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화가 최민화의 민족, 민중, 민주주의

홍태림(미술비평, 크리틱-칼 발행인)

1980년 5월, 전두환의 계엄군이 민주화를 외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은 세대를 초월하여 많은 이들의 가슴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을 남겼다. 최민화1)도 이 충격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 7월에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린 서울 현대미술제2)에서 <시민>을 출품하기에 이른다.3) <시민>은 전두환의 계엄군이 광주에서 벌인 학살을 다룬 입체 작품으로 광주시민을 극사실적으로 만든 후 일부러 파괴하고 예비군복을 입힌 다음에 한쪽은 빨간색, 다른 쪽은 파란색을 칠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업이 광주학살과 관련된 것을 안 국가안전기획부는 결국 <시민>을 강제로 압수 및 철거했다.4) 광주 학살과 <시민>의 강제 압수 및 철거. 최민화의 1980년대는 극심한 혼란과 좌절이 뒤범벅된 상태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방황하던 그는 1982년에 현대미술의 중심지라 불리는 미국과 민중예술 운동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멕시코로 떠난다. 최민화는 미국과 멕시코에서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LA 웨스트모어랜드 거리에서는 퍼포먼스 <TV>를 그리고 멕시코의 엔세나다에서는 퍼포먼스 <제3세계 소녀의 부탁에 대하여>를 수행했으며 만화를 통한 사회참여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5) 그런데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최민화가 이렇게 연이어 퍼포먼스를 수행한 것은 의아한 일이긴 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 당시에 최민화가 회화의 무용론이나 폐기론 따위를 염두에 두고 퍼포먼스에 주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는 왜 퍼포먼스에 종종 관심을 보인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최민화가 작성한 「퍼포먼스의 필요성에 대하여」를 참고해볼 수 있다.

“매체의 활용, 설치 등이 동원된 종합적 방식,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열악한 전시조건과 상업적인 구조에 관한한 무방비에 가까운 내적 조건으로 인하여, 최소의 경제력으로 최대의 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해 때때로 게릴라 화가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제도를 갖지 못한 상태, 또는 제도화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제도가 필요하다면 ‘정규’를 활용하는 ‘유격’이어야 할 것이다.”6)

한편 최민화가 퍼포먼스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만화의 경우에는 귀국 후에 더욱 심화되어 1984년에만 <불법체류자>(자유실천문인협회지 1집-민족의 문학 민중의 문학), <손무덤>(자유실천문인협회지 3집-노동의 문학 문학의 새벽), <묵시-1-핵무기 숭배>(시대정신 2권) 그리고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구금되게 만든 <세 오랑캐> 등이 그려지기에 이른다.7) 이 당시 그는 만화를 통한 사회참여와 소통에 대해서 논하는 글인 「삶의 무기로서의 만화」(1984)와 「대중의 만화-그 존재 기반과 방향」(1984)을 쓰기도 했다. 이중 최민화의 「삶의 무기로서의 만화」를 읽어보면 비판적 리얼리즘에 대한 그의 평가가 시사만평 이야기와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좌) 시대정신 2권에 실린 최민화의 <핵무기 숭배>, 우) 시대정신 3권에 실린 최민화의 <황제>

“예술이 비판적 리얼리즘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그 형상의 전달이 그로테스크 일변도로 전락한다든가 참담한 아우성만을 그려낼 때, 곤혹스러운 대중은 그 난감한 장면을 피해 즉흥적 소비문화와 향락적 퇴폐로 도피한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것이 시사만평이다. 시사만평은 보편적으로 단순한 선과 풍자성을 형식으로 하고, 시사를 소재로 하여 그려진다. 그러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만평의 주인공만큼 대중과 낯익은, 그리고 존중받는 존재도 드물다. 만평의 주인공은 화려하지 않고 공들여져 있지 않다. 웃기면서 동시에 시사의 핵심을 선사할 뿐이다”8)

