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민_BLACK: 검은색을 통해서 어렴풋이

황재민

1819년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는 ‘귀머거리의 집 Villa of the Deaf Man’이라 불리던 작은 주택을 구매한다. 고야는 1824년 프랑스 보르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 집에 거주하면서 14점에 이르는 벽화를 그렸는데, 유명한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Saturn Devouring His Son>와 <개 The Dog>와 같은 작품이 바로 이 벽화 중 일부이다. 제 자식을 집어 삼키는 신의 모습이나 어딘가 파묻힌 것처럼 머리만 힐끔 나온 개의 모습처럼, 음침한 색조와 어두운 분위기로 잘 알려진 우울하고 폭력적인 형상들은 후일 ‘검은 그림 The Black Painting’이라는 별칭을 얻는데, 몸과 마음이 상한 늙은 거장이 은둔하며 그려낸 그림들은 악몽 같은 스산한 풍경을 재현하면서 보는 이를 실존적인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 연작이 다름아닌 ‘검은 그림’이라 불린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검은색은 불길한 색이자 악몽의 색으로서 종종 악역을 맡는데, 그림의 재현적 기능과 서사적 기능이 제 역할을 하던 시기에 ‘검은 그림’은 이처럼 음울한 그림의 별칭으로 적절했다. 그러나 ‘검은 그림’으로부터 약 한 세기가 지난 뒤, 검은색의 쓸모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1913년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는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을 제작했다. 텅 빈 캔버스 위에 검은 사각형의 형태로 물감을 올린 이 작품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절대적 상징으로서 내부로부터 완결된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가능성을 뜻한다. ‘회화의 영점’으로서, <검은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아이콘이자 종교적 성상Icon이 되어 시각적 형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그 안료로 쓰인 검은색 역시 추상의 영역에서 특별한 지위를 확보한다.

그러나 모더니즘, 그리고 그와 관계했던 미술이 점차 힘이 빠질 때쯤 <검은 사각형>은 종종 농담의 주제로 승화, 혹은 격하되었다. 특유의 간결한 형상이 지니는 대표성이 전유 대상으로 최적이었던 탓에 그림은 수많은 영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 중 애드 라인하르트 Ad Reinhardt는 이 ‘검은 그림’에 직접 대응하는 화면을 만들어내어 “궁극적 Ultimate” 회화의 문법을 다시 사고하고자 했다. 애드 라인하르트는 ‘유사-<검은 사각형>’을 제작한 다음 ‘추상 회화 Abstract Painting’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덧대는 것으로 절대주의 회화가 초래한 추상 형식에 대해 비평적으로 작동하는 그림을 만들어내려고 했는데, 이 유사-화면은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검은 화면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절반은 유희적이고 절반은 비평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검은색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지만 온전히 검은색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검은색에 대해 다루는 일은 이처럼 역사의 특정 순간 이후, (그림에서의) 검은색 위로 퇴적된 상징적 지층을 보다 섬세히 고려한 결과다. 그림에 적용이 가능한 모든 색채들은 나름대로의 중력을 갖지만, 검은색이 화가에게 제공하는 무게는 종종 빨간색이나 초록색, 파란색과는 사뭇 다를 때가 있다.

박정혜의 그림 <Dear, Drops> 역시 인상적인 검은색을 가지고 있다. 그림의 한 켠에 자리 잡은 검은 얼룩은 거의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온전한 검은색이 아니다. 그 끄트머리에서는 검은색이 아닌 전혀 다른 색채들이 흘러내리며 은근슬쩍 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런 장치는 그림 속 검은색이 사실 착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의 모든 그림에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지만, 박정혜 또한 검은색을 둘러싼 모종의 이야기를 의식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 때문에 얼룩은 어느 정도 박정혜의 그림이 형성되는 방법을 함축한다. 말하자면 이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동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일로 만들며 고려해야만 하는 여러 힘을 유연하게 상대하면서 모종의 중간 지점을 가설하는 방법처럼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구상도, 추상도 아닌 화면은 서로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참조하면서 ‘구상이 아닌 것’이자 ‘추상이 아닌 것’으로 (미)완결된다. 가능과 불가능, 의미와 무의미의 언저리를 떠돌며, 정물화가 아닌 정물화들, 풍경화가 아닌 풍경화들은 가늠할 수 없는 현재를 관찰하고 담아내는 일을 위해 쓰이면서 일시적인 장면을 캔버스 위에 남기고 사라진다. 우리가 검은색을 통해서 어렴풋이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서로를 극복하거나 비평하는 선형적 서사가 아니라 이처럼 임시적인 순간에 불과한데, 박정혜가 그려내는 화면 역시 이 순간의 문법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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