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19 발행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의 성공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왜냐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패 이후에 올 파국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거나, 또는 감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과 재화를 탕진해야 하는 것들이 그 공포감의 정체이리라. 하지만 여기서 단어 한 개만 바꿔 보면 어떨까? “성공 이후에 올 파국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거나, 또는 감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과 재화를 탕진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쩐지 솔깃하게 들리지 않는가? 우리는 매일 가십거리와 뉴스란에서 이런 이야기를 종종 보고 듣는다. 예컨대 ‘100억에 당첨되었으나 마구 탕진한 결과 다시 가난하게 된 사람’이라든가 ‘갑자기 굴러들어온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서 자살이 꼬리를 무는 상황’ 등등.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패만큼 성공 또한 두려워한다고. 성공 후에 장밋빛 미래가 있을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성공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단계를 결론짓는 것에 불과할 뿐, 그 뒤에는 무엇이 올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서 성공을 한 순간, 예컨대 20대에 10억을 모은 순간 어느 정도 만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30대에 풍비박산이 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성공담을 적어놓은 책이나 성공의 방법을 공식화하려는 책은 성공이 일생일대의 목표이며, 성공 뒤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요설을 쏟아놓는다. 그리고 성공하는 습관이나 체질을 만들면 항상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바람을 넣는다. 이제부터의 글은 그러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습관1: 주도적이 되어라
주도적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많이들 이야기하기를,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그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선수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 생각이고, 애초에 ‘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 따위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유한자이고, 자본의 노예이며, 법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끊임없이 해진 팬티를 “주도적으로” 기워서 다시 입는 일일 뿐이다. 물론 당신이 원래의 천 조각이 하나도 남지 않은 낡아빠진 팬티에 자부심을 느낀다면, 당신 자신이 주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다.
습관2: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종종 듣기를, 일에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 분명 단기적인 목표가 있다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슈퍼마리오 스테이지 1을 클리어 한다든가, 오늘 들어온 삼각김밥을 진열대에 가지런하게 쌓는 등등. 여하튼 당신은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완수한 뒤 다른 목표로 이동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며 친구들과 인생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운다. “10억” “벤츠 S클래스” 등등. 그런데, 만약 진짜로 그 목표를 이루게 되면 당신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20억” “람보르기니”? 이러한 문제들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목표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욕망의 문제라는 것이다. 욕망은 한도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이루어지면 곧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라… ‘요구–불만족–요구–불만족’이라는 다람쥐 쳇바퀴 놀이는 분명 다리근육과 지구력 훈련에 도움은 될 테지만,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은가.
습관3: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잘 모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적당히 하다가, 그게 굳어져 버려서 다음에 오는 일도 같은 식으로 적당히 하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과 같은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적당히 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신화와 종교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이 잘 되길 바라며 제사를 지낼 때 허접한 것을 바치던가? 분명 그들에게 소중한 것을 바친다. 그리고 그러한 제사는 하려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또한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의례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처음에 하는 소중한 일을 일단 망치고 시작하라는 말로도 들린다. 소중한 일을 망치고 시작한다면, “이렇게 중요한 것도 망쳤는데 다른 건 좀 어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을 계속할 때의 긴장이 줄어들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소중한 것을 망치는 사람을 써 줄 사람이 있을까? 만약 거기서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나름 의미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습관4: 상호이익을 모색하라
윈–윈 관계라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 분쟁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불쾌감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윈–윈 관계는 매우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수치로 표시될 수 있는,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인식 가능한 이익이 상호 모두에게 크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윈–윈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관점이 매우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어느 정도 불쾌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보상해주는(혹은 더 넘치는) 쾌락이 있으니 납득할 수 있다”는 태도 등등. 이렇다면 어떨까. 두 사람이 흥정을 벌인다. 그런데 그중 ‘누군가가’ 바보다. “네가 우리 쌀 두 섬을 가져갔으니 내 여동생과 결혼해도 좋아” “안돼! 쌀을 두 섬밖에 안 가져갔으니 네 여동생은 물론이고 조랑말도 데려가겠어!” “어…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그렇다면 거기에 얹어서 우리 집도 줄게. 나는 하인으로 살면 되겠어.”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너는 꺼지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거 좋은 생각이군!”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맨날 이러고 산다. 여하튼 이 두 사람 모두 윈–윈을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습관5: 먼저 들은 다음 이해 시켜라
우리는 남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보기’와 ‘흘끗 보기’를 구분했듯이, 우리는 남의 말을 듣되 그냥 흘려듣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은 중요하다. 그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한 후, 그에 대해 어떠한 대처를 할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나의 입장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흘려듣기’가 아닌 ‘듣기’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애초에 내 입장에서 상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세밀하게 파악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상대가 어떠한 2중 3중의 전략을 가진 말을 할 경우에 나의 대답은 오히려 강력한 헛발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각자는 나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나름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 우리들 각자의 경험은 모두 다르고, 사용하는 단어의 용법도 모두 다르거니와 의미 자체도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말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그저 뉘앙스뿐일 따름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가? 다음을 보라. “오빤 내가 왜 화가 난지 몰라?” 누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문제지만, 누구에게는 밑도 끝도 없는 나락이다.
