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_다시 쓰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두렵고 낯선 세계에 초대받는 통로

2017년 3월 24일 발행

정지우 (분노사회, 청춘인문학 저자)

어른의 호기심과 아이의 두려움

문제의 사건은 새로운 동네로 처음 이사 가던 날 일어났다. 치히로는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세상이란, 새롭게 느끼고 만끽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소녀에게 새로운 세상은 놀랍고 신기한 것이기보다는,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기분전환, 신선함, 새로운 자극은 그만큼 삶에 지치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나 소중한 것일 뿐, 소녀는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에서, 떠나온 친구와 학교, 동네를 생각하며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치히로의 아빠는 낯선 길로 들어서자 모험을 하듯 그 일을 즐긴다. 차에서 내려 호기심에 가득 차 폐허가 된 놀이공원을 살펴보고, 엄마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소녀인 치히로는 그저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다. 호기심은 아이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사실 거기엔 착오가 있다. 아이가 느끼는 호기심은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에 대한 감정이다. 아이의 호기심에는 근본적으로 세계의 균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위험하고 무차별적인 호기심, 자극적인 것을 향한 열망은 늘 자기 세계를 박살내고 싶어 하는 어른들, 혹은 적어도 청소년의 것이다. 그렇게 두 어른, 치히로의 아빠와 엄마는 ‘신기한 것’을 향한 열망으로 길을 나선다. 반면 치히로는 따라가기도 무섭지만, 혼자 남겨지는 것도 두려워 엄마의 셔츠끝자락을 붙잡고 따라갈 뿐이다.

그들은 망해버린 놀이공원을 지나 계속 걸어간다. 아빠는 그 모든 것을 신기하고 흥미롭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데, 사실 흥미를 느끼는 만큼이나 곧 질려버릴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어른의 세상은 자극과 권태의 순환에 묶여있다. 무엇도 그리 오랫동안 새롭지는 않다. 자극과 흥분은 머지않아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곧이어 이 모든 것은 다시 지루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한 반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반면 아이는 조심스럽고 천천히 모든 걸 받아들인다. 낯을 가리고, 두려워하고, 머뭇거리지만 한번 초대받은 세상에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든 삶의 운명이 ‘끊임없는 쫓겨남’이라면, 아이에게는 아직 그러한 운명이 도래하지 않았다.

아빠는 버려진 공원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도, 사실 세상에 그리 새로운 것 따위는 없다는, 딱히 그렇게 무서울 것도 신비할 것도 없다는 믿음 속에 있다. 그 자신감에는 어딘지 세상을 우습게 보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렇기에 아무도 없는 시장에 들어서서도, 그것을 ‘특별히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에게 세상은 이미 정복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빠와 엄마는 자리에 앉아 당연하다는 듯이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빠의 주머니에 든 지갑 덕분이다.

어른은 세상을 정복했지만, 사실 그러한 세상을 선물한 것은 ‘돈’이다. 시골에서 도시까지, 세상 모든 땅은 누군가의 것이고 돈으로 환산된다. 먹을 것, 입을 것, 즐길 것 등 모든 것이 돈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 그렇기에 돈을 가진 어른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돈이 있다면, 오히려 세상은 쉽게 즐기고 버릴 수 있는 ‘귀여운’ 것에 불과하다. 아이가 겨우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을 귀여워할 수 있다면, 어른은 돈을 통해 세상 전체를 귀여워할 수 있다. 그렇게 어른은 세상을 시시하게 여기게 되고, 그럴수록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또 더 쉽게 질려버린다.

치히로의 아빠와 엄마는 결국 돼지가 되어버린다. 돈으로 정복된 귀여운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이 두렵고 신비하고 낯선 것이라면, 그러한 진짜 세상을 볼 수 없는 인간은 돼지와 다르지 않다. 가축이 된 돼지는 그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잠만 잘 뿐이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돼지들에게도 세상은 정복되어 있기 때문인데, 다만 그 매개가 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른도 돼지도 육박해오는 진짜 세상을 마주하거나 바라보지 않는다. 어른은 오직 자기 손에 쥐고 있는 돈만을, 돼지는 자기에게 사료를 주는 인간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밤이 오고, 폐허에 불과했던 공원은 이제 진짜 세상이 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며 속삭이던 것들이 출몰한다. 제한된 인간의 시각, 청각, 촉각 따위로 알던 세계, 그마저도 돈으로 정복해버렸던 세계는 속살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어른이란 한갓 돼지에 불과할 뿐이다. 그나마 세상을 아직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소녀만이 그 세계 안에서 자기를 유지한다.

