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_최근의 논쟁에 대한 몇 마디 잡소리

2014.04.08 발행

최근 토론회와 SNS, 예술 잡지의 칼럼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재론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이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동감하고 동시에 어처구니를 잃고 있으며이로 인해 예술 전반에 환멸마저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그들의 말들은 맞고 동시에 틀리다모순적이라거나 양비론/양시론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정말로 그러하다이는 그들이 서로 다른 입구로 문제에 들어갔으며 나름의 출구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생각된다하지만 그 중에서도 몇 가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여기서는 그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한다.

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애매하게 만드는 화법들에 대해

확실히 하자예술은 노동이 아니다즉 예술=노동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그보다는 노동은 예술을 가능케 하는 예술행위 그 자체거나 최소한 그의 필요조건이다인간이 몸을 움직여서 어떤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행위는 노동이라 불려 마땅하다아니그게 노동 맞다그런 노동을 투자해 작가는 작품행위에 임한다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쨌든 노동이 없다면 작품은 애초에 만들어지지 조차 못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애써 동어반복을 하자면작품 활동에 있어 노동은 필수불가결하다 할 수 있겠다그래도 작품제작이 노동과 같은 천한‘ 단어와 연관되는 게 싫다면노동 없는 작품제작이 가능함을 증명하면 될 일이다가능할까 모르겠다만.

만약 작가의 작품을 어딘가에 전시하기로 했다면이런 노동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런데 이건 작품의 대여비와는 별개의 것이다. ‘대여비는 말 그대로 작품을 빌리는 데만 한정된다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은 작품이 대여되거나 팔리는 것과는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작가는 단순히 작품을 쌓아놓고 빌려주는 대여업자나 작품 소매상이 아니라 작품생산행위의 주체이며그의 노동행위로 인해 작품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따라서 기 수행된 노동에 대해서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그 대가를 인정해 줘야 한다당위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만약 현대미술이 작업과정조차 작품화 했다면그러니까 그 작업과정 또한 작품의 일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면, 당연히 작품을 대여하는 데 작업과정에 해당하는 노동행위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실무적인 차원에서 이 경우에는 대여비의 세부항목란에 작업비를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헌데 그것 뿐만이랴그 외에도 요구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외국은 잘 모르겠다만 최소한 한국 미술계는 너무 많은 작가의 노동을 암점화 시켜왔다예컨대 하나의 전시에 그 외의 비용예컨대 운반비설치비보관비작품설명문 작성해설비 등등이 뒤따른다는 것은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결코 전면적으로 문제 삼지 않고 있다.그나마 몇 푼 안 되는 실비를 받으면 다행이다중견작가도 그러할 텐데당장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한 번의 전시가 아쉬운 젊은 작가는 오죽할까.

물론 기획하는 측의 입장도 무시할 수는 없다예산은 없는데 어쨌든 신진작가를 한 명이라도 미술계에 소개시키는 데 의의를 둔다면돈을 주지 못하는 것이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것그 사명감에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울림이 있다그러나 그러한 사명감에도 불구하고앞으로의 예술창작 생태계를 위해서는 작가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시면서 예산 범위 내에서 사업을 운영하시라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등용문이라든지 앞으로를 위해서’ 같은 말로 공수표 남발해봤자 좋을 것 없고무엇보다 작가가 그의 노동을 인정받아야 하는 분위기를 정착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작가는 독야청청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들에 대해

혹자는 금전과 같은 세속적인 문제로부터 작가가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그런데 감히 내 개인적으로그건 작품을 취급하는데서 오는 극히 세속적인 이윤추구에만 국한된다라고 하고 싶다쉽게 말하면 그건 미술작품 판매상들이 흔히 하듯이 작품을 통한 재테크와 같은 투자나 투기행위에 한정된다는 거다그런 게 아니라면 구상을 하고재료를 구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작품을 제작하는 데 대한 권리 주장으로서의 금전적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내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동을 이만큼 했고작품이 전시되거나 매각될 경우 그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 (사족이지만이는 절대로 사례비가 아니다사례謝禮를 한다 함은 통상 고마움이나 감사함을 물질을 빌어 표현하는 것인데역으로 말해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례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다는 뜻이 되겠다그보다는 인건비나 작업비등의 권리의 뉘앙스를 동반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의 관례와는 차이가 있다유구한 예술의 역사에서예술가의 작품 창작행위가 ()노동으로서 인정받은 선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왜냐면 예술은 천재가 하는마치 신과 접하는 것과 같은 고귀한 것으로금전과 같은 것으로 절대 치환될 수 없다고 이야기되어왔기 때문이다맞는 말이다예술은 정말로 고귀하며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다그러나 그것을 만들기 위한 노동만은 치환 가능하다예술작품을 둘러싼 모든 노동행위 또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인정받아야만 한다이는 물론 선례가 많지 않지만선례가 적다고 해서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오히려 새로운 선례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할 것이다꾸준히.