‘형상의 전달’과 ‘그로테스크 일변도’, ‘참담한 아우성’이라는 부분에서 신학철의 <한국근대사>연작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 시기에 최민화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깊이와 포용성을 얇게 만든다고 보이는 미술운동에 강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최민화는 이 당시의 미술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떠한 가치관을 통해서 바라보았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1980년대의 민중적 민족미술과9)10) 최민화의 연관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민화는 1984년에 서울미술공동체(이하 서미공) 창립에 가담하고 이어서 1985년에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에 참여하며 민중적 민족미술을 경험한 바 있다. 서미공은 시각예술이 갖고 있는 가치를 계발하여 참다운 민족문화 및 현대문화에 대한 기여와 자유로운 창작의 제약에 대한 투쟁, 민중의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방안을 모색하며 기존 문화운동을 비판적으로 계승 및 확대해 나가겠다는 방향성을 추구했다.11) 그리고 서미공의 회원 손기환, 박진화는 이러한 방향성을 바탕으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展(이하 힘전)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는 광주항쟁과 노동운동에 대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 출품되었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 측으로부터 전시장 봉쇄와 작품 강제 철거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참담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한편으로 미술인들이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1985년에 현실과 발언, 서미공, 광자협, 두렁, 임술년 같은 소집단들이 모여 민미협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민미협에 가담한 각 소집단은 큰 틀에서 기존 사회에 대한 비판과 폭로에 주목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을 방향성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열의 지적대로 1980년대 미술운동은 이미 1983~1984년 사이에 전시장 미술과 현장 미술을 기준으로 현발, 임술년 대 두렁, 땅, 지역 청년학생집단 등으로 이념과 노선의 분화가 심화되었다.12) 이러한 이념과 노선의 분화는 힘전 사건 이후 민중적 민족미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연되었지만, 이 시기에 무림-학림 논쟁, CNP 논쟁13)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민미협에도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 혁명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잠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혹여 그랬다고 하더라도 민중적 민족미술 안에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균등히 내재되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서미공의 취지문과 민미협의 창립선언문을 살펴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 보다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지분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최민화가 관계했던 미술 단체들 내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잠재되었다면 그 잠재성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중적 민족미술 자체가 이미 민족의 가치를 전면으로 내세운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도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볼셰비키 당 역시 조국이라는 용어를 도입하며 소비에트 애국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웠던 것14)을 생각하면 민족과 사회주의의 공존은 현실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도 민족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공산당은 1926년에 6·10 만세 투쟁에 참여하여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임을 내세우며 독립된 민족국가라는 기치를 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았다.15) 이처럼 우리는 조선공산당의 궤적을 보더라도 민중적 민족미술이 민족, 민중16)뿐 아니라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도 얼마든지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민화, 6월 Oil on canvas, 60.6×72.7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최민화, 눈물, 1986, Oil on canvas, 113x198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최민화 외, <그대 뜬 눈으로>, 1987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시대에 민족주의는 미술계에서만 중요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80년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미주의와 연결되며 사회 전반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일제의 강제합병과 외세를 통한 해방,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구도 속에서 발생한 남북 분단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을 겪으며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했다는 역사적 패배감과 민족적 부채감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패배감과 부채감은 조국 근대화와 반공 및 친미를 내세운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계속 증폭되었다.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는 특히 미국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통해서 민족주의가 강화되기도 했다. 남한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강대국이라는 점에서 잠재적 우군으로 여겨지던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에 광주학살이 일어난 이후 미국이 한미연합군사령부를 통제한다는 점과 더불어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그를 대통령이라 공인하는 상황이 뒤섞이면서 남한의 반미주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폭발했다.17) 그리고 이러한 폭발은 1980년대 한국의 미술운동에서도 거의 동일한 강도와 맥락으로 일어났다.18)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강화된 반미주의는 한국의 1980년대 미술운동에도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최민화의 1980년대 그림들 중에서도 반미주의 요소가 드러나는 그림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소련을 상징하는 모자를 쓴 사내 옆에서 큰 식칼 같은 것을 들고 성조기 모자를 쓴 남성이 그려진 <통곡>(1983)이나 갓난아기가 담긴 요람을 들고 가는 성조기 모자를 쓴 인물이 그려진 <6월>(1983), 마찬가지로 성조기 모자를 쓰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국인이 그려진 <이석규 열사 부활도>(1987), 동학농민군 뒤에 펼쳐진 성조기가 있는 <통일염원도>(1987), 오른쪽에는 성조기가 왼쪽에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을 상징하는 적색기가 꽂힌 농지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박힌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린 최민화가 그려진 <눈물>(1986), 이한열 열사의 손아귀에서 성조기와 얼굴이 뒤섞인 인물이 발버둥 치고 있는 <그대 뜬 눈으로>(1987)가 반미주의 요소가 드러나는 그림들이다.