신화의 세계로 진입하는 가이드라인

치히로는 달아난다. 이미 거리에는 진짜 세상의 주인들이 득실거린다. 낮에는 그저 폐허에 불과했던 마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불빛들로 가득해진다. 들판은 바다가 되고 유람선이 들어선다. 그렇게 신들이 찾는 유바바의 온천 마을에 불이 밝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는 소녀를 거리에서 발견하는 건 한 소년이다. 마을의 주인 유바바의 부하인 소년은 눈 앞에 나타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소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곧바로 자기가 그 소녀를 알고 있다는 걸 기억해낸다. 이미 자기의 과거와 이름조차 잃어버린 소년이지만, 저 소녀를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그 일은 소년에겐 마치 구원과도 같다. 어두컴컴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기의 과거에서 길어낸, 색체가 있고 형체가 있는 한줌의 조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소년은 소녀에게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곧장 이곳을 빠져 나가라고 한다.

하지만 마을의 경계에 이르러 치히로는 주저앉아 버린다. 이미 돌아온 길이 바다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게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사실 이 세계에서는 이미 꿈과 현실이 뒤집혀 있다. 신화를 잉태하고, 꿈을 꾸게 하고, 무의식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밤에 소녀는 초대되었다. 그렇게 현실에서 가져온 소녀의 몸은 점점 사라져간다.

소년은 물가에서 소녀를 발견한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에게 ‘이 세상의 것’을 먹인다. 먹기는 문화에의 예속이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우리 문화에 속한, 한 명의 구성원이 된다. 시대가 변하고 모든 게 달라져도 음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일은 잘 없다. 음식은 우리의 몸에 각인되고,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우리의 존재를 구성한다. 소녀의 몸도 소년이 건네주는 음식을 삼키자 되돌아온다. 이제 확실히 ‘이쪽 세계의 몸’이 된 것이다.

소년 하쿠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자기가 치히로를 알고 있다고, 그러나 사실 이 이름은 자기 진짜 이름이 아니며 치히로에게 원래의 이름을 결코 잊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치히로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첫 번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 치히로는 자기를 구해주고 도와주는 하쿠의 말을 듣는다. 치히로는 의심과 두려움을 거두고 하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따르는데, 이 역시 소녀의 덕목이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자기 자신의 판단력과 선입관, 경험을 믿고 행동했겠지만, 소녀에게 믿을 수 있는 건 타인뿐이다. 어른이 결국 돈으로 귀결되는 자기의 힘을 믿는다면, 아이는 부모를 비롯한 타인을 믿는다. 어른이 돈을 통해 세상을 정복한다면, 아이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적응한다.

하쿠가 제시한 방법은 가마 할아범을 찾아가 ‘일’을 얻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마을의 주인 유바바의 부하들이 치히로를 찾아내어 죽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일을 가지고 있으면, 유바바조차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먹기가 문화에의 진입이라면, 일하기는 사회에의 진입이다. 문화와 사회를 빼버린다면 우리의 존재에 무엇이 남을까? 문화가 없는 인간은 치히로가 음식을 먹기 전에 그랬듯이 그저 투명하게 사라져버린 존재와 같다. 또한 사회가 없는 인간은 유바바한테 잡혀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치히로가 이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일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자기 일이 있는 인간, 사회의 한 부속품을 담당하는 인간, 먹고 마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인간에게만 비로소 ‘존재가 인정’된다.

