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_[제복지상制服至上]의 교복 페티쉬에 대한 짧은 고찰

2014.08.29 발행

2014년 7월에 일본에서 대만 일러스트레이터 시유(蚩尤)의 <제복지상>의 일본어판이 발매됐습니다. 꽤나 인기를 끌고 있기에, 그리고 일러스트집 치고 그다지 비싸지 않기에(세금포함 2700엔) 저도 한 권 구매했지요. 그림의 퀄리티는 굉장히 좋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집을 만들기 위해서 일러스트레이터가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했다고 하는데, 학교를 직접 방문한 것은 물론 치마의 주름 수까지 조사했다고 하니 엄청난 노력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최근의 일러스트가 수정과 보완이 쉬운 CG방식으로 그려지는데 반해, 이 작가는 수묵이나 수채를 주무기로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작업량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이 작품집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야겠군요. 본 작품집은 대만 북부의 54개의 고등학교 교복을 100장에 가까운 일러스트로 그려내어 수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교복도 있지만 과거 ‘일본통치시기(이런 용어를 보면 대만에서 식민지시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도 있을 듯합니다)’의 교복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교복만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게 포인트겠지만요. 그리고 교복뿐만이 아니라 학내 동아리 복장, 예를 들어 마칭밴드, 태권도, 검도복장 등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책은 교복의 문화학을 연구해 보고 싶은 사람이나, 식민지시기 대만 교육에 있어서의 일본의 영향을 연구하고 싶은 사람, 또는 복장도착자들에게 딱 맞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조금 다른 미소녀 그림체 스타일을 연습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괜찮겠네요. 이 책의 미덕은 위와 같습니다. 미덕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악덕도 있을진저, 그렇다면 이 책의 악덕은 무엇일까요? 물론 일러스트집의 테마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여성성의 상품화 같은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아쉽게도 제 깜냥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도착적인 태도를 가지게끔 하는지 잠시나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교복 판타지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겠다는 것이지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이미지를 보고 거기에 정신 에너지를 너무나 쏟아 부은 나머지 원래의 인간 여학생을 뒷전으로 밀어버리고 이미지를 진짜처럼 여기게 되는 것. 물론 이것은 물신주의자들에게는 미덕일 수 있겠으나 우리 같은 대부분의 신경증자들에게는 분명한 악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신성모독인 셈이지요. 여튼 시작해 보지요. <제복지상>에 그려진 소녀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누구라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것은 불쾌의 감정이라는 것이 모두 삭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요약해 보자면 모두들 행복하거나, 우수에 빠지거나, 당찬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찌푸린 표정도 있으나 그것은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이 아니라 단순한 투정 정도에 머물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이에게 언제든지 납득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되지요. 요컨대, 그림 속의 그녀들은 보는 이를 웃음 짓게 할지언정 기분 나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실제의 인간은 어떨까요. 어떤 인간이든 화도 내고, 웃기도 하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가지곤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대상을 표현함 있어서, ‘희’를 제외한 나머지 감정을 모두 소거시켜 버린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체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의 태도로 읽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을 ‘희’를 위한 하나의 도구 정도로 여기게 됨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의 소녀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필연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앞에 놓인 이 문제에 있어, 그림 속의 소녀들이 한두 가지의 감정만 가지고 있다고 논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이 논의는 교복 판타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림 속의 소녀들이 단순히 예쁘고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교복 미소녀에 꽂히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복장에 대해서 논해볼까요. 그림 속의 여학생들은 교복과 학내 동아리 활동복이라는 매우 특정한 복장을 통해 하나의 스탠스를 구축합니다. 몇 가지 꼽아보자면, 먼저 그들이 아직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십대의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것, 그리고 학교(와 더 멀리 나아가 국민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라는 권위체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큼 수동성을 잘 표현하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 그림 속의 여학생들도 어느 정도의 능동성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좀 더 드럼을 잘 치기 위해 연습을 한다든지, 그림그리기 같은 학내 동아리 활동에 정열을 쏟는다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이, 하나의 체제 안에서의, 더구나 그 체제에 더 잘 부합하기 위한 거꾸로 된 능동성을 의미합니다. 따지고 보면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종합해 보자면, 그녀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즐겁게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능동적일 수 없어도 얼마든지 즐겁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들이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 그 양상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1. 수동적 주체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위치시키는 경우
2. 수동적 주체를 통해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로 오인하는 경우

1의 경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의 소녀들의 수동적인 태도 그 자체에 매력을 느껴 완벽한 수동성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물론, 과연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의문이긴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별 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꽤나 마조히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2의 경우,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의 소녀들의 수동적인 모습과 대비되게 자신이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완벽히 능동적인 자(신?)로 착각하고 맙니다. 1의 경우와는 반대로 새디스틱한 태도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최소한 언어의 ‘보편적’ 체계에 묶여있는 이상 완벽히 능동적인 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소녀와 교복이 만나서 교복 페티쉬를 불러일으킴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벽한 능동성 또는 수동성(그리고 그의 실현불가능성), 그리고 쾌락의 만남인 셈이지요. 결국 실제의 소녀들은 어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그림 속의 미소녀와 교복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도 <제복지상>의 교복 페티쉬에 있어서 실제의 소녀들이 완전히 괴리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의 소녀들이 있음으로 인해 그림 속의 그녀들이 현실에도 실현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그렇기 때문에 광고에서 “실제 교복을 그렸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것이겠지요). 한마디로 실제의 소녀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림 속의 교복 미소녀들의 의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전된 관계를 재차 역전시킨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그림 속의 미소녀들이 무대에 올라선 후에는 꽤나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악덕 이야기만 해서 좀 그런데, 어찌 되었든 <제복지상>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름의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보고 있으면 꽤 괜찮기도 해서, 잘 샀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만 도대체 “꽤 괜찮은” 감정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생각을 한 번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