최민화, 사생아, 종이에 연필 소묘, 1980

앞서 말했듯 민미협은 비판적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가능성을 내재한 민중적 민족미술을 지향했다. 이런 측면 때문인지 최민화의 1980년대 화집들 속 그림들에는 비판적 리얼리즘과 관련된 요소는 꽤 드러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관련된 요소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의 그림 중에 사회주의의 흔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예로 <사생아>(1980)를 꼽아볼 수 있는데, 이 그림에는 화살과 낫이 몸에 박혀 피를 흘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의 몸에는 한일 강제합병이 있었던 1910년의 화살, 제주 4.3학살이 있었던 1948년의 화살, 한국전쟁이 있었던 1950년의 화살,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있었던 1961년의 화살, 유신정권의 긴급조치가 시작된 1974년의 화살이 박혀있다. 화살뿐이 아니다. 이 인물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공군의 자폭 전술을 뜻하는 ‘神風’이 적힌 천을 몸통에 두르고 목에는 ‘I♡NY’이 적힌 천과 십자가 목걸이를 차고 있다. 그리고 머리에는 성조기로 만든 리본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이동외과병원을 소재로 한 미국의 전쟁영화 및 드라마의 제목인 ‘M.A.S.H.’가 적힌 천이 씌워져 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어깨에는 사회주의에서 농민을 상징하는 낫이 깊숙이 박혀있다. 이처럼 <사생아>는 한반도의 역사적 패배감과 부채감을 의미하는 주요 상징들이 한민족을 상징하는 청년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고 있다. 특히 낫이 어깨에 박힌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나아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된 소련에 대한 분노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여 특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렇게 <사생아>의 낫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하다 보면 최민화가 특정한 리얼리즘에 경도되어 자신의 창작을 이끌어나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닿게 된다. 실제로 최민화와 몇 차례에 걸쳐서 1980년대의 미술운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는 특정 리얼리즘에 대해서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민화가 반복, 강조한 이야기는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근대인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근대사회에서 개인은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정립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민화가 근대를 통해서 민족과 민중을 사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미협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열망이 내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1985년 이후로 최민화의 창작에 직접 영향을 준 것이 없다고 봐야 한다.

최민화는 스스로 고백하듯 내전으로 남편과 아내를 잃은 두 남녀가 만나 이룬 가정에서 태어난 뼈아픈 내력이 자신의 요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분열과 단절된 모든 현상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거부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19) 여기서 최민화가 말한 ‘분열과 단절된 모든 현상’은 제국주의로 인한 민족분단과 허울뿐인 반공을 내세우며 민중을 억압, 착취하는 군사독재 정권과 다를 바 없다. 이 외에도 민족분단과 민중의 억압에 대한 최민화의 분노는 그가 「문화제휴와 현대미술」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모멸하려거나 굴복시키려는 반민중적 존재”20)라고 적은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 글에는 이러한 분노가 미술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근대문화는 제국주의에 대한 즉발적인 저항의 실천을 그 내용으로 하여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구속력을 문화창조의 원동력으로 삼은 자의 미술만이 진정한 우리의 근대미술이다.”21)

최민화, 이 치뜬 눈으로, 1983, Oil on canvas, 193.9x112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이처럼 그는 민족, 민중을 바탕으로 시대적 구속력에 맞서 창조적으로 저항하는 근대미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최민화는 1980년대에 여러 그림을 통해서 민족과 민중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적극 드러냈다. 가령 한민족의 분단과 내전이 민중에게 남긴 상흔과 고통을 강렬하게 표현한 경우는 <분단의 피>(1981)와 <이 치뜬 눈으로>(1987)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과 싸우는 민중을 다룬 그림은 화염병을 든 청년이 그려진 <꽃병을 들며>(1985)와 한쪽 가슴이 잘린 상태로 붉은 피를 가득 흘리면서도 침착한 표정으로 소총을 들고 한곳을 응시하는 나체의 여성이 그려진 <오월>(1987)을 꼽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민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최민화의 민족주의는 어떤 민족주의라고 봐야 할까. 최민화가 보여준 궤적을 반추했을 때 그의 민족주의는 침략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저항적 민족주의라 불러야 마땅하다. 또한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한 한조상론이나 생물학적 측면에서 가족을 확대 재생산한 한가족론 같은 민족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는 민족주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최민화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한반도의 모든 민중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열망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이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화가의 윤리 감각이 민주주의로 통제되고 단련되는 과정을 통하여 진정으로 기약하려는 것은 참다운 민족문화의 건설과 건전한 국민양식의 정립이기 문이다.”22)

한편으로, 민족과 민중의 연쇄와는 다르게 민족과 민주주의의 연쇄는 의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민족과 민주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실현은 그 실현을 가로막는 대내외의 장애물을 극복함으로써 가능해지며 이러한 극복의 의지가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의 행동 원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사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통합적인 관계다.23) 또한 한국에서는 이미 박정희 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급조된 민족적 민주주의를 부르짖기도 했으며 1960년대에는 『사상계』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여러 차례 다루기도 했다.24) 따라서 최민화가 1980년대에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주목한 것은 박정희 체제 전후로부터 계속 논의되었던 흐름을 생각하면 낯설 이유가 없다.