하쿠가 시키는대로 치히로는 가마 할아범을 찾아가지만, 이미 거기에는 일손이 충분하다. 가마 할아범 밑에서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무수한 ‘숯검댕이’들이 일하고 있는데, 이들의 일과란 구멍에 숨어 들어가서 쉬다가, 나와서 일을 하고, 밥을 먹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계속 일하는 이유는 일이 그들에게 존재를 주기 때문이다. 치히로는 힘들어하는 숯검댕이의 일을 한번 도와주는데, 가마 할아범은 그들의 일을 빼앗지 말라고, 그들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존재를 잃고 다시 숯검댕이로 돌아갈 거라고 말한다. 비록 고된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만약 그들이 일을 그만둔다면 그들은 존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일’은 인간에게 선험적인 것이고, 다른 모든 것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마 할아범은 비록 치히로에게 일을 주지는 않지만, ‘두 번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 유바바에게 직접 찾아가서 담판을 벌이고 계약을 맺으라는 것이다. 치히로는 더 고집부리지 않고 그 말을 듣는다. 신화의 세계, 혹은 현대로 말하자면 게임의 세계에는 언제나 조언자들이 있고, 그들의 가이드는 절대적으로 옳다. 아이가 신화의 세계에 어울리는 건 그 때문이다. 자기의 판단을 신뢰하며 고집을 밀고나가는 어른과 달리, 아이는 가만히 말을 듣고 믿고 순응한다. 아이가 믿는 대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면’ 아이는 ‘절대적으로 옳게 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치히로는 자기 자신이 아닌 가마 할아범의 말을 믿는다. 그리고 유바바 앞에서 일을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 유바바는 처음에는 택도 없는 소리라고 잘라 말하며, 치히로를 위협한다. 하지만 유바바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바로 치히로의 고집으로 일어난 소동 때문에 자신의 ‘아기’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기가 울자 유바바가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고, 치히로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 “일을 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엉겁결에 일을 줄 테니 입을 다물라고 해버린다. 신화의 세계에서 약속은 절대적이다. 이 실체 없는 세계는 오직 말과 약속으로만 지탱되기 때문이다. 말을 배반하면, 언어를 저버리면 신화도, 세계도 사라진다. 그것이 신화적 세계의 법칙이며, 이러한 법칙 없이는 어떠한 신화도 있을 수 없다. 아무런 규칙도 없는 세상이 아닌, 엄격한 규칙 아래에 세상이 지배당하고 있는 믿음이 신화를 지탱한다. 그러한 ‘신화의 법칙’이야말로 인간이 두려워하고 믿고 싶어 하는 숭고한 어떤 것이다. 인간은 이 혼돈스러운 삶과 욕망을 다스려줄 엄격한 법칙을 꿈꾼다. 그렇게 모든 걸 처벌하는 신이 등장하고, 신화가 만들어지며, 국가와 법이 탄생하는 것이다.

노동과 탐욕의 공간

유바바는 겨우 아기를 달랜 다음, 자신의 말을 후회하면서도 계약서를 써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고 ‘센’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은 단순히 남과 나를 구분하게 해주는 명칭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특히 한자문명권에서 모든 사람의 이름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치히로(ちひろ)만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고유한 뜻을 가진 이름을 부여받는다. 성공, 사랑, 지혜, 평화처럼 우리의 탄생에는 가장 좋은 가치들이 부여된다.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그렇게 이름이 부여됨과 동시에 미래를 잉태한 씨앗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유바바로 대변되는 ‘지배체제’는 그러한 모든 이들의 가능성, 개개인의 잠재성이 마음대로 피어나길 허락하지 않는다. 이름은, 그 속의 깊은 뜻과 희망은 억압당하고 박탈당해야 한다. 그로써 노동과 계약에의 ‘예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센은 그렇게 이름을 빼앗기고 유바바 밑에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센은 첫날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쿠와 가마 할아범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결국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더군다나 남들 앞에서 하쿠는 센에게 냉정하기만 하다. 이 때, 다시 모두가 잠든 밤에 하쿠가 몰래 나타난다. 하쿠는 센을 데리고 나가서 돼지가 된 부모를 보여주고, 힘을 내는 마법이 걸린 주먹밥을 건네주며 위로해준다. 그리고 결코 ‘진짜 이름’을 잊지 말라고 알려준다. 소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소년을 믿는다. 진짜 이름을 잊지 않으며, 유바바 밑에서 일을 하고, 부모와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다.

센에게는 가장 더러운 탕을 청소하는 꽤나 고약한 일이 맡겨진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가오나시’라는 존재가 센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가오나시는 ‘얼굴이 없고’ 실체도 없는 그림자 같은 잡귀신이다. 센이 처음 이 세계에 진입했을 때부터, 가오나시는 센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센이 비가 오는 날 온천의 문을 열어준 것을 계기로, 가오나시는 센에게 더 가까이 접근한다. 가오나시는 센이 필요로 하지만 얻지 못한, 목욕탕 청소에 좋은 ‘특효약’ 팻말들을 훔쳐 준다. 센은 ‘오물신’이 온천에 나타나 비상이 걸렸을 때, 이 팻말들을 사용하게 되고 첫 일을 성공적으로 치른다. 원래 ‘강의 신’이었지만 인간이 버린 오물 때문에 ‘오물신’이 되어버렸던 신은 센의 도움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고, 센에게 치유의 경단을 선물로 준다.

