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_폭력을 대하는 태도 –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고찰

2013.03.20 발행

1. 마르크스의 도발객관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철학자들은 세계를 그저 해석해 왔을 뿐이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일지도 모른다.1)” 여기서 마르크스가 전제한 두 가지의 차원즉 ㉮세계를 언어화 하는 작업(interpretieren)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verandern)은 앞으로 지젝이『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한 객관적 폭력의 가장 알기 쉬운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물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자에게 쓸모없는(blod) 것이며 후자야말로 진정한 혁명의 단초라고 이야기할 것이다그러나 실은 이 둘은 교묘한 밀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요컨대 지젝이 논한 간접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즉 상징화의 폭력과 구조적 폭력은 연결되어 있으며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의 마지막 테제는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폭력을 예고하는 일종의 선전포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그의 작업 초반부에 탈정치적 생명정치의 문제를 제기한다얼핏 보기에 “탈정치적 생명정치”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이미 행위(생명정치)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의 성격이 행위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것이 앞으로 이어질 문제의 본질일 수 있다말하자면정치적 판단에 의해 수행된 명백한 정치 행위에 대해 그것은 정치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대 정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이러한 탈정치적 생명정치는 그 모순적 성격과 동일하게 그 대상인 인간을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지젝에 따르면 그 형태는 두 가지로 나뉜다모든 법적 권리가 제거되고 인간으로서의 신성한 지위마저 박탈된 호모 사케르의 형태가 그 첫 번째이며두 번째는 반대로 모든 법적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신성한 지위가 끝없이 강조되는 형태이다3).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호모 사케르’란 용어의 맥락을 알아야 할 것이다벤야민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언급한 “단순한 생명(Bloßes Leben)4)”에 대한 심화 연구라 할 수 있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현대 사회에서 한갓 단순한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어떠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계보학적으로 추적한다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로마 시대에도 존재했으며중세에도 존재했고또한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거기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그저 예전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그들은 상황에 따라 동성애자이주민, (심증만이 있을 뿐인테러 용의자혹은 이슬람교도와 같은 이름으로 칭해진다로마 시대의 호모 사케르즉 ‘성스러운 인간’의 위상과 같이 이들은 현대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어떠한 사회적(혹은 법적보장도 받을 수 없으며또한 인간적인 존중의 대상도 아니다그들은 그저 사회와 제도의 틈바구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나그 또한 그들 존재의 당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5)법이나 규정윤리와 같은 강제력들은 이들을 은폐하고 말살하기 위해 노력한다그들이 호모 사케르 였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법의 백과전서적 철옹성은 파괴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말하자면 이들은 탈정치적 생명정치의 극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법이 그들에게 의무란 이름으로 어떠한 요구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탈정치적 생명정치는 그러한 생명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강제를 직접적으로 부과한다따라서 그것은 초법적인 차원에서 호모 사케르들에게 존재의 삭제를 강요할 수 있게 하는 동인이 된다.

두 번째의 인간 형태즉 끝없이 배려되는 존재들은 호모 사케르들과는 다르게 체제 내에서 쉽게 목격된다그것은 통상 ‘배려 받아야 할 소수자’라는 윤리적 수사들을 달고 등장한다그들은 정책적인 차원(또는 보편적인)에서나 언어적인 차원(또는 주관적인)에서 모두 존중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그들의 소수성은 말해져서는 안 되는 묵계이며누군가 그것을 발설했을 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비난을 받는다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존중의 호칭은 그들이 우리와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예를 들면‘정치적으로 올바른’ 차원에서 흑인은 ‘brown man’ 또는 ‘African-American’로 불려야만 한다그러나 그러한 존중의 호명은 반대로 그들이 ‘우리’가 아님을 신랄하게 강조한다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라 할 수 있을 것인가앞서 말한 바와 같이이 둘은 반대로 보일지라도 실은 연결되어 있다면여기에 하나의 해석을 덧붙이자면완전한 예외 상태인 호모 사케르들을 법이 그 상례의 틀 안에 수용하려고 하는 시도가 소수자에 대한 끝없는 배려라 할 수 있을 것이다말하자면 그들은 어떻게 해도 포용할 수 없는 버려진 존재이지만그들이 버려졌다고(혹은 완연한 타자임을은밀하게 선포함으로써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한 위선적 행위를 통해 호모 사케르들이 사회에서 불현듯 출현하는 것을 방지한다이는 일종의 완충 지대를 만들어 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서 현현하든그들이 타자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따라서 이 두 가지 양상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6)”이라 해야 할 것이다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이러한 무한정의 타자에 대한 배려는 과거 강제수용소가 수행했던 호모 사케르들의 감금을 좀 더 완곡하게 변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웃집의 호모 사케르
 