최민화는 이처럼 민족, 민중,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아우르며 1980년대를 근대 미술가로서 돌파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가 1980년대에 보여줬던 많은 그림들은 그러한 돌파 속에서 태어난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민화가 1980년대에 드러낸 돌파력은 온전히 그의 염원과 포개지지 않았다. 우리는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 김대중 사면 및 복권, 시국사범 대거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내용이 담긴 6.29 선언을 쟁취했다. 그러나 87년 체제라 불리는 이 결과물은 어긋난 세계를 한 번에 바로잡는 만능약일 수 없었다. 우선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직선제를 통해 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희망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갈등으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되면서 참담히 무너졌다. 87년 체제의 중요한 결실인 대통령 직선제가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되었을 때 최민화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절망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25) 사실 최민화가 이렇게 절망에 빠진 이유는 단순히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국한되지 않는다. 분명 87년 체제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그러나 87년 체제는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운동과 제도권 정치가 분리되면서 운동의 중심세력이 민주주의의 제도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다.26) 이러한 87년 체제의 한계들을 처절하게 경험한 최민화는 자신의 사명감을 허탈한 마음속에 쑤셔 넣고 피와 죽음이 넘쳐났던 투쟁의 현장을 잠시 떠나게 된다. 한편으로 이렇게 투쟁의 현장을 떠나서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지옥과 다를 바 없었던 지난날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그동안 놓쳐왔던 것들, 잃어버린 것들 그리고 다시 가슴 속에 채워야 할 것들을 되새김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87년을 지나면서 최민화의 그림은 이영욱의 평대로 격렬한 자기표출 없이 강한 회고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과거를 돌아보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냈다.27)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그의 분홍 연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최민화,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 1989, Oil on canvas, 162.2×130.3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최민화, 부랑아, 1990, Oil on canvas, 87x184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최민화, 붉은갈대, 1993, Oil on canvas, 142x400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최민화의 분홍 연작은 양아치와 부랑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199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전조는 나체 상태로 실신한 청년을 양쪽에서 끌고 가는 진압경찰이 있는 <어느 무명청년의 죽음>(1987-1989), 꽃이 핀 나무 옆에서 회한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잠이 든 청년이 있는 <꿈Ⅰ>(1989), 황갈색 빛이 들어오는 큰 창문을 배경으로 최민화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감상자를 응시하는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1989) 등에 스며든 묘한 분홍색을 통해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분홍색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최민화는 합정지구28)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분홍색을 쓰는 이유를 하나로 단정할 수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1980년대 시위현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보통 시위대는 좌파나 빨갱이라고 하고 파쇼나 극우 이런 애들은 백색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저는 학생들, 시위대와 같은 편인 빨간색인데, 적인 백색 파쇼 세력들이 하얀 최루탄을 쏜다는 거지요. 붉은 무리 속으로 적들의 흰색이 와서 팡 터지는 건데, 빨간 우리는 이 상황을 포용함으로써, 그러니까 붉은색이 고통을 이겨내고 괴로운 상황을 견뎌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흰색 파쇼를 이겨낼 것이다. 이런 자기최면을 걸어두는 거지요.”29)

