. A와 B는 서로를 포함하여 모든 퍼포머의 신체를 허락 없이 터치하지 않으며, 퍼포머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

: ④ B 아트 페어에서 열린 기획전에 퍼포먼스로 참여했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관객과 등을 마주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서로의 등받이가 되어주는 퍼포먼스였다. 퍼포먼스가 펼쳐진 공간은 아트 페어 한 켠에 위치한 테라스 공간을 전시장으로 이용한 곳이었다. 수많은 굿즈와 작업물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는 복잡한 전시장 가운데 퍼포먼스 장소를 배정받았다. 작가로서는 퍼포먼스에 집중할 수 있는 보다 한적한 공간을 바랬지만, 기획자의 의도에 의한 제한된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몇몇 방문객들은 옆에 서서 퍼포먼스와 전혀 관련 없는 말들을 크게 떠들었고 행사장 전체에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와서 퍼포먼스에 조용히 집중하기가 힘들었고, 불특정 다수가 내 옆을 지나치거나 너무 가깝게 서 있는 게 느껴졌지만 눈을 감고 있는 퍼포머는 매우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래서 두 번 째 퍼포먼스를 하기 전 제반 여건에 대해 조정을 요청했다. 먼저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공간의 스피커 볼륨을 조정해주길 요청했는데, 장비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안전을 위해 의자와 퍼포머의 몸체를 벽을 향해 방향을 약간 조정하려고 했는데,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 큐레이터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 공간에 놓인 모든 디피가 큐레이션이고, 퍼포머의 몸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이유였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 이유에서도 스스로의 신체를 결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은 퍼포머를 행위 주체가 아닌 도구적 존재로 취급한 처사였다. 퍼포머가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이상 그를 사물이나 도구처럼 대하는 것은 퍼포머의 신체와 인격을 통해 이루어지는 퍼포먼스의 특성을 간과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근거사례

6. A와 B는 어떠한 경우에든 서로를 포함하여 모든 퍼포머가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위계적인 언행을 하지 않는다.

6-2. A와 B는 서로에게 술자리 등 사적인 접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6-3. A와 B는 서로에게 업무 내용이 아닌 용건으로 늦은 밤이나 취한 상태 등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연락하지 않는다.

: ⑤ C 비엔날레에 참여했을 때, 담당 커미셔너는 부친의 지인이자 모교 교수였다. 행사 기간 중에 그와 인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이튿날 나는 퍼포먼스 발표가 있어서 그날 밤 촬영팀과 회의가 잡혀 있었고, 그가 자기 호텔 방에서 술을 더 마시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연말이 되어 새해 안부를 전하는 단체 문자를 보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고, 그날 포장마차를 언급하며 자신이 내게 술을 따른 횟수보다 내가 그에게 따른 횟수가 적었다면서 싸가지가 없다, 네가 잘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라는 위협적인 말들을 퍼부었다. 당시 그는 거의 모든 심의에 참여하는 결정권자였고 두 시간 가량의 언어폭력이 지속됐다. 다음날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어제 술에 취해 있었다며 사과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다.

근거사례

7. A는 본 작품의 저작자인 B의 예술적 견해와 창작의 권한을 존중한다.

7-2. A는 B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성을 보호하여야 하며, B가 외압에 의한 권력적 침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할 의무가 있다.

: ⑥ D기관이 운영하던 공모전에 선정되어 전시 지원을 받게 되었는데, 공모에 제출했던 작품계획을 선정 이후 변경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당시 퍼포먼스 장소로 계획했던 곳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장소였다. 원래 구상은 이곳에서 정오의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욕하는 퍼포먼스 필름을 촬영하는 것으로, 과거 같은 장소에 있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변경 요구를 받고, 작품의 의도가 퇴색되지 않는 선에서 수정한 2차 계획을 제출했지만, 퍼포먼스 장소를 바꾸라는 구체적 요구와 함께 그러지 않을 경우 예술이 아닌 정치 행위로 간주하고 지원을 철회하겠다는 압박이 돌아왔다. 이에 지원을 포기하고, 게릴라 형식의 퍼포먼스를 진행하였지만, 퍼포먼스 당일에도 D기관의 신고로 관할 구청이 퍼포먼스 시작 전 출동해 퍼포먼스 오브제를 수거하는 등의 제지가 있었다.

근거사례

7. A는 본 작품의 저작자인 B의 예술적 견해와 창작의 권한을 존중한다.

7-2. A는 B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성을 보호하여야 하며, B가 외압에 의한 권력적 침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할 의무가 있다.

: ⑦ E재단의 사업에 참여했을 때, 예술가의 시선에서 사업의 성과와 의미를 아카이브하는 팀에 포함되었다. 팀원 각자의 관심 주제로 활동 계획을 세웠고, 나는 사업에 참여하는 여성 예술인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특히 육아를 하고 있는 여성 예술인의 시선에서 사업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흥미로운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예술인 팀들과 인터뷰 계획을 발표하고 재단 담당자로부터 별도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 사업에서 페미니즘 활동을 하면 안 된다며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나는 다양한 예술인의 시선 중 하나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아카이브 하는 의미임을 설명했다. 직원은 내가 인터뷰하려던 팀 중의 하나인 ‘00연합’ 팀 인터뷰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당시 한 보수 정치인이 본 사업에 참여하는 모든 예술인들의 정보를 요청했다며 좌파 예술인들을 색출하려는 거라고 하며 정부 추진 사업과 갈등 관계에 있는 그 팀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사업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결국 그 팀을 인터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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