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위_아트선재 퍼포먼스: 오민

<아트선재 퍼포먼스: 오민> 포스터, 출처

네가 빈정댔던 것과 달리 “인싸력”을 과시하는 공연이 아니었어. 조세프 풍상은 영문 교열 담당자의 이름이었어. 유명 작가의 이름을 잔뜩 나열해놓은 포스터에 비해 별 볼 일 없었다던 5월의 전시와는 전혀 결이 다른 형식 놀이였다니까. 제목 속에 있는 이름 중에 우리가 아는 이름이 몇이나 있었니? 그리고 네가 북서울미술관에서 집중을 안 해서 그렇지 사람들의 이름을 이용한 ‘이름’(Names, 2015)이랄지, ‘마리나, 루카스, 그리고 나’처럼 이름을 나열하는 제목을 가진 전작이 몇 편 있었기 때문에 그 연속성이 재미있다고.

공연장에 들어가니 연주자들이 이미 무대 위에 나와서 연주를 하고 있었어. 한국에서는 쉽게 듣기 힘든 프리재즈 같은 것이었어. 굳이 주네트의 파라텍스트 같은 예술이론 말고, 네가 좋아하는 마케팅 관점(소비자 경험?)에서 접근하더라도, 제목에서부터 극의 시작까지 꿈틀거리는 구석이 있어서 좋았어. 사실 오민 작가는 매우 진지한 것처럼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웃겨. 무표정으로 농담하는 사람들처럼.

제 1막은 작곡가 줄리아 울프의 <릭>의 실연이었어. 오민 작가가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충돌적 감각”이 이번 퍼포먼스의 출발점이었다고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릭>을 있는 그대로 연주한 것은 아쉬웠어. 음악의 구조를 수년간 연구해온 작가로서 <에튀드를 위한 에튀드>처럼 창작곡을 올렸어야 비로소 재미있는 공연이지 않았을까! <릭>에서 김택수의 재기발랄함이 연상되기도 했는데, 차라리 김택수의 곡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했어.

<아트선재 퍼포먼스: 오민> 파트 A, 아트선재센터, 2018, 사진: 옥상훈, 사진출처

어쩌면 선곡보다도 연주에서 실망한 것일 수도 있어. 작품 자체는 이를테면 20세기 초반부터 추상을 거듭하여 달랑 골조만을 남기는 놀이를 꾸준히 즐겨오던 나라에서 20세기 후반의 어느 후계자가 그런 요소들을 계승해 새로운 조합을 내놓은 것인데, 그날 본 연주에는 잡다한 건더기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구수한 누룽지 맛이 남아있었어. 관념적인 차원의 유희인데 목 근육과 몸 근육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컨템퍼러리하기보다는 풍물패처럼 느껴졌다. 예컨대 온갖 문화적 산전수전과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현대의 기운이 지방 노인회관에까지 뻗쳐있는 유럽과는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다르니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옷일 수밖에 없겠지.

제 2막은 연주자들이 퇴장한 무대를 정리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어. 너무 길어서 흥미진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민 작가 특유의 고요하고 느린 영상작품을 실물로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어. 하지만 제 1막처럼 제 2막도 너무 정직했다고 본다. 브레히트 시대에는 의미 있는 실험이었겠지만 지금은 21세기 하고도 십수년이 지났는걸! 응큼한 맛을 더할 무언가가 있어야 했어. 영상작품에는 몽타쥬와 사운드가 있으니 일정 정도의 시청각적 쾌락이 확보되었는데, 몽타쥬는 커녕 객석에서 꼼짝달싹 못 한 채 쳐다보고 있으려니 힘들었다.

초기작품인 <A Dialog>에서 오민 작가는 스크린의 2차원 평면 앞에서 기껏해야 좌우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상하로 뛸 수밖에 없었어. 다리의 맨살을 내보이는 하의실종 패션이라든지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깜찍한 새와 풍선도 그렇고, 관객의 지침을 기다렸다가 따르는 컨셉도 그렇고, 그때는 분명 소녀스러운 느낌이 강했어. 하지만 10년 만에 다시 관객 앞에 선 이번에는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공연장 공간 전체를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고 있었어. 제3막에서 오민 작가는 다른 안무가들과 함께 무대와 객석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알 수 없는 내적 논리에 입각한 알 수 없는 움직임을 이어가. 이제 관객의 지시를 받는다는 의미에서의 마조히즘적인 인터랙션이 아니라, 공간과 조명을 활용해서 어둠 속에 앉아 빼꼼히 눈만 내놓고 무대를 쳐다보던 관객의 감시자로서의 특권을 박탈해버리고, 극 속으로 관객의 몸 전체를 연루시켜 버리는 새디즘적인 인터랙션이었어. 심장이 콩닥거리고 굉장히 부담스럽던데? 제 2막이 네 번째 벽을 부쉈는데, 그 겉으로 네 번째 벽이 또 있었어. 도망갈 곳이 없었다. 제목에 담긴 자신감과 제 3막에서 보여준 자신감이 일맥상통한다고 봐.

