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9 발행
2014년 7월에 일본에서 대만 일러스트레이터 시유(蚩尤)의 <제복지상>의 일본어판이 발매됐습니다. 꽤나 인기를 끌고 있기에, 그리고 일러스트집 치고 그다지 비싸지 않기에(세금포함 2700엔) 저도 한 권 구매했지요. 그림의 퀄리티는 굉장히 좋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집을 만들기 위해서 일러스트레이터가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했다고 하는데, 학교를 직접 방문한 것은 물론 치마의 주름 수까지 조사했다고 하니 엄청난 노력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최근의 일러스트가 수정과 보완이 쉬운 CG방식으로 그려지는데 반해, 이 작가는 수묵이나 수채를 주무기로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작업량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놓인 이 문제에 있어, 그림 속의 소녀들이 한두 가지의 감정만 가지고 있다고 논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이 논의는 교복 판타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림 속의 소녀들이 단순히 예쁘고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교복 미소녀에 꽂히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장에 대해서 논해볼까요. 그림 속의 여학생들은 교복과 학내 동아리 활동복이라는 매우 특정한 복장을 통해 하나의 스탠스를 구축합니다. 몇 가지 꼽아보자면, 먼저 그들이 아직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십대의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것, 그리고 학교(와 더 멀리 나아가 국민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라는 권위체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큼 수동성을 잘 표현하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 그림 속의 여학생들도 어느 정도의 능동성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좀 더 드럼을 잘 치기 위해 연습을 한다든지, 그림그리기 같은 학내 동아리 활동에 정열을 쏟는다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이, 하나의 체제 안에서의, 더구나 그 체제에 더 잘 부합하기 위한 거꾸로 된 능동성을 의미합니다. 따지고 보면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종합해 보자면, 그녀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즐겁게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능동적일 수 없어도 얼마든지 즐겁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들이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 그 양상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1. 수동적 주체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위치시키는 경우
2. 수동적 주체를 통해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로 오인하는 경우
1의 경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의 소녀들의 수동적인 태도 그 자체에 매력을 느껴 완벽한 수동성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물론, 과연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의문이긴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별 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꽤나 마조히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2의 경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의 소녀들의 수동적인 모습과 대비되게 자신이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완벽히 능동적인 자(신?)로 착각하고 맙니다. 1의 경우와는 반대로 새디스틱한 태도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최소한 언어의 ‘보편적’ 체계에 묶여있는 이상 완벽히 능동적인 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소녀와 교복이 만나서 교복 페티쉬를 불러일으킴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벽한 능동성 또는 수동성(그리고 그의 실현불가능성), 그리고 쾌락의 만남인 셈이지요. 결국 실제의 소녀들은 어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그림 속의 미소녀와 교복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도 <제복지상>의 교복 페티쉬에 있어서 실제의 소녀들이 완전히 괴리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의 소녀들이 있음으로 인해 그림 속의 그녀들이 현실에도 실현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그렇기 때문에 광고에서 “실제 교복을 그렸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것이겠지요). 한마디로 실제의 소녀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림 속의 교복 미소녀들의 의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전된 관계를 재차 역전시킨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그림 속의 미소녀들이 무대에 올라선 후에는 꽤나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