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제현_질환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시각적 안내문

2006년 출간된 정치 서적⟪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객관성과 전문성의 결손을 이유로 학계로부터 처형을 당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치세력의 투쟁사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좌파의 맹공은 해당 서적을 역사적 징후로 읽는 메타적 접근에서부터 통계 데이터의 오류를 짚어내는 수리적 분석, 역사 인식에 대한 이념적 반박까지 총체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견고했던 근대사를 유동적인 것으로 녹여버렸다. 좌파들의 ‘논리적’ 대응 덕에 식민사관의 신화적 금기는 해제되어 누구도 이견을 견줄 수 없던 불가침의 인식이 당위에 대한 이론적 반박을 허용하고 잠정적으로는 전복 가능한 사상적 금지로 변화된 것이다. 이윽고 뉴라이트의 근대화론은 피지배 국가의 통한과 울분, 불구가 되도록 훼손당한 민족적 정기와 얼, 절대적인 악으로서의 제국주의 지배와 같은 사항들을 경제적 발전과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손익계산서 안에서 주판을 튕기도록 시점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그 결과 ⟪재인식⟫은 전술적으로는 패배했으나 전략적으로는 승리를 거두며 역사 인식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주제와 동떨어진 위의 예로부터 하나의 견해가 추출되는데 과거가 본유적인 사실의 형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현재를 통해 개작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는 과거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정치적으로 조직될 수 있는 상호교차적인 범주라는 것이다. 삶이 현재 속에서만 영유 되고 있다는 착각은 언어의 분절, 직관, 주관적 관념으로 인해 생성되는 시제적 환상에 가깝다. 과거는 현재를 통해 얼마든 진동한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린 동시대 미술이 특수한 관점에서 과거를 다시 쓰고 있음을 보고 있다. 20세기를 유토피아적 수사를 활용해 대중을 기만하고 권력에 예속시켰던 시기로 정의내리거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념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시민을 희생시켰다는 문구를 미술관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면 장님일 것이다. 와중에 가장 유행하는 서술이라면 미증유의 폭력으로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는 일련의 진술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이때 미궁에 빠진 동시대 미술의 짙은 혐의 하나가 떠오른다. 트라우마를 수집하고 진열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미학적으로 인수한 뒤로 작품은 문예적인 접근만으로는 온전히 식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비평적 간파를 위한 수사는 정신분석학적 언어로 대체되었다. 작업 내부에서 근대가 자신을 어떻게 짓눌렀는지 일관되게 서술하는 환자들을 보라. 그들은 외상적 사건의 정황들을 능란하게 묘사한다. 병인이 내과적이라면 진술은 다소간 경청할만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정신과적 범주라는 데 있다. 때문에 텍스트를 불신하는 태도가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외상적 사건을 자신이 직접 말할 수 있다는, 바로 이 지점이 수상쩍다. ‘그들은 너무 많이 말할 줄 안다.’ 대개의 관람자는 이 미술에 속고 마는데 이는 관람객이 역전이의 마수에 걸려들었음을 뜻한다. 그때 환자들은 관람자를 자기의 언어 속으로 채집하고 자신의 증상이 된 관람객을 즐긴다. 당부하건대 분석가는 거리를 유지하라! 작업의 증상을 대하는 일은 우리가 그의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내용적인 결여를 무의식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쳐들어간다면 게임 속에서 증상이 되어버린다. 때때로 환자들은 증상을 만들어내기에 사적인 이입은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원인이 현상과 일치한다면 지식은 불필요하다는 마르크스의 경구처럼 원인과 증상이 일치한다면 분석은 비평적 위상을 갖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원인이 20세기로 은유 되는 포악한 정치라고 호소하는 전시장의 동시다발적인 아우성에 대해 한 가지 가설을 제기해 볼 것이다. 혹시 동시대 미술이 반근대적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섭식하는 와중에 신체화 장애somatization disorder1)라는 질환을 앓게 된 것은 아닌가? 의심이 옳다면 미술은 위의 논거와 부합하는 병리적 기제를 형성한다. 이때 증상은 신체로 나타나는 직접적인 통증이 아니라 호소 그 자체가 된다. 신체로-즉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가假증상이다. 그들은 실로 물리적인 진통을 체험한다. 그러나 원인은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적 확신 속에 있지 않다. 통증은 원인적인 사건의 중핵을 덮으려는 방어기제일 수도, 억압적인 우회일 수도 있다. 호소 자체를 증상적 담화로 여기고 접근해야 한다. 증언, 기억, 회상에 의존하는 말들은 증상이란 점에서 모조리 물화되어있기에 이 언어들의 형식적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만이 관람객을 적절한 진단으로 이끈다.

