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_좀비라는 표상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2013.04.11 발행

좀비라는 표상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 맥스 브룩스의 『세계 대전 Z』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를 중심으로

이슬비는 그의 글 <하드고어와 좀비-공격본능의 배출구>에서 최근 대중문화 생산물에 자주 등장하는 ‘좀비’라는 대상에 대해 흥미있는 분석을 시도하였다. 본문은 거기에 덧붙여 좀비라는 표상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자 할 때 어떠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서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포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포는 언제나 어떠한 대상을 통해서 발현된다. 그것은 물건이나 사람일 수 있고, 또한 어떠한 분위기나 관념과 같은 추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한 것들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로 하여금 혐오감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공포감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무서워하고 그것을 배척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시간과 재화를 소비하여 공포감을 느끼러 공포 영화나 소설을 탐닉하게 됨은 공포의 대상이 가진 양면적 성질, 즉 혐오스러우면서 매력적인 느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발자국 물러나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대상들이 그저 주체에게 공포만을 부과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체 자신의 성격을 보다 적절하게 규명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가 삶의 의지로 충만한(혹은 충만해 보이는) 무엇이라면, 공포의 대상은 생의 의지로 기울어져버린 평행추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존재이며 주체가 갖은 노력을 기울여 암점화(暗點化)해왔던 죽음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그자신이 유한자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해주는 어찌 보면 매우 소중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공포의 대상은 극복의 대상일 수 있으며, 생의 의지라는 명제와의 투쟁을 통해 내적인 변증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해 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적대를 통해 주체를 환대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금 더 모호하다. 분명히 말하건대, 모든 공포의 대상이 적대로서 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모호함에 둘러싸여 그 자신이 적대의 대상인지 환대의 대상인지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이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다. 그에 대해 베트남 전쟁 당시의 게릴라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들의 많은 수기에서 참전 군인들은 그들 앞에 걸어가는,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필부필부가 과연 적인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하는 대상인지에 대한 판단을 계속해서 보류해야만 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미 라이에서의 학살은 이러한 보류 행위가 중단되고 그들을 공포의 대상, 즉 적으로 간주하고 일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반적인 전투 행위보다 ‘비인간적으로’ 잔학했다. 왜냐하면 비전투원이 틀림없을 일련의 사람들, 즉 초로의 노인이나 아이들까지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반적인 교전 규칙에 어긋난 잔학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미 라이의 미군들이 베트남인에게 행사한 무분별한 폭력은 앞서 논한 긍정적인 적대의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일정한 수준을 설정하여 놓고 인식의 대극쌍 저편에 있는 일종의 라이벌과의 경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교전 행위의 수준을 넘어(이러한 경쟁에서는 통상 전투원이 지정되어 있고 항복이나 기권 등의 투항의사를 수용한다) 가장 원초적인 단계까지의 말살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교전 규칙에 따라 군사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었다. 미군들에게 있어 학살당한 베트남인은 애초에 게임에 참여한 상대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뒤엎으려고 하는 불가해한 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게임의 상대가 아닌 이러한 악 그 자체로서의 적은 앞서 말한 주체의 변증 요인으로서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인식체계를 부정하는 무한대의 공포의 대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마이클 무어는 그의 <화씨 911>에서 미국인이 그동안 가졌던 공포의 대상들을 추적한다. 그것들은 때로는 살인 벌Killer Bees이었으며 때로는 지구 종말과 같은 천재지변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공포의 대상의 지위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그의 통찰은 유머러스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라는 일련의 표상들이 가진 특성이 치명적인 것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즉 주체와 그의 영역에 불현듯 위협을 가할 수 있으며, 그것이 주체가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공격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체를 죽음조차 허용되지 않는 완전한 비결정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좀비화’가 그것이다.