유바바는 첫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센을 칭찬한다. 센 역시 유바바가 열어준 파티가 싫지 않다. 고된 노동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지탱된다. 힘들고 더럽고 역겨웠더라도 그 뒤에 주어지는 휴식과 유흥의 짧은 시간이 일을 견디게 한다. 어찌 보면 이는 평생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일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베푸는 모습에서 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어떤 안도와 기쁨을 느낀다. ‘센이 일에 잘 적응했구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일에서의 성공이야말로 센을 더 깊이 일터에 예속하게 만든다. 실적 평가, 인센티브, 승진에서 얻는 소소한 인정들이 우리를 비로소 완전히 ‘일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 센은 안심해야 할 처지가 아니다. 센에게는 돼지로 변해서 언제 도축될지 모르는 부모가 있다. 이 세계에 적응할수록 센은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부모도, 원래 세계도 잊게 된다. 어쩌면 완전히 그럴 수도 있었을 센에게 다시 한 번 하쿠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처럼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서 혼자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센은 수평선에서 날아오는 용을 발견한다. 원래 모습인 용으로 변한 하쿠는 무수한 종이 쪼가리들에 쫓기고 상처 입으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하쿠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로 유바바의 방으로 날아간다. 센이 그 뒤를 쫓는다.

한편, 온천에는 가오나시의 폭주로 소동이 일어난다. 얼굴이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실체도 없는 가오나시는 온천에서 일하던 개구리를 잡아먹음으로써 ‘위장된 존재성’을 얻는다. 그는 자기가 잡아먹은 존재의 목소리로 말하면서, 온천 직원들에게 가짜 금을 뿌려댄다. 직원들은 금을 얻기 위해 가오나시를 극진하게 대접한다. 그러한 대접, 관심, 호응이야말로 가오나시가 갈망하던 것이었다. 아무도 자기를 보아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섞일 수 없고, 늘 혼자 떠돌아야 했던 가오나시는 ‘금’을 주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소통에 관해, 만남에 관해, 우정과 사랑에 관해 무지한 그가 알게 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방식은 타인과 접촉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존재들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

센은 유바바의 심부름으로 쌍둥이 언니한테 당한 하쿠를 도와주고, 가오나시가 있는 온천으로 돌아온다. 가오나시는 이미 직원들 여럿을 잡아먹은 후, 센을 찾고 있었다. 처음부터 가오나시의 궁극적인 관심은 센이었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계에서 배회하던 가오나시는 어느 날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소녀를 보게 되었다. 외로워하고, 두려움에 떨고, 왜소한 그 소녀에게 가오나시는 다가가고 싶었다. 어쩌면 자기와 비슷한 처지라고 느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센은 그런 가오나시에게 온천의 문을 열어주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당연히 가오나시한테는 우산도 없었으며, 센에게는 그저 이곳에 있는 신들 중 한 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가오나시는 그렇게 센을 갈망했다. 그래서 센이 나타나자 금을 내밀어보지만, 센은 고개를 내젓는다. “너한테는 내가 원하는 게 없어.” 그게 센의 대답이다.

가오나시는 자기가 아는 유일한 소통의 방법인 ‘돈 주기’가 실패하자, 혼란에 휩싸이다 폭주해버린다. 결국 가오나시는 센 마저 잡아먹어버리려고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목적이 그랬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가오나시는 돈과 욕망, 탐욕의 공간인 ‘온천’ 안에서만 그러한 모습과 방식을 가질 뿐이다. 애초에 자기 정체성이 없던 가오나시가 그 공간의 방식을 그대로 흡수해버렸던 것이다. 센은 강의 신에게 받았던 경단을 가오나시에게 먹인다. 그러자 가오나시는 먹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내며 센을 쫓아간다. 결국 센을 따라 온천 밖으로 나가게 되자, 가오나시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유바바의 온천은 자본과 욕망의 공간이다. 그곳은 ‘금’이 지배하고 있고, 모든 게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며, 그러면서도 이름을 빼앗겨 영원히 벗어날 가능성이 없는 세계다. 이는 곧 자본에 장악된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다. 센이 그런 공간에 완전히 지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부모에 대한 걱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쿠에 대한 걱정이 그 정신없는 노동의 세계, 돈으로 순환되며 정체성을 박탈하는 공간으로부터 센을 건져낸다. 일과 돈의 순환으로 지배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내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집요하게 쫓아가다보면, 우리는 삶의 다른 국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센이 온천에서 나와 하쿠를 살리기 위해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를 찾아나서는 것처럼.

새로운 자기를 되찾는 여정

센은 제니바를 찾아 바다 열차에 오른다. 거기에는 제니바의 주술에 걸려 각각 조그마한 하마와 참새가 된 유바바의 아기와 까마귀가 동행한다. 그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오나시도 센을 따라온다. 센이 제니바를 찾아가는 건 제니바의 주술에 걸려 쓰러져 있는 하쿠 때문이다. 그러나 센이 제니바에게 향해가는 와중에, 가마할아범과 남아있던 하쿠는 스스로 깨어난다. 이는 센이 강의 신으로부터 받았던 경단을 먹여주었던 덕분이다. 그렇게 하쿠는 다시 제니바를 찾아 나선 센을 찾아간다.