작품 행위에 금전을 요구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대해

분명히 신자유주의는 노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그런데 이는 그 이전까지의 양상즉 노동을 억압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거두절미하고신자유주의는 노동을 천한 것 정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노동을 엄청나게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라든지 두 번 다시없는 하나뿐인 일” 등등의 표현을 붙여서막상 이런 말을 들으면 귀가 솔깃해진다그러나 실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은 돈을 안 받아도 되는 경험이 되며, “두 번 다시없는 하나뿐인 일은 이런 좋은 경험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린다그래서 무급은 당연하게 되어버리고 만다무급인턴노력봉사재능기부대가없는 전시참여… 신성화된 노동과 그를 정당화하는 유사신학적 깔대기 논리는 무급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만들고오히려 유급을 적그리스도신자유주의의 도래로 만든다거꾸로 된 일이다그리고 그건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그게 웃기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진짜 최악이라 할 수 있는.

그런데여기서 누가 기성세대이고 누가 기득권인가내가 보기에 이 일은 기성신진기득권비기득권의 구도가 적용될 수 없다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노예 간의 갈등이라고여기서 기성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억울하다돈도 없고흔히 말하는 권력이라는 것도 공고하지 못하며예술에서도 뭔가 큰 것을 이루었다고 말하기가 힘든 상황의 그들은화난 얼굴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명 신진들의 지적이 영 마뜩찮은 모습이다. ‘신진들 또한분명히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었고 또 직면하고 있는 기성들이 자신들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점에 답답함을 느낀다그런데이 두 부류 모두 진짜 화풀이할 대상을 잘못 찾은 느낌이다서로 권력자네 부적응자네 하지만결국 이 둘 모두 체제의 노예일 뿐이다차이가 있다면어느 한 쪽은 좀 일찍 노예가 되어 짬밥이 찼을 뿐이고다른 한 쪽은 새로 노예가 되어 부적응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뿐이다진짜 적이 있다면그렇게 노동을 무력화시킨 추상적인 체제가 될 것이다. 또, 그 다음은 노동을 하는 이에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나니…”라 하면서 적당히 무보수로 퉁치려는그리고 거기에 쉬이 납득해버리고 하라는 대로 하고 마는 체제의 대리자들이 되어야 마땅하다그것뿐이겠는가문제가 뭔지 뻔히 인식하고 있으면서(애초에 문제가 뭔지조차 모른다면 오히려 그러한 무지를 비난할 수는 없다선례가 없다면서그리고 사회적인 합의가 없었다면서 애써 눈을 돌리는 자들 또한 만만찮은 비겁자들이다이런 상황에서 노동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라고 바락바락 외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적대자의 태도라 할 수 있겠다성의聖衣를 입은 자본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발가벗겨 기어코 안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 내 가는.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

보다 보면 가끔 예술은 예술의 논리로 판단해야 한다는 분들이 보인다도대체 나는 예술의 논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예술의 논리라면 미학을 말하는 건가아니면 들뢰즈 책 제목을 잘못 언급한 건가이런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외통수다이 일은 미학적 논의라기보다는 정치/경제적 논의에 가깝다처음부터 미에 대한 논의는 나오지도 않았다그리고 이런 일을 섣불리 미학의 관점으로 판단하자면(엄청나게 많은 미학적 입장은 제껴 두고서라도),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즉 누구도 마음대로 절대미를 상정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한 보편성으로서의 미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해진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이런 시각이야말로 미대생이라면 한번쯤 읽어 보았을벤야민이 그 유명한 논문을 통해 그리 씹었던 바로 그 테제 두 개를 환기시킨다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이 문제를 순진하게 예술의 논리로 판단하라 함은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32비트로 두들겨대는 것에 다름없다.
그런데 백보 양보해서 이게 가능하다면철저한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일 것이다예술이 바로 그 예술이 되는 그 지점에서요컨대 이런 거다. “나의 예술은 지랄이고 예술가의 지랄은 예술이 된다” 그리고 예술과 지랄을 구분지어 주는 것은 예술의 탈을 쓴 권위다즉 이 말은 종국적으로 권위가 없는 놈은 입을 다물라는 것에 진배없다여기서 예술은 (권위주의이데올로기가 된다그런데 그렇게 할 거면 애초에 예술이란 이름 붙이지 말고 그냥 권력투쟁 하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쪽이 더 예술적일 것이다그러나 예술의 논리로 남으려면 어쨌든 이름 정도는 예술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듯하다어쨌든 여기서는 예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술이 아니라. “예술은 그냥 자신이 고이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감히 부탁드린다.

배가 고파야 예술이 나온다는 명제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배가 고프다는 것은즉 작가가 빈곤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상황일 뿐이며 작품이 나오는 것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오히려 배가 불러야 작품이 나올 것이다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어쨌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기본적인 생활이 안 되는 예술가들이 시간을 쪼개서 알바를 전전하고보장 없고 예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자리에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작업을 집어 치우는 꼴을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그게 틀리다고 생각되었으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매진해야지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거나 수긍해버리면 바로 거기서 문제는 반복된다모두가 노예인 이 상황에서일반 노예나 카포나 모두 똑같은 입장 아닌가그럴 때는 오히려 서로 연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연대해서 무얼 주장해야 하냐고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후환이 겁난다면이 분야에서 외부인인 내가 대신 말해주기로 한다. “돈 내놓으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