최민화, 다시 지옥에서, 1991, Oil on canvas, 56x71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이처럼 최민화의 분홍색이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한가운데에서 투쟁했던 그의 강렬한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측면에서 분홍 연작은 87년 체제의 실패에 대한 심리적, 역사적 반응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사실 최민화 특유의 분홍색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앞서 언급한 <어느 무명청년의 죽음>, <꿈Ⅰ>,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보다 더 이전에 나타났다. 가령 흰색 방패를 든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을 뒤로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초록색 소주병과 나란히 있는 남성을 분홍색을 중심점 삼아 표현한 <6가>(1980)와 분홍색으로 물든 거리와 투쟁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노란색, 붉은색, 초록색, 흰색이 거칠게 뒤섞인 한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 <황불Ⅱ>(1981)이 그러한 경우다. 따라서 최민화의 분홍색은 온전히 87년 체제의 실패를 기점으로 발현된 것이 아니라 1980년 초반부터 이미 고려되어왔던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6가>와 <황불Ⅱ>의 분홍색은 1980년대 후반부터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 분홍색과는 다른 질감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분홍색은 기본적으로 최민화가 지옥과 다를 바 없는 1980년대를 객관적으로 되뇌는 과정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민화, 황불Ⅱ, 1981, Oil on canvas, 50x100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한편 87년 체제의 결과가 실패였다고 하더라도 민족,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최민화의 열망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것이었다. 최민화가 사용하는 분홍색은 되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완으로 남은 자신의 열망을 분홍색 안에 보존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투쟁의 현장을 떠났던 그가 1991년에 <고 김봉환 열사 부활도>(제작: 최민화, 이수남, 양상용, 정태원, 김용덕), <고 김귀정 열사 부활도>(제작: 최민화), <고 강경대 열사 부활도>(제작: 최민화, 양상용, 이진석 외 학생)30)등을 그리며 다시 투쟁의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991년은 1990년의 3당 야합이 이뤄진 이후 경제 파탄과 노태우의 공안 통치가 일상화된 시기였다. 그러던 중 학원 자주화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여한 강경대가 백골단의 폭력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경대의 죽음은 1987년 이한열의 죽음이 일어났던 상황과 교차되며 수십 개의 대학과 단체가 살인 정권 퇴진을 외치는 규탄대회를 여는 방아쇠가 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대학가에서는 노태우의 공안 통치에 항의하기 위한 분신자살과 경찰의 강경 진압 속에서 벌어진 김귀정의 질식사, 박창수의 의문사가 이어졌다. 이처럼 1990년 초반의 정세 속에서 최민화의 열망은 분홍색 속에 똬리를 틀기도 전에 “적의 손에서 학살의 피가 마르기 전에 선전하라”31)는 외침과 함께 작업실 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한편 이 시기에 최민화는 분홍색을 가투의 현장으로 끌고 나오기도 했다. 김귀정이 대중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춤을 추는 듯한 <고 김귀정 열사 부활도>(1991)가 바로 그것이다. 이 부활도는 투쟁만이 강조된 기존의 부활도와 달리 역사와 시대를 예리한 서정으로 아우르는 최민화 특유의 조형성이 분홍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왜냐하면 이 부활도의 분홍색은 최민화의 열망과 죽음에 대한 슬픔이 대립하지 않고 극적으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최민화가 분홍색을 사용한 그림 중에 <고 김귀정 열사 부활도>가 미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고 김귀정 열사 부활도>의 경우 최민화 단독으로 제작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부활도의 경우처럼 개인창작이 아니라 집단창작물이다. 그리고 이는 이한열 부활도 <그대 뜬 눈으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1980년대에 부활도 제작자가 1인으로 기록되는 경우는 공권력에 유린되는 희생자를 줄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계승한 한국대학생총연합회가 소련이 해체된 이후 개인주의, 소비문화, 대중문화가 폭발한 한국사회 안에서 대중성과 방향성을 점점 상실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90년대 초의 사회운동은 87년 체제의 실패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민화의 열망도 다시 분홍색 속으로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항심을 상징하는 분홍색 기타를 치는 <분홍-기타>(1990)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도려내진 하얀 기타를 치고 있는 청년들이 그려진 <하얀 기타>(1994)의 대비, <분홍-기타>에서 기타를 치던 청년들이 서구의 말초적인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들과 분홍 공간에서 뒤섞인 <카페-포르노피아를 위한 습작>(1995)을 통해서 그러한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그라짐은 한편으로 회화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가능케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 것 같기도 하다. 전시를 통해 발표된 최민화의 실험적 연작만 헤아려 보더라도 대량으로 복제, 배포, 판매되는 브로마이드 위에 서양 미술의 대표 매체인 유화로 한국의 상고사(上古史)를 유희한 상고사 연작(2003년, 대안공간 풀), 야만과 결여로 점철된 20세기를 잡지나 화보에서 선택한 사진을 실사 출력한 후 그 위에 유화를 기묘하게 덧그은 20세기 연작(2007년, 아르코 미술관), 특정 도상들이 20세기의 주요 회화 양식들을 통해서 반복되는 20세기 회화의 추억 연작, 그리고 분홍이 백화(白化)된 공간 속에서 방향이 없는 예리함과 쓸쓸함이 뒤섞인 21세기의 청춘들을 그린 회색청춘 연작 등 다양하다.