최근에 좀비라는 표상은 그것이 원래 발생한 부두교의 종교적 의미보다는 최근의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능이라고는 없으며, 단순히 인육을 먹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괘념치 않고 인간에게 돌진하는 이 특이한 존재들은 각종 창작물 등을 통해 현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내었다. 이러한 좀비의 인기를 설명함에 있어 그것이 단순히 흥미로운 악덕의 표상만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좀비가 현대 사회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 그것이 가진 성격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에 있다.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바알세불과 같은 고전적인 공포의 대상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를 지배한다든지, 인간과 동일한 위치에 서기를 원한다든지와 같은 이유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좀비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달려드는 것도, 인육을 먹는 것도 그들의 목적은 아니다. 지금부터 논하게 될 맥스 브룩스의 좀비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생명 유지를 위한 것도, 쾌락을 위한 것도 아니다1). 그들은 그저 공격할 따름이다. 어떠한 앎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에서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좀비가 가리키는 의미의 공백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의 공포의 대상보다 좀 더 강력한 공포의 대상이 되어 현실에 나타난다.

맥스 브룩스, 『세계 대전 Z』

2. 모순의 투사

프로이트가 발견했듯이, 인간이 어떠한 대상에게 공포심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 자체가 원래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인간이 대상을 접하는 관계 그 자체이며, 공포심은 이러한 관계 사이에서 인간에게 내재한 일정한 메커니즘에 따라 산출된다. 프로이트는 투사(Projektion) 기제에 대해 설명하며, 주체가 자신 안에 있는 정동(Affekt)의 과다한 양을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러한 정동을 외부의 대상에 덧입혀 마치 그것이 대상이 본래적으로 가진 것처럼 여김으로써 자신을 모순에게서 떨어뜨려 놓는 것이 투사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라 말한다. 투사는 그저 부정적인 모순들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 또한 반영한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인간이 그동안 대상의 성질이라 생각해 왔던 것은 주체가 가진 정신의 메커니즘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투사 행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선 논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포의 대상이 출현함은 주체가 그 안에 가진 공포의 정동을 억누를 수 없어 그 대상에 자신의 정동을 덧칠해놓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관찰해 보자면, 공포의 대상은 순전히 공포를 느끼는 주체에게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포의 대상은 공유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꼬마 한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가에게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이에게 있어서 코웃음치게 만드는 대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이상의 심급, 즉 초자아의 형성에 따라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 인간은 집단에 속하게 되면서 집단의 공포의 대상을 가지게 된다. 초자아, 즉 아버지의-이름이 선이나 악의 틀로 규정해놓은 것들 안에서 악의 위상을 가지는 것이 이들에 해당된다. 기독교 교회가 사회의 헤게모니였던 시기에는 사탄이나 바알세불, 이교도들이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냉전 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 이것의 직접적인 예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 내에서, 신이나 악마의 존재가 인간으로 하여금 변증의 단초를 마련한다고 하며 소련이나 미국이 서로를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적대시하면서 서로의 변증을 이끌어내었다고 한다면, 동시대의 상황은 이러한 식으로 쉽게 논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신-악마나 미국-소련과 같은 대칭적인 차원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의 군사 전략이 국가간의 대칭성 안에서의 시간이나 화력, 기동력 등의 비대칭성을 찾아내어 전략과 전술에 응용했다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종잡을 수 없는 비대칭적인 것 안에서 그저 헤메이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적대하는 상대, 즉 공포의 대상이 알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미 라이의 베트남인들이 전투원인지 민간인인지 판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윌리엄 켈리 중위를 비롯한 미군들에게 닥쳐든 공포심은 비대칭성 안에서 헤메이는 주체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자신의 앞에 놓인 그 무엇도 알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이는 주체의 안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떠한 심급을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주체의 정합성이 무너지게 될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에게 있어서 그것에 대한 최선의 방어 방법은, 이러한 자신 안의 허무를 외부의 것에 투사하고 그것을 말살하는 방법일 것이다.