습관6: 시너지를 내라
어떤 일을 했을 때,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하나 뿐만이 아니라 여럿이라면 정말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완벽히 끝내는 것은 물론이고 시너지 효과를 얼마나 많이 낼 수 있는가가 최근에 중요시되는 ‘개인의 능력’이리라.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일단 당신의 능력이 좋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학, 철학, 사회학은 물론이고 항공역학, 양자물리학적 지식까지 습득해야 더 많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운동, 무용, 음악과 같은 것은 처세술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본이 되는 것이니까 당연히 잘 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풍수지리, 점성술, 강신술을 익힌다면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더 많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요는 당신을 학대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능력이라는 것은 당신을 얼마나 학대했는가를 통해서 더 큰 발전의 가능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쨌든 ‘시너지를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마조히스트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습관7: 끊임없이 쇄신하라
여기까지 나왔던 습관들이 모두 실제로 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이것은 그보다는 쉽다. 당신은 어쨌든 매일 쇄신되고 있다. 당신의 체세포는 계속해서 분할되며, 한 달 정도만 지나면 당신은 거의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물론 이건 농담이고, ‘끊임없이 쇄신하라’라는 정언 명령은 실질적으로 ‘너 언제 죽을래?’라는 질문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끊임없이 쇄신한다는 말인가? 삶의 방식? 일을 하는 데 있어서의 자세? 사람간의 관계? 그것들 중 일부? 또는 전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 우리를 쇄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한정된 지식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쇄신’의 가능성이 점쳐지는 셈이다. 지식의 조합을 굉장히 특이하게 했을 경우, 그리고 그것이 나름의 효용성이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창의적’이라고 말한다.(물론 비효율적일 경우 ‘뻘짓’이라는 오명을 덮어씌운다.) 그런데 우리의 지식이 한계에 다다를 경우 우리는 대체 무엇을 쇄신한다는 말인가? 그 쇄신의 대상이 우리 자신의 삶이 될 수는 없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한병철 교수의 『피로 사회』가 이야기하는, ‘끊임없는 자기 착취로부터 비롯된 우울’이 바로 그 ‘끊임없는 쇄신’의 멋진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즉, 당신을 보고 ‘끊임없이 쇄신하라’고 강조하는 이들은, 결국 당신이 언제 우울증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이를까를 기다리는 악당들이다. 그런데 그들도 어찌 보면 불쌍한 것이,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쇄신을 강요받는’ 존재들이다. 그래도 그들이 사악한 것은, 자기 선에서 그러한 문제를 끊어버리지 않고 남한테 그게 좋다고 강조하는 물귀신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성공이나 실패 이후에는 무엇이 온단 말인가? 종말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역사가 성공하거나(구원) 실패하면(징벌) 역사 자체는 끝이 난다. 성공이든 실패든 역사는 파국을 맞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올 수 있는 사건들은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삶이다. 이러한 논리적 문제를 비껴가기 위해 성공 이론서들은 성공이 단기적인 것이며, 앞으로 이러한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몇 가지의 체질과 습관, 그리고 능력이 있다면 어느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회를 잘 잡아 거대한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마 그 이후로 인생에 있어서는 ‘조그만 기회’들과 ‘거대한 기회’들이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돈이 돈을, 권력이 권력을 만드는 이 사회에 있어서 성공 이후의 삶에서 실패가 돌아올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애초에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따져보면 성공이나 실패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 후의 삶이 어떠할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성공을 통해 얻는 단기적인 충족감이 그토록 기를 쓰고 성공하려는 이유일까? 아닐 것이다. 그 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 제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그 후의 삶’이 던져주는,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쇄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성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성공이 불안을 없애주는 보증 수표라도 되듯이. 그런데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했듯이 불안은 공포와 달리 대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성공을 위해 제 몸과 마음을 희생해야 하는지 전혀 힌트를 주지 않으며, 불안감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시도들 또한 수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한 지점에서 성공하는 자들의 습관은 실패하는 놈들의 습관과 동일한 형태를 가진다. 애초에 그런 것들은 마치 눈을 가린 권투선수의 처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주먹을 휘둘러도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아니, 정말 상대가 거기에 있기나 한 것인가?
이 글의 서두에서 논한 그 명제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자. “사람들은 실패만큼 성공도 두려워한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후에 행복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약속이 100%의 확률이 아니며 어느 한 군데에 구멍이 있어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사람들은 페스트 창궐기의 광신자들처럼 제 몸을 학대하여 불안의 요소를 잠재우고자 노력한다. (이때 여기에 발맞추어 생을 긍정적으로 살자고 하는 것은 진정한 마조히스트가 되었다는 징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공에 대한 담론은 불안에 대한 부질없는 자기 방어이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자기 착취의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