기억이 물화되어 있다? 기억은 고유한 정체성을 보증할 내재적 관념이 아닌가. 분하게도 그렇지 않다. 개인 내부에서 단일한 시간 서사를 가다듬는 기억은 외부에서 조성되어 공간적인 전도를 거친 뒤 내부에 파종된 비자발적 단자이다. 그 증거로 우리는 마치 트라우마처럼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상연되는 작자 미상의 기억에 때때로 시달린다. 이와 같은 기억의 형식이 사물과 조우하는 우연적인 상황들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인 심급에서 배포되고 있다면 어떨까. 알브바슈의 말대로 주체가 속한 집단이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낸다면 동시대 미술은 그 의도에 부합한다. 개인과 사회가 불가분한 시대에 사전에 기억하고 망각할 대상을 선별하는 작업이 수행되고 있다면 기억은 착란과 사실 어디쯤에서 부유하며 그저 귀띔으로, 암시로, 삽화로, 유행으로 제조되었는지 판단 불가능한 허구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주체에게 일관된 환상을 암각하기 위한 상상적 구조물이 아닌가? 시간에 대한 사유가 주체화의 원리라면 이때 주체는 객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란 고전적 테제는 한층 명백한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제반의 사유는 특정한 경로로 유도되고 구조화된 개인의 기억 내부에선 일말의 진리도 보증할 수 없다는 불온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니 동시대 예술이 20세기를 성찰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개인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만 작업을 구축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회가 특수한 서사를 내포한 집단적 기억을 양산하면서 구성원들의 의식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후회와 반성에 겨누어져 있다. 이는 곧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할 수 있는 여타의 시도들이 표백당하고 있음을 뜻한다. 때문에 작업의 무의식을(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분석한다는 일은 환자가 떠든 내용에 이입하여 진위의 함량을 달아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차원에서 사적인 기억과 인식을 주조하는 사회적 회로를 연역하는 것이 된다. 이제 분석은 모든 종류의 과거 기술을 형식상의 제문제를 가리키는 매개로 여기고 현재가 과거를 재구조화하는 사회적 패턴을 규명하는 데에 쓰일 것이다. 무형식도 형식이라는, 무협지에나 등장할 법한 어거지를 미술사 내에서 번복하여 미술사를 후려칠 심산이 아니라면 시대와 조응하는 미학적 양식을 갱신하지 못하는 동시대의 불임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처한 병리를 보다 객관적으로 진찰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거친 방법이 필요할 수 있다. 도의적 잘잘못에만 매달린다면 사건의 맥락을 분별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본주의가 단순히 경제 체제에 머무르지 않고 전방위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은 익히 안다. 이를테면 자본은 속류 신화적인 시공간으로 세계를 재편해 우리 삶을 정초하고 변모시킨 새로운 현기증이다. 신용도와 납기일이 카르마를 찬탈하고 휘두르면서 미래는 빚과 보험으로 쪼개졌다. 시간의 사막에 갇힌 우리에게 다른 유형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은 정치였으나 오늘날엔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로 쇠락해 무익하게 번복되는 의례가 되었다. 민주주의 선거는 어떤 의미에선 사회적 분열을 가속한다. 보자, 고대의 의례는 특수한 주체가 신화적 재현의 역할을 수행하며 최초의 사건에 담긴 창조적 원천을 부활시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의미를 가졌다. 집단의 존속을 위해 공통의 시간을 복기하며 우주의 운행에 대한 새로운 힘을 획득하는 고도의 정치적 종합이었고, 시공간의 축을 세움으로써 세계의 작동 원리를 터득하는 인식론적 행위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믿기 때문에 행했던 고대인과 달리 현대인은 믿지 않는 채로 별수 없이 선거를 치른다. 5년에 한 번 잉태되는 것은 조산이거나 사산된 형태의 정치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나날이 팽배해져간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채로 갱신 없는 갱신만을 반복하는 세계는 더 이상 어떤 정치도 없을 것이라며 우리를 극우라는 가장 최악의 선택지로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근대정치 앞에서 침묵했던 것들을 재-가치화하는 일체의 전략, 과거를 비난조로 발화하는 회고적인 작업들이 나돌고 있다면 예술이 아카이빙을 통해 개인의 아픔을 간증하는데 진력하는 일을 역사적으로 특수한 시기에 융통되는 기억 형식이라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를 기형으로 접골해 이종의 미래로 축지할 가능성을 억압하고 현재를 완전히 자연화하려는 지배의 수작에 이바지한다. 20세기를 광기만이 번들거리는 포악한 전제정치로 떠올리는 트라우마적 회상은 나 외에 다른 세계를 섬기지 말라는 지배의 1계명과 맞물려 돌아가도록 획책된 기억법이다. 동시대는 과거를 마음껏 반추할 수 있다. 오직 그렇게 기억하는 한에서만!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관이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은 기금이나 타 먹으며 환자들을 자판하라는 체제의 명령에 따라 정치를 박제하는 우익적 제스쳐에 가까운 것이다. 일례로 당분간 정치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모든 시도들은 국가주의적인 발상이라며 지탄받을 것이다. 객관적인 현실의 어떤 것도 변해서는 안 된다는 방식의 기억이 파수꾼을 자처한다. 역사의 수훈을 면밀히 선별하지 못한 채 신체적 증상만을 토로하는 환자들의 언술로 인해 결국 진단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아카이빙, 그것은 과거를 물화시키며 20세기의 유산을 제 입맛에 따라 갉아먹는 들쥐의 이름이다.