최민화, 롹커에게, 2006, Oil on canvas, 162.5x400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87년 체제 이후 개인주의, 소비문화, 대중문화가 폭발했고 97년 체제 이후 정치와 경제는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중은 점점 정치적 올바름, 정의, 민족에 대한 울혈을 품은 초월적인 존재와 포개지기 어려워졌다. 87년, 97년 체제가 만들어낸 급류는 그 누구도, 어떤 세대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것이다. 특히 21세기의 청년세대는 이 급류 앞에서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등으로 호명되며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철저하게 찢겨나가고 있다. 따라서 현 청년세대는 X세대와는 또 다른 질감으로 사회변혁과 민족을 부르짖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이들의 전장은 거리가 아니라 냉소, 자기계발, 인정투쟁, 먹고사니즘 등을 머금은 자신의 내면이거나 인터넷 게임 속의 수많은 전쟁터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최민화가 자신의 열망과 연결점이 사라진 청년세대를 바라보며 분홍을 걷어내고 백화된 색만을 남긴 회색청춘 연작을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32) 이는 회색청춘 연작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는 <롹커에게>(2006)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그림은 회색청춘 연작에 속하는 <전철역Ⅰ>(2006), <어느 무명 예술가의 초상>(2005), <청춘-Ⅰ>(2005), <롹커Ⅰ>(2005), <봉천 3동Ⅱ>(2006), <압구정동>(2005), <대로Ⅰ>(2006), <알바>(2005) 등이 한 화면 속에서 재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회색청춘 연작과 관련된 요소 외에도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무장한 시민군이 군용차량을 타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그린 것과 심통한 표정으로 담배 피는 남자 뒤에서 피도 흘리지 않고 홀로 서 있는 이한열 열사, 분홍 연작에 속하는 <붉은 갈대>(1993)에서 등장했던 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청년들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락커에게>는 회색청춘 연작과 관련된 요소와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 그리고 87년 체제의 실패를 되뇌는 분홍 연작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어우러짐은 더 이상 1980년대와 같은 울혈을 가슴 속에 채울 수 없는 21세기의 청년세대와 그러한 청년세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 대한 최민화의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인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좌) 금강, Oil on bromide, 90x60cm, 중앙)무사, Oil on bromide, 90x60cm, 우) 나한, Oil on bromide, 90x60cm

물론, 최민화는 회색청춘 연작의 경우처럼 자신의 열망과 괴리된 현실을 차갑게 읊조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상고사 연작의 경우처럼 소비문화, 대중문화가 폭발한 사회와 근대성, 민족성을 예리하게 연결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대중문화 이미지가 담긴 브로마이드에 유화를 덧씌운 <분홍-21세>(1992)나 <분홍-마돈나>(1992)에서부터 예감된 상고사 연작은 대량으로 복제, 배포, 판매되는 브로마이드 위에 서양 미술의 대표 매체인 유화로 한반도의 상고사를 되뇐 것이다. 민족,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최민화의 궤적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그의 시도는 회색청춘 연작 이상으로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2003년에 상고사 연작이 발표되었을 때의 반응들은 정유경이 『문화과학』에 실은 글에 잘 정리가 되었는데, 가령 성완경은 상고사 연작을 두고 최민화가 특유의 미칠듯한 순수의 서정, 증류, 솟구쳐 오르기, 열혈남아, 양아치, 무림, 영웅적 순수를 잃었기에 길을 잃었다고 보았다.33) 사실 상고사 연작은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최민화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와 국내 미술계가 일본과 미국의 제국주의, 분단과 내전, 개발독재를 거치며 근대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탈근대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세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최민화는 화가로서 시대적 구속력에 저항하는 근대미술을 정립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상고사 연작을 시작한 것이다. 한편 상고사 연작은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 외에도 왜곡된 민족주의에 내재된 위험성과 관련지어서 살펴볼 측면도 있다.

사실 우리의 상고사는 1975년의 국사 되찾기 운동이나 1980년대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통해 본격적으로 다뤄지면서 민족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투사되었다. 특히 환단고기는 오늘날에도 학계, 교육, 정치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존재감을 강렬히 드러내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과장된 상고사가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이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세기에 파시즘이 낳았던 광기를 떠올리면 국수주의 역사관이 낳을 잠재적 위험성은 결코 적다 할 수 없다. 실제로 1990년대에 과장된 고대사 교육을 통해서 노동운동의 와해를 조장한 다물민족학교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이런 유사 역사가 한국사회에서 실체가 있는 위험요소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과장된 상고사는 2013년 즈음에 청와대와 국회를 거치면서 다시 맹위를 떨쳤다. 당시 청와대는 박근혜의 광복절 축사를 위해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고사 정립 방안을 마련하라는 방침을 정부에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2013년 6월부터 국회에 설치된 동북아역사 왜곡 특별대책위원회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은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발언을 꺼리지 않기도 했다.34) 이러한 상황들은 『자유』의 유사역사가들이 반공, 냉전사관에 있지도 않은 민족사를 끼워서 박정희의 군사독재 정부에 부역했던 과거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길한 징조이기도 했다.35) 그리고 이 불길한 징조는 결국 군부 쪽에서 구체화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군기무사령부가 비폭력을 내세운 촛불집회를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며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방안’을 구체적으로 준비한 사건을 떠올려보자. 이는 사실상 정부가 국헌문란 및 내란을 획책하여 한국사회를 다시 군사독재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를 맞이한 지도 17년이 넘은 시점에 이러한 계획이 정부 차원에서 기획되었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상고사 연작은 이러한 퇴행성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할 때 재개되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최민화의 상고사 연작 재개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쩔 수 없이 시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상고사 연작의 본 의도는 근대미술을 정립해야 한다는 최민화의 사명감에 있지만 말이다.

