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_권혁빈님의 설명에 대한 또 하나의 해명입니다.

2014.07.19 발행

다시 한 번 올려주신 글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권혁빈님이 써 주신 글을 보고, 역시 ‘반론’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쓰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컨대 권혁빈님께서 써 주신 것처럼, 작품과 전시의 의미를 맥락이나 구성의 틀 안에서 규명하느냐, 그리고 그 틀을 넘어선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는 대립적이 될 수 있거든요. 즉, ‘안이냐-밖이냐’의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 그리고 지식 이야기가 바로 이 문제에서 나온 것이지요. 어떠한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 안에서 내적 결속을 돈독히 하는가, 또는 그 한계 바깥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효과들이 일어나게 하는가는 분명히 다른 태도이고, 무엇을 더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의 이야기는 반론과 재반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에 대한 태도에서 권혁빈님과 저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실은 제가 전시장을 가고 그에 대해 뭔가를 끄적일 때도 작품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종합적인 효과,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감흥을 주는가, 또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글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문단에 대한 비판을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통가리 구이>라는 괴상한 소설로 뽑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품과 전시의 해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든 그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리뷰를 쓸 때 반드시 분석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도그마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제가 쓴 글을 “안 좋은 예”로 지목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름의 의미를 따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안 좋은 예가 있음에 따라 좋은 예가 있을 수 있거든요. 악당이 나타나고 나서야 영웅이 나오듯이요. 꽤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단어가 문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의 의미가 제한됩니다. 그게 잘 안 맞아떨어지면 비문이 되고 읽는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들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에 대해 예술적인 입장을 취하면 어떨까요. 그리 한다면, 우리가 시를 읽거나 암송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단어와 지시물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야인시대의 심영이 소리높여 부르짖던 ‘님’이 단순히 인간 여자 ‘님’이 아닌 것처럼요. 물론 엄격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규칙 안에서는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예술의 차원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그게 어떤 메커니즘을 거치든 의미가 폭발하게 되는데,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게 수많은 예술론이 이야기하는 예술의 본래적 힘 중의 하나, 즉 ‘상상’을 긍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의미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그리고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뛰어넘어보려 하는 것이 예술의 과제라 할 수 있겠지요. 그게 아무리 말도 안되고 엉뚱해 보여도 말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제가 직접 이야기한 대로 아무래도 전시나 공연은 가서 보는 쪽이 좋습니다. 그런데 총론은 비슷할지라도 여기서도 권혁빈님과 저의 태도가 대립하게 되는데요, 저는 다만 꼭 가서 보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름의 감흥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펑크록 그룹 더 클래쉬는 해체된지가 옛날이고 두 번 다시 공연을 볼 수는 없지만, 라이브 CD나 앨범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름 즐거워지곤 합니다. 물론 천지가 개벽해서 제가 공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매우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에서 변하는 건 없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클래쉬의 음악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답변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직접 해 봤어/가 봤어?”라는 것이 모든 사고의 근본규칙이 된다면, 직접 해 보고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술이든, 정치든, 철학이든, 수학이든 뭐든지요.

정리하자면, 이런 겁니다. 권혁빈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집이 파스타를 찾는 주문에 응대할 이유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꼭 응대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울릉도 같은 데는 중국집에 피자를 시키든 통닭을 시키든 다 배달이 오거든요. 중국집이라는 이름의 범위 안인가 아니면 밖인가, 의미의 안인가-밖인가, 전시의 안인가-밖인가, 이한열이라는 상징의 안인가-밖인가. 재미있고 탁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권혁빈님께서 원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말을 걺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이유지만, 이러한 대화 과정을 통해서 제게 큰 공부가 됨과 동시에 제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름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제 나름대로 매우 행복하고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피곤함을 안겨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논의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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