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_쪼랩의 자각 ‘2018 SeMA 예술가 길드 만랩 萬Lab’

만렙: 하나의 게임에서 캐릭터의 최고의 레벨을 뜻하는 말. 유의어로 만랩, 최대레벨이 있으며 반의어로는 쪼렙이 있다.

올해로 4회차를 맞는 서울시립미술관 SeMA 예술가 길드의 부제는 ‘만랩’이다. 가득 차다라는 뜻의 만(滿)과 레벨(Level)의 합성어로, 온라인 게임 캐릭터 레벨이 최고점에 도달하는 상황을 이르는 게임 용어 ‘만렙(滿Level)’에서 착안하여 ≪2018 SeMA 예술가 길드≫주제와 부합하도록 부제를 정했다 한다. 본업인 예술활동 외에 인테리어 디자인, 시공, 출판 등의 부업 활동에 매진하며 살아가는 30~40대 작가 그룹 7개(곰 디자인, 괄호, 부업들/buup, 소쇼룸, 아워레이보, 제로랩, 화이트테이블 예술인 협동조합)가 본 전시에 초대됐다. “일만 가지 일을 수행하며 예술의 스펙트럼을 무한히 넓혀가는 예술가들이야말로 ‘만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획의 글은 다(多)영역의 길드로 위치 지어진 이들의 전문가적 면모를 암시한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만랩’보다는 ‘쪼랩’에 가까울 ’88만원’, ‘잉여’, ‘청춘’, ‘청년’의 수식어와 함께 호명되었던 세대론의 주체다. ‘대안’을 모색했던 기성과 차별되는 ‘신생’의 이름으로, 이들은 일련의 새로운 활동경향으로 2014~2015년에 걸쳐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신생공간 휘발론과 함께 이들에 대한 비준과 평가의 흐름이 한 차례 지나간 뒤인 2018년, 이제는 일명 ‘만랩’인가? 그렇다면 그 ‘레벨 업(up)’은 게임접속 시간 경과에 따른 병력의 보상인가? 전투경험으로 비유할 수 있는 전시횟수나 작업양 증대로 인한 능력치 증가인가? 아니면 새로운 버전 환경에서 주목받게 된 특정 유닛의 다른 별칭인가?

부업들

≪2018 SeMA 예술가 길드 만랩 萬Lab≫에 참여한 컬렉티브 그룹중 하나인 부업들/buup의 권용주, 이수성은 “이 일은 어디까지나 부업으로”라는 느슨한 마음으로 상호를 짓고 2012년부터 전시공간 디자인과 시공의 일을 시작했다. “한쪽이 본업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남은 쪽에서 부업을 맡아서 진행한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각종 자격증을 따는 등 자기 계발을 할 계획”이라는 이들의 인터뷰는 ‘만랩’의 숙련공에게서 기대되는 삶의 여유와는 분명 거리가 있어 보인다. 효율적 생산을 위한 자기 분화,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를 대상으로 하는 막연하지만 분투적인 노력의 계속은 고랩에 도달하지 못한 저랩의 생존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그룹을 콜렉티브로 묶어 그들의 본업과 부업의 수행 결과물을 그룹별 독립된 공간에 드러낸 ≪만랩 萬Lab≫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혼잡하다. 이 혼잡함은 시공과 디자인, 상품제작 등 다방면에 만능한 멀티플레이어의 팔방면으로 보여지기도, 예술가의 생존 전형이 담지한 과로상태의 기술이 되기도 한다. 자기규정의 확정으로부터 탈주한 혼잡성은 낱개의 요소로 분절되거나 집단으로 이합되기에 유연하다. 작가의 작업이 공간의 사적 기능과 관람객 개별의 소비취향에 따라 선택 접목되는 방식을 모색하는 소쇼룸의 작동은 그로 인해 상당량 유효해 보인다.

소쇼룸

김민경, 황아람으로 구성된 소쇼룸은 낱개가 모여 구성된 더미를 뜻하는 각각의 단어 ‘CO-‘와 ‘DECK’의 합성어인 ‘CO-DECK’을 키워드 삼아 그 동안 소쇼룸을 통해 보여주었던 벤치, 의자, 테이블, 선반, 단상 같은 오브제로 ≪만랩 萬Lab≫에 등장했다. 예전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에 쓰였던 이들 집기류의 모임은 이번 전시에서 다시 하나의 쇼룸을 구현하는 요소로 변주되어 기능하고, 관람객은 각 요소에 태그(TAG)형태로 깃든 정보값을 읽고 구매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는 김민경과 황아람이 참여한 ≪IN_D-EX : Index≫(2018.4.17-6.10 서울시립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에서 두드러진 ‘관람객의 셀프 큐레이팅’에 대응한다. 요소를 분할하고 균등화해 선택가능한 조합태로 만들었던 ≪IN_D-EX : Index≫의 전제 ‘전시의 모든 요소에 동일한 무게를 갖게 하기’를 위해 정보값이 소거의 대상이었다면, 에서는 정보값이 주요소로 등장한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아워래이보