같은 식의 말살이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9/11 이후로 대유행하기 시작한 좀비 소재의 창작물들이 그것이다. 좀비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리처드 매드슨이 『I am the legend(1954)』를 통해 좀비의 표상을 전면에 내세운 이후로(그러나 그는 ‘좀비’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다), 이후 조지 로메로가 <The night of the living dead(1968)>와 <Dawn of the dead(1978)>로 그것의 표상을 확립시켰다. 이후의 거의 모든 좀비를 대상으로 한 창작물들은 로메로를 기점으로 하여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추세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근 10년의 사이에 좀비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 폭증하고 또 적극적으로 향유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위와 같은 관점에서 그러한 창작물의 향유자들이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자신 안의 공포의 대상을 외부로 투사하는데 익숙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또한 지금-여기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사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물들에서 제시된 좀비의 표상은 한 개인의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회적인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이 개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말살해야만 하는 적’이라는 점에서, 그 개인들을 묶어내는 이데올로기의 심급 내의 참을 수 없는 정동, 즉 이데올로기라는 아버지의-이름이 감내하지 못하는 일종의 모순을 좀비라는 상상의 대상에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적대 행위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미화된다. 그 이유는 좀비에게 쏟아내는 격렬한 적대의 감정과 행동이 이데올로그에게 있어 이데올로기의 내적 정합성(또는 폴 포트와 같은 독재자들이 이야기하는 ‘순수성’)을 추구하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적대 행위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좀비를 몰아낸다 하더라도 좀비는 계속해서 출현할 것이다. 그것은 앞서 논했듯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순과 말할 수 없는 비식별 영역을 대상에 투사시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9/11 이후에 좀비 소재의 창작물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발맞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간의 분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군사 활동은 그것의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법의 영역 안에서 감내할 수 있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행위화(Passage-a-l’acte)로서 그러한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비식별의 영역들, 즉 민간인을 군인으로 간주하고 벌어지는 학살이나 비정규군에 의한 산발적 공격 또는 테러 행위는 법적 주체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정동, 즉 주이상스를 표면화한다. 이러한 것이 앞서 말한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했을 때, 주체는 그것을 완전히 말살해야만 자신의 내적 정합성을 보존할 수 있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비식별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예외로 규정하고 가용 범위 내에서 최대의 무력을 동원해 다시금 그들을 식별의 영역으로 가져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식별의 존재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테러리스트로 등장했다면,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좀비의 형태로 출몰하고 있다. 이들은 법적 주체 또는 거세를 받아들인(아버지의-이름이라는 법을 내면화한) 인간에게 있어서 법 이외의 영역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강렬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병렬에 놓고 그들의 비식별성에 대해 숙고함은 현대의 주체들이 마주친 문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3. 대상으로서의 좀비

좀비를 지칭하는 조지 로메로의 유명한 표현, 즉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는 분명 모순적이다. 그것은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하며(either), 동시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neither). 수식하는 형용사와 수식되는 명사는 서로를 밀어내며 또한 포용한다. 이러한 언어의 모순적인 배제와 포섭은 ‘살아 있는 시체’가 항시 물음표로만 존재하는, 즉 알 수 없는 대상임을 환기시킨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시체’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 가능한 범위의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그러한 비결정성의 한 기표라는 점에서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따라서 공포의 원인인 실재의 침입을 지시하는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 맥스 브룩스의 세계관 – 즉 인간과 좀비가 존재하는 세계 – 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북』에서 그는 좀비가 ‘알 수 없는 것’임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살아 있는 시체가 인육을 먹으려 하는 것도 식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 영위해야 하는 조건들, 즉 산소나 수분, 휴식과 같은 요소들도 살아 있는 시체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살아 있는 시체는 어떠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끝내 분석할 수 없는 어떠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좀비의 포지션은 명백한 존재, 즉 인간과의 대비를 통해 보다 선명해진다. 하나의 명백한 기표로서의 인간은 그 한계가 명확히 정의된 존재이다. 그러나 좀비는 무한하다. 죽지 않으며, 지치지도 않고, 무엇보다 끊임없다. 인간이 정의된 주이상스, 즉 쾌락 추구적이라 한다면, 좀비는 보다 광범위한 쾌락을 추구한다. (소화시키지도 못하면서)인육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치운다든지, 인육 섭취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몸을 부수기도 하는 성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에는 어떠한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좀비들은 ‘그저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에’ 달려들 뿐이다.