논의를 관념적인 헛소리로 뭉갤 생각은 아니기에 구체적인 임상 사례를 다루어 보겠다.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최근의 광주비엔날레가 가장 적절한 예일 것이다. 시리아 난민을 미국의 경제보복과 긴요하게 결착하는 일 없이 그들을 받을 국가가 없다면 화성으로 보내자며 문제를 공간적인 것으로 전치시키는 할릴 알틴데레의 <우주난민>, 벅민스터 풀러가 개입된 베네수엘라의 엘 엘리코이데를 향해 오줌발을 갈기면서 분수라고 능청을 떠는 알렉산더 아포스톨의 <카라카스 스위트>, ‘과거에서 느끼는 바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침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라며 그리티아 가위웡이 주제전에 표한 기대를 전면 박살내며 실향민을 이용해 미래를 석화시키는 카데르 아티아의 <이동하는 경계들>, 과거에 진저리를 치며 은밀한 외곽으로 겉도는 피야랏 피야퐁위앗의 <역閾공간>,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으로 인한 수감자가 캄보디아로 추방되는 정책에 윤리적인 난점만을 제기하며 관용 이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스튜디오 리볼트의 <앉으세요> 등을 보라. 심지어 이 모든 구술에 속아 작성된 허호정의 비평 ‘광주,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들’2)은 역전이의 모범적 사례라 할 만하다. 그녀는 그들의 아픔과 감정의 스펙트럼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길 요구하는 것으로 그칠 뿐인데 오직 아핏차퐁 위라세타쿤만이 탁월한 통찰로 <불가시성>을 제작하면서 상기된 작업들의 방법론으로는 원인을 시각화할 수 없음을 시인한다.

알렉산터 아포스톨, <카라카스 스위트>_이미지 출처

트라우마적 회상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허용돼선 안 된다.’는 윤리적 강박이다. 피해자의 사례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일은 그러한 사태를 만든 누군가의 폭력을 질책하는 반응으로 자연스레 인도한다. 이 당연하고 정의로운 교훈들을 당장 거부할, 대항력을 구상할 모든 수단들이 소실된 것이 어쩌면 작금의 곤궁이다. 폭력은 신화적 금기가 되어간다. ‘누구든 폭력을 행사하지 마라. 어찌됐건 폭력은 나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세계는 점차 궁지에 몰린다. 가시적 반폭력의 세계는 구조적 폭력을 싸고돌며 확대재생산한다. 인류가 정치를 억류하기 전에 아직 제대로 된 표준조차 구성하지 못했기에 빈곤, 실업, 난민, 공황, 테러, 전쟁 등 언어 자체가 화학적 독성을 가진듯한 이 악랄한 현상 일체가 지금의 세계에서 끊이지 않을 문제이다.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자칫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한 톨의 폭력이라도 발생할까 우려된다며 정치적인 주체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앞의 현상들은 방생의 자유를 누리며 영원히 인류를 좀먹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폭력의 신화는 국가적 부채를 후손에게 미루는 무책임한 행태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보다 나은 장소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을 후대에게 전가한 채 눈앞의 현실을 방조하는 위선이 되어버린다. 비폭력을 신앙처럼 고수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야말로 자신의 도덕적 과시를 위해 세계를 매음하는 악한이다.

스튜디오 리볼트, <앉으세요>_이미지 출처

따라서 동시대 예술의 위기는 지금 유행하는 재현의 방식으로는 정치를 회고하며 시공간의 축을 구조화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트라우마는 상상만을 끊임없이 표류하기 때문이다. 재현이 불가능하다면 공통된 인식도 불가능하다. 인식이 불가능하다면 역사를 사유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동시대 예술은 이 불가능의 선상에 위치한다. 과거를 마구 쥐어짜는 아카이빙은 객관적 상황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다는 데 대한 보상적인 수동공격성이다. 그것은 증상이란 점에서 진단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 해서 문화적인 형태로 배급되는 시간성에 동조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으면 증상으로서의 의미를 소실할 것이다. 자, 처방이 내려졌다. 신화적인 의례의 구조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처방이다. 이 노력은 산포된 기억에 의해 방해받는다. 그러나 예술이 할 일은 얄궂게도 시공간의 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특정한 제례를 수행할 주체를 찾는 일이다. 생성된 주체는 트라우마의 레이어를 통해 축조되는 반폭력의 신화적 금기를 금지로 끌어내리고 끝내는 전복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을 특수한 개인의 출현에 기댄다면 지나간 영웅주의에 대한 고약한 향수에 머무는 꼴이 될 것이다. 우리 시대에서 주체의 이름은 사회적 형식과 무관하지 않은 계급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간을 열기 위해 필요한 주체를 포착하기 위한 작업, 여기에서만 동시대 예술의 존재론적 근거가 제출될 수 있다.

 


1) 병의 원인이 내과적이지 않음에도 신체적 이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정신장애.

2) 허호정, ‘광주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들’, 크리틱-칼, 2018. 10.1, http://www.critic-al.org/2018/10/01/gwangju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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