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림_‘고전에 기대는 시간’ 서평: 아름다운 삶의 재발견과 그 무게

이미지 출처: 을유문화사 홈페이지

홍태림(미술비평가)

내가 스스로를 미술비평가라고 인지하며 글을 쓰게 된 것은 고작 몇 해 전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미술에 대한 글을 나름대로 쓰기 시작한 때가 대학원을 막 졸업했던 2014년 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미술에 대한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는 학부 과정에서 동양화와 신문방송학을 그리고 대학원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이 되니 작가가 되고 싶은 욕구는 확연히 줄어들어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는데, 일단 이미 세상에는 좋은 작가와 작업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내가 만들고 싶은 작업은 많은 돈, 시간, 공간이 필요했으나 나에게 그런 조건은 100번 정도 죽었다가 깨어나도 갖춰질 리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현실적인 조건들이 갖춰진다 하더라도 창작활동을 잘 해낼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혹여 갖춰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들어낼 작업이 궁극적으로 나의 이상과 발을 맞춰나갈 수 있는 것인가도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렇다고 기동전사 건담에서 등장하는 뉴타입(NEW-TYPE)처럼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는 신인류를 꿈꾼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긍정하며 삶이라는 가치 위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들이 충만한 세상을 막연히 바랐을 뿐이다.

나는 이러한 까닭에 나의 작업이 어떻게든 세상을 지금보다는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무언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작업과 그러한 바람이 포개지려면 현실이라는 바닥을 몇 센티미터 정도 떠 있을 필요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한 떠 있음을 즐기기엔 은근히 경직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천성 탓에 나는 내가 직접 작업을 만드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좋은 작업을 감상하거나 그러한 작업을 가능케 하는 제도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 관심이 증식에 증식을 거듭하다 보니 비평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뒤늦게 붓을 버리고 펜을 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면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작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작업이나 잘 만들면 된다는 자기합리화를 내세워 책도 거의 읽지 않았고 글도 거의 쓰지 않고 살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근래의 일이듯 어떤 의무감과 흥미의 뒤섞임 속에서 책을 읽는 일도 근래의 일이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일이 워낙 습관화되지 않아서 독서에 정을 붙이려고 소설을 주로 읽었다. 그래서 친구의 추천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1년 정도 읽었는데, 별 기대 없이 읽었던 책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으로 나의 삶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원을 졸업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어쩔 수 없이 미술에 대한 책을 주로 읽고 필요에 따라 사회학, 철학에 대한 서적을 조금 곁들여 보는 상태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미술비평가로서의 활동에 즉각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학책에는 쉽사리 손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줄곧 마음 한편에서는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나의 삶을 진지하게 마주해볼 수 있었던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정지우의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읽었던 시간은 나의 삶을 더듬어보던 지난 시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은 것은 1년 전이었고 읽은 직후 서평을 써보려고 했지만, 올해 여름에 있었던 결혼을 앞두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아서 결국 서평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쓰지 못한 서평이 숙제로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던 차에 2018년이 며칠 남지 않은 12월 말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다시 글을 적어 내려가 볼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미술에 관련된 글을 써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미술과 관련이 없는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은 2014년에 이택광의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를 읽고 쓴 ‘박근혜는 책임져라 구호를 외칠 수 없었던 이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계기는 저자가 이 책을 직접 나에게 선물로 주면서 “홍태림 님 어려운 것은 돌아옵니다.”라는 글귀를 적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이 글귀가 어떤 의미를 나에게 전달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어려운 것을 가능하면 피하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어려운 것을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서평을 쓰다 보면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 의미를 잘 가늠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고전에 기대는 시간』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룬 장을 읽으며 어려운 것이라는 문구와 다시 마주할 수 있었고 어려운 것에 대한 나름의 답도 적어볼 수 있었다. 릴케는 살이 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릴케가 말하는 어려운 것이란 무엇일까. 정지우는 릴케의 어려운 것을 인습의 반대편에서 저항하며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존재 내부에서 시작되는 운명을 믿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정지우의 또 다른 저서 『분노사회』를 떠올리기도 했다. 인습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고 나의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운명을 믿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저항에도 맞설 힘이 필요하다. 나는 그 힘의 근저에 그가 말한 정당한 분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노사회』에서 우리가 각자가 믿고 있는 사회의 관념과 삶의 관념이 현실과 어긋날 때 분노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이야기하는 분노는 부당한 관념에서 비롯되어 맹목적 집단주의나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증오가 아니며 그러한 증오의 반대편에서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시작된 관념을 바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인습의 반대편, 우리 내부에서 시작되는 운명을 믿는 삶은 누구도 결코 쉽게 움켜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치들은 개인의 온전한 삶을 가로막는 무수한 현실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바탕으로 한 실천이 없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나의 내면을 넘나드는 분노를 직시하고 그에 따라서 타인을 마주하는 태도를 반성하거나 혹은 예술계에 대한 제도비평을 수행하고, 희망버스를 타고 집회에 참여했던 것과 같은 나름의 실천들도 릴케가 말한 어려운 것으로 향하는 일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이택광의 어려운 것이 돌아온다는 말이 내가 이 세계에 살아있는 하나의 존재이기에 결국 어려운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릴케 다음으로 이 책에서 나의 눈길을 끈 부분은 알베르 카뮈의 『결혼』을 다룬 장이다. 정지우는 이 장에서 『결혼』의 도입부를 인용하며 이것이 자신이 아는 에세이 중 가장 아름다운 도입부라고 평한다. 그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언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1)