인간과 좀비 사이의 긴장감은 모순된 어법 사이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인간은 좀비가 될 수 있지만 좀비는 다시 인간이 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결정적인 것은 해체되어 비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한 번 해체된 비결정성은 다시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실재를 떠돌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좀비의 이러한 대조는 실은 민주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입장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체계 내에서의 인간은 하나의 위치를 점유한다. 라캉이 그의 성차 구분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 것, 즉 “∃x Φx / ∀x Φx(모든 것은 팔루스에 종속되나, 동시에 팔루스에 종속되지 않는 예외가 존재한다)”에서의 주체가 그것으로, 종속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자장 안에서 하나의 위상을 점유한다. 반면에 좀비는 “∃x Φx / ∀x Φx(모든 것이 팔루스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며, 예외는 없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에서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특성과 유사한데, 횡적 주체는 모두가 하나의 투표권을 가짐으로써 예외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동일한 기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어떠한 종적 구분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이 보다 첨예하게 대두되는 것은 종적 주체와 횡적 주체가 실은 한 개인이 가지는 두 개의 주체라는 것이다. 라캉의 테제로 돌아가자면, 남성성에서의 거세된 주체는 여성성의 테두리 안에서 실재적인 환상, 즉 ?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주체의 스탠스는 종적 주체가 사고의 기반으로 가지고 있는 팔루스(Φ)를 무자비하게 해체하여 부재하는 것(La)으로 치환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횡적 주체는 종적 주체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근본적 틀을 파괴해버리는 치명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좀비에 대해 품는 공포심의 근원적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은 결정성을 정초하는 팔루스의 자장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맥스 브룩스의 등장인물들이 좀비에게 물린 후 자살을 택하는 것은, 죽음조차도 하나의 결정된 상태로서,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비결정적인 것이 되는 것 보다 인간에게 더 큰 안도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자살에는 최소한 두 가지 함의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유기체로서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끊어 내는 것이며, 두 번째는 상징으로서의 주체를 종료시키는 것이다. 전자가 생명 이후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한 종결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후자는 오히려 상징으로서의 주체가 더 이상 변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남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뒤르켐이 제시한 자살의 유형들을 관찰해 보자면, 자살이라는 것이 단순히 생의 종료가 아니라 무언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발적인 죽음의 대의, 즉 변치 않는 상징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자살은 오히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종말의 의미가 아니라 영생 또한 뜻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상징적 자살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역설을 드러내는데, (문학 작품에서 오랫동안 논해온 것과 같이)상징적 의미에서 이들은 죽음으로서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좀비에게 공격당한 희생자들의 자살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상징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는 선언인 셈이다.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고서 그들은 그들이 곧 마주치게 될 비결정성, 즉 의미의 종말 -좀비화- 을 버텨낼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좀비에 대한 공포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 대한 공포라 해야 한다. 그러나 ‘의미가 존재하지 않음’은 단순히 의미가 없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비라는 표상이 내포한 의미는 알아내거나 읽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언어라는 법을 내면화한 인간에게 있어 좀비가 가진 의미는 어떤 언어로도 해석할 수 없는 언어 바깥의 의미인 셈이다. 이것이 어떠한 결정성에 의해 포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라는 법을 내면화한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공허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의미에서 좀비에게 투사된 것과 같은 비식별성이 투사된 현실에서의 대상들은 법적으로 포획되지 않는 이중적 대상들이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직, 남성이면서 여성이기도 한 동성애자, 군인이면서 군인이 아닌 하마스 게릴라와 같은 존재들은 좀비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들이 일반적인 결정성의 존재들, 즉 정규직 노동자, 이성애자, 정규 군인과 같은 행위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결정성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이미 그들이 표면화한 인식의 공백은 그들을 보는 주체로 하여금 그들의 표상을 알 수 없는 것으로 확정 지으며, 20세기 초 유럽의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체제에 복속되려는듯한 그들의 시도는 이질적인 것(Das Unheimliche)이 되어 오히려 그들을 속박하려는 단초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들에게 부과되는 이러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조치는 ‘대책(Maßnahme)’이라 불러야만 할 것이다. 그것들은 주체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심연 아래 있어야만 하는 존재들이며, 그들을 인식의 지평에서 몰아내지 않고서는, 혹은 완전히 말살하지 않고서는 주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좀비에 대한 대책들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가 좀비에 의해 그 기능을 상실한 후 인간들이 좀비를 몰아내어 국가들을 정상화한다는 점에서 『세계 대전 Z』는 이전의 좀비 창작물과는 조금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좀비 창작물들은 종말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세계는 좀비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군대, 경찰, 병원 등의 기관은 좀비로 인해 무너져 내린다.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도망치는 것뿐이다. 그에 반해 『세계 대전 Z』에서는 살아남은 이들이 규합하여 좀비들을 제압하고 원래 세계를 복원해 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는 끝까지 그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다. 대혼란의 순간에서조차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며, 생존자들은 국가를 통해 좀비에게 저항한다. 물론 개개인들의 생존 투쟁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통합되어 어떠한 집단의 힘으로 분출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맥스 브룩스의 이 소설이 가진 흥미로운 점이다.