최민화, 혁거세, 2014, 종이 위에 유채, 102.5×117.5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최민화, 조선진(朝鮮津)-공후인, 2014, 종이 위에 유채, 112x118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근래의 상고사 연작은 얼핏 보아도 2003년에 발표되었던 상고사 연작과 일부 구별되는 점들이 있다. 근래의 상고사 연작이 과거의 상고사 연작과 구별되는 점은 브로마이드가 아니라 종이나 화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한반도의 전통 요소뿐만 아니라 서양의 회화 양식과 힌두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색들이 아름답게 조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후기 상고사 연작은 과거에 비하여 이러한 문화의 혼성이 더욱 강조된 것일까. 그 이유는 최민화가 평소 서구 중심의 감성체계와 동양적인 것, 서구적인 것의 구별 때문에 인류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협소해지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사실 후기 상고사 연작에서 드러나는 혼성문화는 신라가 598년부터 중국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와 인도, 서역으로부터 공작, 앵무새, 구관조, 물소, 낙타 등의 동물과 향료, 약품 등을 받아들여 일본에 증여하기도 했으며 8세기 이후에는 교역상인, 무용수, 악사 위주로 구성된 페르시아인, 소그드인, 아라비아인과 교류하기도 했다는 점에서36) 역사 차원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37) 이런 측면에서 후기 상고사 연작은 전기 상고사 연작을 단지 형식적인 차원에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류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식민화되는 세태에 대한 저항과 여전히 국수주의적 피해의식과 전체주의의 망령을 뒤쫓는 이들에 대한 시의성 있는 비판까지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최민화, 천국보다 낯선, 2007, Oil on canvas, 90.9×72.7cm,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지금까지 민족, 민중,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최민화가 그동안 그려온 궤적을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분명 민족,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최민화의 열망은 87년 체제를 거치면서 서서히 사그라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홍 연작 이후의 여러 연작을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최민화가 지금도 고군분투하며 추슬러 낸 열망을 통해서 현재와 이어질 미래와 고요하면서도 치열하게 마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열망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침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의 물결 위에서 민족, 민중,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 관계가 가능할 때 최민화의 열망과 최민화의 그림들은 이 세상에 더욱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최민화는 앞으로도 더욱 치열하게 현재와 이어질 미래와 마주하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그가 그려온 그리고 그려갈 그림들이 온당히 존재하는 세상이야말로 허무와 절망보다는 희망이 더 많은 곳일 테니까.

 

*이 글은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제18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전 <최민화: 천 개의 우회>(2018년 9월 4일 ~ 12월16일)와 관련하여 출간된 도록에 실린 글을 일부 보강한 것입니다.

 


1) 본명은 최철환이며 민화(民花)는 그의 아호(雅號)다. 이 아호는 1982년에 미국에서 소설가 황지강(본명: 전진호)이 지어줬다.

2)최민화는 이 전시가 미협에서 주최한 전시라고 진술한 바 있다. 최민화, 홍태림 대담, 2018.6.7, 대구미술관

3) 최민화, 『분홍: 최민화』, 도서출판 나무아트, 2014, p.173

4) 합정지구, <#1 최민화 인터뷰>, 합정지구 페이스북 페이지, 2016.5.13, https://www.facebook.com/hapjungjigu/photos/a.663045220472956.1073741828.662699047174240/862281187216024/?type=3

5) 최민화, 『분홍: 최민화』, 도서출판 나무아트, 2014, p.173

6) 최민화, 「퍼포먼스의 필요성에 대하여」, 『민족미술』, 1993.7, 민족미술협의회, p.20

7) 앞의 책, p.173

8) 최민화, 「삶의 무기로서의 만화」, 『현실과 발언: 1980년대의 새로운 미술을 위하여』, 열화당, 1985, p.173

9) 이 용어는 1991년에 최열이『민족미술의 이론과 실천』에서 1980년대 미술운동을 정리하며 사용한 바 있다.