오용택, 오유미, 이정형, 장준호, 정기훈, 최병석 등의 작가가 연대하는 아워래이보의 공간 작업은 겉보기에 미니멀리즘 추상조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노동자이기도 한 작가 자신의 ‘정보값’을 물성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그의 조각은 (타인의) 조각을 위한 좌대이며 (자기) 노동의 부산물로, 이를 쌓아 올린 형태조합태는 관람객을 미술 전시장에서 작업현장으로 유인하는 정보매개로 작동한다. 아워래이보는 A4 1장짜리 텍스트 페이퍼 를 통해 작업의 ‘정보값’을 심화한다. 다음은 그것으로부터의 발췌.

“전시장 양쪽에 하얀 덩어리들이 보이시나요? 라는 작업은 지금까지 아워레이보가 작업하여 다른 전시 현장에서 쓰고 남게 된 좌대들을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만든 설치 조각 작업입니다. 백색의 커다란 원형 좌대와 높게 설치된 박스형 좌대가 백색의 덩어리로 공간 속에서 하나가 된 듯 보입니다. 또 평소 전시장에서 쓰이는 좌대의 기능과 다르게 작동하는 것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조각에 지워진 서사를 배제하고 작가가 공간에 대응하는 태도를 부각하고자 했던 기획의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 (2018.3.3-4.8 아트선재센터)가 최근의 조각 경향을 보여준 대표적 전시였다면, 아워래이보의 작업은 시각적으로는 이와 유사하되 전시장의 물리적 공간환경을 너머 미술계 현실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매체의 서사를 공간에 이식한 면에서 크게 다르다. <좌대 위에 좌대 위에 좌대>는 좌대가 조각이 되고 그 조각이 다시 다른 조각의 좌대가 되는 모양으로 공간과 현장을 순환하며, 작가이자 노동자인 혼성 주체의 자각(自刻)일 것이다.

괄호

괄호의 신관수, 정명우는 가상의 전시 ‘fake texture’의 공간 디자인을 의뢰받은 테크니션으로서 주문자와의 간격을 좁혀나가는 몸의 움직임과 수반되는 언어 등의 행위를 퍼포먼스로 보여주며, 체화된 노동을 특정의 반복된 구호와 안무로 드러냈다. ≪예술가 길드≫가 매해 시도해온 시장 거래에서, 괄호는 동작의 난이도에 따라 금액이 상이한 퍼포먼스 영상을 관람객에게 판매함으로써 그가 기술자 또는 작가로서 참여해온 ≪굿-즈≫(2015.10.14-10.18 세종문화회관), ≪퍼폼2016≫(201.12.29-12.31 탈영역 우정국), ≪퍼폼2017≫(2017.11.1-11.5 퍼폼플레이스, 갤러리 호아드 등)의 생산·소비 작동양식을 지속하는 모습이다.

곰 디자인

강태오, 권의현, 변상환, 심희규, 이웅열, 장지운 등을 구성원으로 하는 곰 디자인은 전시장에 공간 연출과 설치에 필요한 공구와 도구를 연출해 두어 정돈되지 않은 전시상황을 연출했다. 이들은 또 무료 상담 프로그램인 ‘전시구현 상담 테이블’을 통해 작품 제작이나 전시 설치, 공간 연출 등을 위한 노하우, 기술, 경험을 관람객과 공유하고자 했다. 스패너, 와펜, 에코백 등이 ‘SeMA 예술가 길드 아이템 거래’에 등장했다. 김동훈, 장태훈이 운영하는 그래픽, 제품 디자인 스튜디오 제로랩은 여러 개의 철제 스툴을 보여주면서 최근 주력한 재료의 제작활동을 결과물에 담아 아카이빙하고 이를 판매했다. 김정모, 손종준, 신형섭, 이문호, 이상원이 중심이 된 화이트테이블협동조합은 작가별로 예술과 굿즈의 경계에 있는 작업을 선정해서 진열하고 판매해서 아트숍 형태에 충실한 면면이었다.

의뢰자의 주문제작을 소화하는 괄호식 노동이 복제 가능한 영상 작품-상품으로 치환되어 시장에 다른 가격선으로 거래되는 과정이나, 노동의 부산물인 자재와 공구가 예술의 선택적 정보값을 입은 굿즈의 대상이 되어 미술관에 투입되는 현상은 문화자본의 기제가 구사하는 전략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은 물론 예술과 노동, 경제와 문화가 혼잡한 버전에서 ‘만랩’으로 포섭된 그들의 행보를 지켜볼 때다. 비판이 결여된 포퓰리즘의 장을 경계하는 ‘쪼랩’의 자각을 직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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