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_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에 대한 독서

2013.04.11 발행

알랭 바디우는 그의 저서 『사도 바울』1)에서 기존의 바울 해석 ? 신앙의 수호자, 성인(聖人) – 과는 다른 식으로 사도 바울을 해석한다. 그는 철학의 관점으로 바울의 글들에서 드러나는 진리에 대해 탐구하며, 바울이 진리적 주체의 원형(Archetyp)임을 강조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그가 이전의 이데올로그들과는 다른 전략을 취한다는 것을 논술한다. 사도 바울의 동시대에는 적어도 두 개의 이데올로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전통에서 비롯된 부류와 유대교적 전통을 따르는 부류로 구분되었는데, 이론적 형식이나 말하는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이들은 근본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건드릴 수 없는 지점 ? 즉 (율)법2)과 지식 ? 이 있었던 것이다. (율)법과 지식이 그것들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일종의 ‘법칙 안의 보편성’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은, 곧 신자와 시민이라는 테두리로 그들을 둘러싸게 하면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나 지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신 앞에 놓인 개인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그들의 행태, 즉 (율)법과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의 부산물이며 그것을 존중할 수는 있어도 신앙의 기본조건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그리스 철학자들은 끝까지 (율)법과 지식을 신의 위상과 동일하게 여겼다. 이러한 도그마를 깨고자 취하는 바울의 전략은 히스테리증자의 전략과 유사하다. 히스테리 담론의 아래 항(a ◇ S2)에서 볼 수 있듯, 바울은 (율)법과 지식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퍼붓는다. 당시의 유대교 이데올로그들과 그리스 철학자들은 도그마를 방어하기 위해 시니피앙을 끝없이 보충하려 하지만, 지치지 않는 바울의 질문들 앞에서 곧 무력해진다. (그때 분명히 바울은 히스테리적으로 미소 지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식의 시니피앙 연쇄가 그 한계를 맞이했을 때 주인 담론의 주체에게 남은 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구조에 대한 신앙,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끝까지 수호하려는 도그마의 벌거벗은 모습뿐이다. 이는 신약을 통해 구약의 신의 모습을 새롭게 정초 짓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말 그대로 여느 종교에서나 나타나는 원초적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발랭탱 드 불로냐(1591~1632)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쓰는 성 바울>(1618~1620). 휴스턴 미술관 소장

그러나 바울의 히스테리증적 언설은 그것을 교리화 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오이디푸스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예컨대 마르키온파의 투쟁적인 바울 숭배나 바티칸 공의회에서 바울을 ‘순화하는’ 과정들에서 바울의 신앙은 완연히 (율)법화 해 버렸던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뛰어드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바울의 신앙을 정식화하려는 모든 시도와는 달리, 그의 신앙은 (율)법이나 교리, 지식이 환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던진 끊임없는 질문과 믿음에 대한 선언에 대한 마르키온파나 교부들이 수행한 정식화는 부당한 것이다. 요컨대 실체화될 수 없는 것에 형상화를 시도하는 것(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심도 있게 논의된 것이기도 하다)은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니피앙에 가두어 버리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논의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은, ‘a’로서의 진리를 내면화한 히스테리적 주체가 병리학에서 비롯된 많은 부정적인 수사들과는 달리 나름의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바울의 입장에서 신과 통할 수 있는 주체는 거세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주체를 내면화한 주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에 절대로 포획되지 않는 ‘환원될 수 없는 특수성’을 기본으로 한 주체이다. 이를 종교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인 측면으로 전위시킨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보편적 주체가 아니라 각자가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편적인 주체3)가 도출된다. 바울이 강조하듯이, 이러한 존재에게는 피부색도, 성별도, 민족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4). 오직 중요한 것은 신과 마주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위상이다. 그것은 어떠한 조건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서 개인의 특수성은 온전히 보존된다.

알랭 바디우의 바울 재해석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투쟁하는 자들이 항상 실패하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다른 이데올로기로 전환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거나 또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었든)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보완하는 시도만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들은 실은 억압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하진 않는다. 애초에 그것들은 문제의 인식 층위를 억압된 자로서의 보편성으로부터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러한 것들은 (율)법이나 지식의 위치에서 공격을 시작한다. 그곳은 항시 ‘신자’나 ‘국민’ 등의 이름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며, 이름이 전제되지 않으면 공격을 시도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름은 인간에게 덧씌워지는 것일 뿐이지 인간 존재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이름의 덧씌워짐에서 발생하는 보편성은 실은 ‘그’ 보편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일종의 노예의 낙인일 뿐이다. 정치의 측면에서 이름을 갖지 못한 자들, 예를 들어 무국적자나 sans-papier는 이러한 문제 제기의 바깥에 위치한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억압이 실체화되었을 때, 낙인을 전제한 자가 제기한 어떠한 담론들도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으며 거꾸로 그들을 억압하는데 기여할 뿐이다.(사랑의 종교를 주장하는 한국 기독교가 불신자들이나 예외상태에 있는 자들을 동일한 논리로 억압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알랭 바디우가 사도 바울의 말들을 통해 정초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이름 없는 자들의 존재론이다. 법이나 윤리, 지식 그리고 수많은 ‘이름을 부여하는 장치’들로부터 그들의 존재와 그 당위를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타인의 승인(Bejahung) – 존재에 낙인을 찍는 – 이 필요한 ‘창설’하는 존재가 아니라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언하는’ 존재에게 온전히 그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Badiou, A., 현성환 역, 『사도 바울』, 서울: 새물결, 2008.

2) 알랭 바디우가 율법이라는 명사에 괄호를 쳐 (율)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분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명백하게 여기서 그는 종교라는 틀 안에서의 (율)법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버지의) 법’이라는 오이디푸스적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법’이 가지고 있는 강제력, 그리고 그것이 대상에게 명칭을 부여하고 위상을 확정짓는 것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전제가 된다.

3) 이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4) 물론 이는 어떠한 측면에서 강박증의 우유부단함과 유사한 측면이 있긴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강박증이 환유의 방법을 통해 대상의 두 가지 측면을 분할하고 병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주체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면, 히스테리는 은유의 방법을 통해 두 개의 대상을 하나로 통합시켜 양자 모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강박증자가 대상에게 민족이냐 아니냐,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병렬적으로 구분 짓고 논의를 시작한다고 한다면, 히스테리증자에게 대상은 ‘남성이고 또한 여성, 민족이면서 동시에 비민족’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바울의 진술이 히스테리적인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대상의 양가성을 모두 긍정한다는 데서 비롯되며,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유대 담론에서 강조하는 구분의 단계(유대인-이방인 등)를 허물어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