10) 민중적 민족미술은 ‘민중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이라는 지향점과 유사한 용어라 볼 수 있다. 이영욱은 민중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을 “민중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민족적 삶의 연속성에 기반하되 그들의 삶의 지각 방식에 기반한 그리하여 삶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작품/산물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해설하기도 했다. 이영욱, 「미술운동의 현재와 우리들의 자세」, 『민족미술』 11호, 민족미술협의회, 1991, p.84 참고.

11) 김종길, 「1980년대 사회변혁론과 미중미술 Ι」,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 2012, 현실문화, p.86 참고.

12) 최열, 「1980년대 민중미술론의 기원과 형성」, 『미술이론과 현장』 제7호, 2009, 한국미술이론학회, pp.36 참고.

13) CNP는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주의혁명),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주의혁명),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주의혁명)의 약자다.

14) 민경현, 「러시아 혁명과 민족주의」, 『사총』 59권,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4, pp.5-25

15) 윤석수, 「3.1운동 70주년 기념특집-민족해방투쟁의 주체와 성격을 새롭게 밝힌다 조선공산당과 6·10 항일시위운동」,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89, pp.96-118 참고.

16) 민중적 민족미술에서 ‘민중적’은 어떤 맥락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까. 이남희는 민중이 기존의 군사독재, 재벌, 외세 등과 관련된 사회, 정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사람이지만 억압에 저항해 일어날 수 있는 역사의 진정한 주체이며 민중 담론의 대표격인 공장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자영업자나 군부의 민족주의적 요소까지 민중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가변적 개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민중이 붙은 미술은 한반도의 특수한 체제 속에서 억압에 저항했고 저항해나갈 모든 이들의 현실을 예술가와 민중이 창조적 노력을 통해서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남희, 『민중 만들기』, 후마니타스, 2015, pp.28-29 참고.

17) 앞의 책, pp.191-200 참고.

18)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미주의가 강화된 것과 더불어 다른 한 축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한 자주민족투쟁위원회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같은 NL(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 조직이 민족자주화 및 조국통일 운동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19) 최민화, 『들풀』, 청년사, 1985, p.39 참고

20) 최민화, 「문화제휴와 현대미술」, 『그대 뜬 눈으로』, 한강미술관, 1988, p.27

21) 앞의 책, pp.27-29

22) 앞의 책, p.28

23) 이택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과 통합」, 『사회과교육』 제34호, 한국사회과학교육연구회, 2001, pp.11-12 참고.

24) 황병주,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근대화 담론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8, pp.269-286

25) 당시 그의 절망은 남은 인생동안 다시는 현실정치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기에 이를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최민화, 홍태림 대담, 2018.6.7, 대구미술관

26)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pp.118-127 참고

27) 이영욱, 「최민화의 작업에 대하여」, 『최민화 분홍 연작집』, 미술문화, p.32 참고

28)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합정지구는 2015년에 개관한 비영리 예술공간이다.

29) 합정지구, <#1 최민화 인터뷰>, 합정지구 페이스북 페이지, 2016.5.24, https://www.facebook.com/hapjungjigu/posts/868103906633752

30) 편집부, 『민족미술』, 민족미술협의회, 1991, p.26

31) 김준권, 「91‘ 오월투쟁의 한 길에서」, 『민족미술』, 민족미술협의회, 1991, p.4

32) 또한 최민화가 회색청춘 연작을 진행하던 2005년 전후는 유월 항쟁을 주제로 한 <전사>(2007)에서도 이례적으로 분홍색을 거둬내고 탈색된 색을 사용한 때이기도 하다. <전사>는 최루탄에 피격당한 이한열과 태극기 앞에서 웃통을 벗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쳐들고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외치며 달리거나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청년들 그리고 최루탄 연기에 괴로워하는 한 청년이 어우러진 그림이다. 이렇게 6월 항쟁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조차 탈색된 색이 사용된 것은 시기나 형식 측면에서 회색청춘 연작과 연속성이 생긴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바라볼 지점이 있다.

33) 정유경, 「‘시적 영역’과 ‘윤리의 문제’가 다다른 막다른 골목-성완경의 신학철·최민화 읽기와 그 읽기에 대한 이재현의 읽기」, 『문화과학』, 문화과학사, 2004, pp.260-261 참고.

34) 진명선, ‘‘혼’(魂) 깃든 역사 교과서’, <한겨레21>, 2016.11.7,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2612.html

35) 김대현,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이상한 민족주의 -상고사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 『학림』, 연세사학연구회, 2018, pp. 255-284 참고.

36) 김창석, 『한국 고대 대외교역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pp.238-275 참고.

37) 물론, 통일신라는 상고사 범위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러한 역사는 국수주의적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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