 

제니바의 집으로 가는 여정은 고요하고 아름답다. 센을 위협했던 유바바의 아기는 얌전하게 센의 옆에 앉아 새로운 세상을 구경한다. 가오나시 역시 온천에서처럼 센을 갖고 싶다거나 잡아먹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다. 그들은 여행이 주는 마력에 빠져 들었다. 창밖에 빛나는 수평선과 아무도 말이 없는 객실 안,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듯한 여정에서 그들은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모든 소란, 과잉, 욕망, 고집을 뒤로 한 채 그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여정에 몸을 맡긴다. 여행이 하나의 삶이고, 삶이 하나의 여행이라면, 우리는 때때로 그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같은 것을 느낀다. 삶은 우리를 이끌고, 우리는 그 여정에 완벽히 순응한다. 그 속에는 긍정과 화해의 예감이 있다. 우리가 삶에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다. 나를 용서하는 것, 나를 긍정하는 것,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기에게 다가오는 삶의 모든 국면들과 자신에 대한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센은 처음부터 가오나시나 유바바의 아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센의 ‘관심 밖’에 있었다. 센이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저 영영 부모를 잃는 것, 혹은 하쿠를 잃는 것뿐이었다. 열차에 앉아가며 센은 고요하게 그들을 걱정한다. 너무 두려움에 떨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고, 안달하지도 않으며 여정에 몸을 맡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된’ 센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돈으로 세상을 정복해버린, 그래서 수시로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그런 어른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어른의 덕목은 호기심이 아니라 ‘의연함’이다. 이미 자기에게 드리운 운명을, 또 다가오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이 터득한 삶의 지혜다.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지워버리고, 그 중요한 것을 향해 의연히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어른이 된 삶의 고수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술이다.

제니바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사실 센은 제니바를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하쿠는 이미 센이 먹였던 경단으로 인해 치유되어 제니바의 집으로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유바바의 아기와 까마귀도 곧 저절로 주술이 풀릴 예정이었다. 그렇게 보면, 센은 헛고생을 한 셈이지만 이 여정에는 삶의 근본적인 속성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어떤 궁극적인 화해에 도달한다면, 그 일은 언제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거기엔 필수적이지 않은 잉여가 개입한다. 여행, 사랑, 방황은 우리를 가장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전과는 다른 지평에서 삶을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제니바는 갈 곳 없는 가오나시에게 옆자리를 내어준다. 하쿠는 그들을 찾아오고, 함께 유바바에게로 돌아간다.

하쿠와 함께 돌아가며,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다. 어릴 적, 센은 작은 강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 강의 주인이 바로 하쿠였다. 하쿠 역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기억과 이름을 되찾는다. 이는 센이 제니바를 찾아갔기에, 그래서 하쿠가 센을 찾아가고, 둘이 함께 돌아옴으로써 얻은 결과이다. ‘부수적 효과’야말로 삶에서 때때론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부수적으로 얻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는 가장 중요한 것들 역시 부수적인 것들이다. 여행을 하다가 얻은 꿈, 일을 하다가 얻은 친구, 취미생활을 즐기다 얻은 연인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애초에 제니바를 찾아간 이유였던 ‘주술을 풀어달라’는 목적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센과 하쿠, 가오나시, 나아가 유바바의 아기는 그들 각자의 화해에 도달한다.

온천으로 되돌아온 센은 유바바와의 내기에서 이긴다. 그렇게 이름과 부모를 되찾는다. 이제 ‘치히로’는 그들 모두와, 그리고 하쿠와 작별한다. 아주 어릴 적 만났던, 그리고 다시 만난 강의 신 하쿠는, 언젠가 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물론, 그들의 만남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하쿠는 더 이상 강의 신도, 유바바의 부하도 아닐지 모른다. 그 ‘새로운 만남’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 만남이 다시 되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다.

치히로와 부모는 원래의 그 장소로 돌아간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자동차는 풀숲으로 뒤덮여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희미하고 흩어져 있다. 치히로에게는 제니바한테 받은 머리끈만이 남아 있다. 화려하고 두렵고 막막했던 시간이 지나갔다. 치히로는 이제 새로운 동네에 적응할 것이다. 그 낯선 신화의 세계는 치히로에게 평생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하고 막연한 것으로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삶은 다시 시작되고, 치히로는 조금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