나에게도 정지우의 경우처럼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도입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 에 있다.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격렬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너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무리의 불쌍한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 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17년 연상으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의 시작된 장소이고 모든 사건이 (대부분) 끝난 장소였다.”2)

정지우가 인용한 『결혼』의 아름다운 도입부는 청춘과 현실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불안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쾌락을 들이마시며, 의식 전체를 바쳐 이 순간을 사랑”3)하는 청춘의 자기 긍정을 잘 표현했다. 내가 인용한 『스푸트니크의 연인』 도입부 역시 현실 속에 깊숙이 녹아든 인습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통째로 돌파해버리는 스미레의 청춘이 온전히 녹아 있다는 점에서 『결혼』의 도입부와 나란히 놓아 볼만할 것이다. 우리가 현실 앞에서 청춘의 이름으로 현재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현실이 현재를 무한정 잠식하려는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정지우는 카뮈가 미래라는 허상을 고집스럽게 거부해야 하며 미래를 상상하며 견디는 희망이 현재를 포기하는 체념이라고 이야기한 것에 주목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재보다 나아질 미래를 꿈꾸며 현재의 삶을 현실에 예속시키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인간이 언제나 현재를 막연히 불안해하고 그 막연한 불안을 미래라는 허상을 통해서 우회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다. 현재의 삶을 평가절하는 미래라는 이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피지배자들에게 현재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죽음 이후 맞이할 미래의 낙원을 꿈꾸게 하는 과거의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한 프리드리히 니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현재에만 온전히 빠져있을 수 없으며 현실이라는 이름의 미래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존하는 현재의 삶이 현실에 예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정지우는 한 번 더 이렇게 강조하기도 한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를 걷고 있을 뿐이다. 이 현재에 어떤 미래가 오든 그 걸음에 몰두하는 것이야 말로 삶의 전부다.”4)

이 문장만 따로 놓고 보면 우리가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에 몰두해야 한다고 단언하는 것 같지만, 이 책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극단적으로 현재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지우는 『월든』을 다룬 장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인습적 현실에서 벗어나 철저한 내면의 절실함과 삶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월든 호숫가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논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소로의 태도와 마음의 힘은 자신과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그런 가치관에 대해서 반감보다는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그는 우리가 소로와 같은 가치관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지만, 인습적 현실과 소로의 가치관이 맞닿는 경계에서 삶을 조율해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지우는 현실적 차원을 완전히 배제하기 보다는 우리의 삶이 현실보다 앞선 것이 될 수 있기를 혹은 그 두 가지가 조율될 수 있는 것임을 바라고 있다. 아마도 그는 그런 이유에서 카뮈의 『결혼』을 다룬 장에서 청춘과 현재는 가능하다면 현존의 순간을 더 채울 수 있는 삶과 이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내가 인용한 문장은 우리가 현실이라는 이름의 미래가 전부라고 여겨지는 세계 앞에서 현재의 가치를 계속 치열하게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청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고전에 기대는 시간』에는 앞서 내가 언급한 장들 외에도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상상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만들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바라보고 이해할 힘을 북돋아 줄 다양한 고전문학이 다뤄졌다. 정지우는 이 책의 서두에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하여 열두 편의 글을 썼다. (…) 여기 담긴 글들은 지금까지 내가 썼던 글 중에서 가장 진실하다”5)라고 적을 만큼 각 고전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길어낸 이야기를 통해서 예리하게 다루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평소 고전문학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이나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이에게 적지 않은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독서와 글쓰기를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 정지우가 이번 책에서 다룬 12편의 고전문학 중에서 읽어본 것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밖에 없었으며 F.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유튜브로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요약본을 본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나의 삶과 현실의 경계에서 계속 불거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나의 시선으로 다시 직시해보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삶을 더듬어보던 지나간 시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계기로 삼기에도 충분했다. 따라서 『고전에 기대는 시간』은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사랑하고 싶은 열망이 있거나 혹은 잠재된 이들에게도 분명 소중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소중한 시간이 만들어낼 지도 위의 길은 정지우가 부르짖는 삶의 가치와 포개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혹여 그 시간이 정지우가 말하는 삶의 가치와 포개진다고 하더라고 결코 그 길은 순탄함과 낙관으로 가득 찬 길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각자의 지도를 다시 그려볼 수 있다면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1) 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책세상, 1989, 13쪽

2)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자유문화사, 1999, 9쪽

3) 정지우, 『고전에 기대는 시간』, 을유문화사, 2017, 78쪽

4) 앞의 책, 86쪽

5) 앞의 책,  12-15쪽

*크리틱-칼 후원금은 서버 운영비와 필진들에게 책 선물을 드리기 위한 비용으로 사용합니다. 자세한 크리틱-칼 후원 방법과 후원 현황은 “여기” 를 클릭 해주세요. 우리은행 1002-948-262845 예금주 홍태림

*크리틱-칼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투고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언제나 기다립니다. 크리틱-칼에 한 번이라도 투고해주신 필자에게는 1년에 한 번 5만 원 안에서 책 선물을 드립니다. 투고 문의: gocritic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