좀비의 창궐은 모든 국가에 위협이 되었다. 각국에서 발생한 좀비의 수는 군대가 통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으며, 어떤 최신식 무기로도 제압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가상의 인물들의 입을 빌어 서술해 낸다. 특히, 냉전 이후 미국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해 만들어 낸 공군력이나 지상군의 랜드 워리어 시스템과 같은 것은 좀비를 상대함에 있어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제공권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공군력은 단순히 많은 기름을 소비하는 별반 쓸모없는 세력일 뿐이며, 랜드 워리어 시스템의 통신 장비는 전투원간의 소통을 용이하게 하기보다 패닉을 보다 널리 전파할 뿐이라는 것이 이 가상의 인물들이 말하는 것의 요지이다. 이들은 오히려 고전적인 무기들, 예를 들어 도끼나 삽 같은 것들이 좀비를 제압하는데 있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맥스 브룩스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칼은 재장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의 계획을 만들어 낸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입안자라고 설정된 폴 레데커가 만든 계획, 즉 ‘레데커 계획’이 그것인데, 그의 내용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통용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국가의 무한정 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이 골자이다. 예를 들자면 국가의 모든 기반시설은 생산을 위주로 재편되어야 하는데, 개인의 소비 품목은 오로지 재래식 무기 생산을 위해 억제되어야 한다. 차량은 군용으로 징발되어야 하고, 사치 품목은 엄금되며 오로지 좀비와의 전쟁에서 필요한 물품만이 생산되어야 한다. 단순히 물건만이 재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력들, 예를 들어 증권사 직원이나 엔터테인먼트 관련직 종사자 같은 사람들은 군인이 되거나 농부 또는 공장 직공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러한 식으로 인력과 자원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면, 레데커 계획이 확립하는 법질서는 인간의 생명에까지 관여한다. 좀비에 의해 고립된 인원을 구해주는 것은 의무가 아니며, 오히려 수뇌부의 존속을 위해서 좀비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일련의 사람들을 일부러 고립시키는 것도 정당화된다. 말하자면 총체적으로 예외 상태가 된 세계를 다시금 정상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법 자체가 예외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 이러한 시도들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좀비 창궐 사태가 일단락이 된 후에 국가는 레데커 계획과 그 법들을 폐기한다. 그러나 만일 또다시 좀비가 창궐하게 될 경우 다시금 레데커 계획이 수행되게 될 것은 명확하다. 레데커 계획은 예외 상태에서만 적용되는 한시적인 법이지만 또한 감내할 수 있는 예외적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그곳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맥스 브룩스가 기록한 역사상의 많은 사건들에서 드러나듯 좀비가 어느 때건 항상 존재해 왔음은 예외 상태에 적용되는 법이 잠재적인 가능태로서 항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극단적인 법으로서 레데커 계획은 예외 상태를 규정하는 법의 힘과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데커 계획은 단순히 대중 소설 안에서의 이야기 뿐만은 아니다. 그것이 비결정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레데커 계획은 현실의 법과 정치의 투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9/11 이후에 제정된 애국법(Patriot act)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애국법이 소설상의 레데커 계획만큼 허황되진 않지만, 그것만큼은 극단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애국법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들, 즉 영장 없는 체포와 가택수색, 연금, 도감청의 합법화 등이 소설에서의 레데커 계획의 중요한 지점들을 그대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말하자면, 레데커 계획이 법의 무한정적인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한다면, 애국법 또한 유사한 관점에서 생물체로서의 인간 자체로까지 법의 적용 영역을 확장시킨다. 말하자면 생명으로서의 주체인 인간의 영역과 법적 주체인 시민이 서로 분할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의 힘도 생명으로서의 주체인 인간의 영역, 즉 인권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현대적 윤리 법칙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가치가 실은 미국이 북한이나 이란, 이라크와 같은 국가들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에게 있어 애국법의 대상, 즉 테러리스트들의 위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좀비나 다름없다. 좀비들이 무한대의 폭력을 통해 예외 상태를 추동해 내었듯이, 테러리스트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예외 상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인간, 또는 미국은 좀비, 혹은 테러리스트와 같이 무한정의 법적 권력을 승인함으로써 예외 상태를 진압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들은 남는다. 