<아트선재 퍼포먼스: 오민> 파트 C, 아트선재센터, 2018, 사진: 옥상훈, 출처

그리고 대형 스피커를 통해서 어떤 목소리가 ‘일이삼사 일이삼사’하면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어. 이 탈육체화된 음성이 내가 이해하는 오민 작가의 핵심을 압축시킨 일종의 모티브처럼 다가왔어. 오민 작가는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연구할 때도 사바세계의 우리가 역사 속 유명 작곡가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절절한 감동이랄지, 낭만이랄지, 그런 인간적인 접촉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음악의 구조라는 것이 사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접촉을 성사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고안되는 것인데, 그것에 집중하고 몰입하다 보니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구조가 목적으로부터 떼어져 나와 독자적인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모습에 매혹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몸이나 감정과의 연결이 완전히 도외시되고 있는 거지! 마치 식당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이 자기들만의 시스템에 따라서 마구 뛰어다니다가 멈추기도 하고 갑자기 어디론가 다시 출발하는 것처럼, 안무가 네 명이 하나의 자동기계처럼 보였어.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향해 가지 않는다면 이런 기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서른 두 마디 코드 진행의 반복’이라는 재즈의 비교적 단순한 내적 논리마저도,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창조적 세계를 열어주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일시적인 흥미와 하품만을 선사하잖아? 그런데 재즈 카페에서는 스마트폰을 보는 내가 왜 오민의 작품은 끝까지 보는 것이지?

네 말대로, 레너드 번스타인이 재미없는 얘기를 재미있게 한다면1), 오민은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는 얘기를 재미없게 해. 하지만 오민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 네가 히토 슈타이얼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읽는 건 슈타이얼이 달짝지근한 디제시스를 여전히 선사하기 때문이라고 봐. 슈타이얼은 현대의 최전선에서 예민한 감각으로 모든 것을 해체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하지만, 일종의 현대적인 봉합을 탁월하게 성취해내고 있어. 나는 슈타이얼의 글을 읽고 나면 낭만주의 혹은 계몽주의 시대의 글을 읽은 것 같은 포만감, 만족감이 생겨. 결국에는 스토리텔러인 것이지!

오민 작가의 작품이 만약 책이었다면 머리맡에 둘 수가 없을 거야. 하루를 마감해야하는데 마감할 생각이 없거든. 오민의 작품에 팽배해 있는 긴장감은 들뢰즈와도 같아! 마쉰느MACHINE적인 측면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신체와 감정을 배려하는 다양한 완화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 인사도 않고 사라졌다고!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인데, 카타르시스에는 관심이 없어. <이영우, 안신애, 그리고 엘로디 몰레> 속의 쇼팽 곡 도입부는 굉장히 매력적일 수 있는 모티브인데 카타르시스로 가지 않아. 편집샵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오민 작가의 작품 사진을 보면 소름이 돋으면서 감각적인 파토스가 올라와. 로베르 브레쏭 영화도 그래. 양쪽 모두 전통적인 서사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달콤하고 친숙한 외양을 갖고 있지만 그 기대감은 끝까지 충족되지 않아. 네가 오민 작가의 스칸디나비아식 디자인에 끌렸다가 이번 공연에 오지 않은 것처럼! 브레히트적인 각성효과가 마치 홀바인의 해골처럼 길게 늘어 뜨러진 것 같다고 할까?

크레딧이 제목으로 쓰여지고, 공연 후에 혹은 인터미션에 이루어져야 할 무대 정리가 관객의 눈앞에서 버젓이 전시되고, 무대에 있어야 할 안무가가 공연장 전체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이번 공연을 설명하지 못해. 이것은 아방가르드 실험도 아니고, 정치적 각성도 아니고, 네가 거리두기를 하고 싶어 하는 “관악의 고리타분함”도 아니라고 봐. 기존의 예술적, 이론적 담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그리고 스스로 자가발생하고 있는 신비로운 마쉰느의 작동이야. 들뢰즈보다 한껏 더 주름접혀진!

 


1)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Kiz0UZowP2V0mwtNv1lc1_zUSB2O65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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