맥스 브룩스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말한 것처럼, 왜 좀비들은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발생하는가? 또는 동일한 차원에서 테러리스트들은 왜 격멸되지 않고 계속하여 발생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대답은,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대책이 근본적으로 법이 잡아낼 수 없는 영역 안에서 방향성을 잃고 맴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 혹은 좀비의 ‘현존하는 위협’은 실은 추상성 그 자체이다. 어떤 명료한 정의 자체가 불가능한 이러한 지점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것의 존재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주체로서의 시민(혹은 국민)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자 상처로서,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울 지라도 힘겹게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려야만 나머지의 기능이 정상화할 수 있는 일종의 약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근본 환상인 셈이다. 요컨대 테러리스트, 혹은 좀비의 표상은 실은 주체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것이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반면 그것으로 인해 나머지 대다수의 기능이 올곧이 작동한다. 인간이 되기 위하여 주체는 비인간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차이와 분별로 인간의 자아를 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만 한다. 비인간적인 것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인간은 사고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폭력을 이용해 그것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 정치에서 소수자나 테러 용의자 등에게 벌어지는 국가의 과다한 폭력들, 그리고 좀비에게 투하되는 무자비한 폭력은 이러한 비결정성을 감추기 위한 국가의 암점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암점화는 항상 잔여물을 남기고, 그것이 언제든지 돌연히 주체의 앞에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잠깐 동안의 유예만이 있을 뿐이다.

5. 결론

그간의 역사에서 인간은 수많은 공포의 대상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그러한 공포의 대상들은 인간의 인식 체계에 있어 양가적인 입장을 가졌다. 때로 그것은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에는 일정한 이유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공포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공포심을 가지는 행위는 곧 공포스러운 상황에 적응하여 공포감을 점점 무디게 만들기 위한 시도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자신에게 어떠한 과제를 부여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자아의 변증을 유도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일 수 있다. 여기에는 자아라는 일정한 틀이 존재한다. 초자아의 통제 하에서 지각 동일성과 사고 동일성을 획득한 자아는 그러나 무어라 하기 어려운 비결정적인 대상을 접하게 될 경우 상기한 변증의 촉매로서의 공포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주이상스로서의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가해한 공포감이 투사된 대상에게는 어떠한 관용이나 인간적인 대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보편성도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기 때문이며, 말 그대로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애매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비결정적인 대상이 주체에게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의 대상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은 주체의 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로 넘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주이상스의 과잉을 억제하기 위해 외부 대상으로의 투사라는 기제를 통해 주체의 자아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투사된 정동이 투사된 대상의 본질과는 무관한 오롯이 주체만의 것이라는 점은 하나의 결절점을 만들어 낸다. 정치적 맥락 하에서 이러한 결절점들은 오늘날 잠재적 테러리스트나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는데, 어디까지나 이것은 그러한 일반인이라는 자들의 내면에 위치한 환원 불가능성, 즉 아버지의-이름이 가진 자체적인 모순이나 체계의 공백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집단의 차원에서 향유되는 비결정적인 공포의 대상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 좀비와 그것의 유행은 9/11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표면화시킨 체제의 비결정성을 투사의 형태로 하나의 대상에 쏟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의 표상에 부여된 특성들은 기능적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식욕과는 무관하게 섭취하며,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지도 않다. 그것은 생명체와 유사하나 생명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기존의 악당 혹은 악마들과는 달리 인간은 좀비가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 자신이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좀비를 만들어낸 인간의 욕망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분명 반데카르트적 동어반복이라 할 수 있을 이러한 명제에서 주체가 하나의 완전한 타자 – 즉 완전히 모르는 것,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알고 싶지 않은 것 – 를 설정하여 그곳에 자신의 모순을 투사함으로써 사고 동일성의 회복을 시도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좀비에 대한 공격은 또한 정치적인 차원에서 비결정적인 일련의 인간들에 대한 법적 포획의 시도와 유사하다. 좀비 창작물에서 좀비들을 관찰하는 것은 좀비를 이해하려는 시도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들을 절대적인 예외로 상정하여 자신의 가치 기준의 스펙트럼에서 최악을 만드려는 시도인 것이다. 다시 9/11을 상기하자면, 이슬람 테러 용의자들에게 부과된 일련의 호칭들은 그들의 표상을 극단적으로 예외화함과 동시에 그것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인식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배제로서의 포괄’이 작동하는 것인데, 그것은 공백에 하나의 표상을 부여하여 그것을 완전한 적대의 대상을 만듦으로써 주체의 인식 틀을 유지하려는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좀비에 대한 공격은 주체가 가진 인식 체계의 보수성을 반영하듯이 매우 조직적이다. 『세계대전 Z』에서는 좀비가 횡행하는 지역을 다시금 탈환하기 위해 인간들이 일련의 방법을 동원한다. ‘레데커 계획’이라 통칭되는 기본 규칙에서 파생된 방법들은 국가 기관 또는 수뇌부에 무한대의 권력을 부여한다. 그들은 고립된 지역의 인간들을 레데커 계획에 따라 합법적으로 ‘포기’할 수 있으며, 시민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법적 권리들을 임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9/11 이후에 미국이 테러범 또는 ‘테러 국가’들에 대한 대책으로 만들어낸 애국법(Patriot act)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애국법은 국가의 존립(혹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음을 명시한다. 예를 들자면 특정한 상황에서는 도-감청이 허용되며, 일련의 심증만으로 한 사람을 구금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테러의 예방 및 대응’의 수준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대책들은 표상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 가리키는 주체 안의 공백의 지점을 암점화하려는 주체의 몸부림이다. 이러한 표상들을 레데커 계획이나 애국법 등으로 억제한다 하더라도, 주체 내부의 공백의 지점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또 다른 모호한 대상에게 들러붙어 다시금 허무에서 비롯된 환상적 공포를 상기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오롯이 인식 체계의 문제로 회귀한다. 인식 체계, 즉 주체는 아버지의-이름에 의해 구조화된다. 그것의 프로이트적 용어, 즉 거세(Kastration)는 단어 자체가 가리키듯이 무언가를 잘라내는 행위이며, 잘려나간 그것은 단순히 신체의 일부나 사물의 어느 부위가 아닌 물자체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기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세는 이렇듯 원래의 ‘충만한 허무’를 탈각시키고 인식의 체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곳에는 일련의 잔여물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잔여물들은 항상 인식의 체계가 해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가리키고 존재 그 자체로서 인식 체계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주체에게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어떠한 대상에 투사하여 파괴하거나, 눈을 돌리거나, 부인하는 등의 방어 행위들  뿐이다. 그러나 그 어느 대책 또한 완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체가 참을 수 없는 잔여물들은 어디까지나 ‘충만한 허무’라는, 비가시적이고 존재를 인지할 수 없는 모호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잔여물들이 세계로 투사되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적을 찾아낸다. 물론 그 적에게는 동정도, 용서도 허용될 수 없다. 오직 말살만이 그 적의 의미를 완벽하게 만든다. 그러나 완전한 적은 언제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을, 문화의 영역에서는 좀비나 외계인, 이단 신봉자의 이름을, 정치의 영역에서는 탈레반이나 적군파라는 이름을 가질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어떻든,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든 그들은 모두 한 가지의 공통적 기능, 즉 법이나 인식 체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마치 좀비가 창궐한 세계에 홀로 서 있는 인간과 같은 상황에서, 그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오롯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주체에게 던져진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