탈정치적 생명정치는 이러한 호모 사케르들의 지위를 나와 동등한 지위인 ‘이웃’에서 한갓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이러한 무한정적 폭력에는 어떠한 목적이 존재하는데국가나 사회와 같은 법적 공동체의 존립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악이라 논해지는 (고문을 통한심문영장 없는 구금사형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목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수단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벤야민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말한 자연법(Naturrecht)과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7)그에 따르면 자연법에서의 주체는 다윈적인 의미에서 생물체 그 자체인 인간이며그러한 인간은 자연 선택 이외에 폭력이라는 것을 원초적인 ‘수단’으로서 경험한다이러한 자연법적 주체는 이웃에 대해 특정한 관념을 가진다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칸트의 권고와는 달리 그들에게 이웃 또한 일종의 수단으로서 존재하며어떠한 대타자의 목적 – 달리 말하면 그것을 자신의 공동체 이데올로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을 위해서라면 이웃의 희생과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반면에 이들은 자신의 공동체에 존재하는 이들즉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며 그를 위해 투신하는 자들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그들은 자연법적인 시각에서 ‘목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며그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들과 목적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공동체 외부에 있는 이들에게는 초법적인 무한정의 폭력이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폭력의 와중에서 휴머니티를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휴머니즘의 대상이 될 수 없다탄압의 과정에서 그 대상인 호모 사케르들은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일정한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이 단계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8)지젝에 따르면 그들에 대한 주체의 전략은 ‘물신적 부인’이다프로이트의 논문 「절편음란증」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물신적 주체는 대상의 부재를 한편으로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9)지젝은 이것이 현대 윤리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물론 이러한 윤리 형태는 전제한 ‘탈정치적 생명정치’라는 장치가 작동하는 사회의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피처는 없을 것인가레비나스가 종교적인 바탕에서 ‘전혀다른타자’를 상정하고 타자의 윤리를 강조함은언뜻 보면 보편적 동일성과 비보편적인 타자성 모두를 강조하는일종의 포용적인 제스처로 비추어지기 마련이다그러나 지젝은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인용하며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요컨대 그들이 ‘서로 경쟁하여 성장할 수 있는 라이벌과 같은 적’이 아닌 완전한 적(또는 흔한 정치적 수사인 the common enemy, 공공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실은 이것이 아감벤이 논의한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다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알랭 바디우에 따르면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전제되는 신(“전혀다른타자”)의 보편성이 삭제되었을 때 그것은 곧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10) 이 순간 타자의 윤리라는 상례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라는 그 자체에 내재한 예외 상태로 변화되어 버린다따라서 윤리를 다시금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러한 상례의 규칙즉 대상의 보편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윤리를 세워야 할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이러한 무정형의 존재들에게 던지는 사랑은 기존의 호혜평등의 원칙과는 거리가 먼‘대상이 원하든 원치 않든 부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이는 말하자면 주체에게 주이상스를 온전히 돌려주려는 라캉의 전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구조적 폭력의 기원
 
알랭 바디우는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윤리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러한 주체의 식별을 그에게 가해진 악에 대한 보편적 인정을 통해 행한다따라서 윤리는 인간을 마치 피해자처럼 규정한다…(중략그러므로 더욱 정밀하도록 하자인간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파악할 수 있는 자이다.11)” 바디우의 규정은 지젝의 질문즉 “왜 우리는 오늘날 타자에 대해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가?”에 대한 적절한 통찰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인간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파악”함은 무언가를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로부터 강요받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인간은 누구도 자의로 태어나지 않는다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인간은 “던져진(geworfen)” 존재이며세계는 인간에게 닥쳐드는 외부의 것일 뿐이다우리가 이웃이라 칭하는 일군의 사람들 또한 인간이 경험해야만 하는 세계의 연장이라 본다면지젝이 인용한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12)”라는 프로이트의 논의는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된다이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논의즉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가기’ 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고 주장한다일종의 ‘재량규범’을 만들자는 것이 그 골자이다13).

침입하는 외부라는 개념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서로 피해자인 것’으로 만든다이러한 관계에서 인간이 생존 가능하려면 어떠한 규약을 통해 상호간의 이해를 이끌어내야만 할 것이다따라서 지젝은 (프로이트와라캉의 논의를 이어받아 인간 간의 상호 규약이라 할 수 있는 언어의 문제를 고찰한다인간이 서로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 발명해낸 언어가 과연 그 의도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여지가 있다어쩌면 그것은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서 원초적 아버지(지젝의 언어로 말하자면 ‘외설적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서로간의 분쟁을 막고 그 자신의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터부 – 즉 아버지의 규칙을 계승하는 것 – 에 불과할 수도 있다14)프로이트라캉의 맥락에서 언어의 작용은 주체가 세계에 부여하는 의미 활동즉 상징화의 기본적 메커니즘이며 또한 주이상스를 깎아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금기의 결과이다언어의 상징 규범이 폭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단계에서이다주체는 아버지의 규칙에 의거하여 타자들과 조화롭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돌려 말하자면 그들은 아버지의 규칙이라고 불리는 원초적 아버지의 무한정적인 폭력을 대리 수행하고 있는 것이며따라서 언어란 것은 이러한 대리 폭력의 규칙으로서 작동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무엇보다 호명 행위는 앞서 말했듯이 실재의 대상이 주체에게 부과하는 주이상스를 깎아내리고(혹은 초기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방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대상의 그 무한함을 특정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한정적인 맥락 속에 기입시키는 것이다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징화가 끝나면 실재의 대상은 억압되어 버린다타자에 대한 호명과 상황을 언어로 묘사하는 행위는 이렇게 실재를 괴리시킨다지젝은 이 지점에 주목한다즉 “우리 감수성의 이런 변화는 언어에 의해 지탱15)”되며따라서 상징 작용의 과정에서 일어난 단절이 폭력 행위의 기반을 닦게 되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폭력 행위는 먼저 언어의 차원에서 발생하며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의미의 괴리와 단절으로 인해 행위화(Passage-a-lacte)의 차원에서 ‘의미 없는’ 폭력이 발생할 것을 예고한다.16)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는 폭력들 간의 상관관계를 맺게 하는 가교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4. 대안과 과제들
 
서두에 제시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폭력의 양상들즉 해석하는 차원에서의 폭력과 행위로서의 폭력의 차원이 실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이를 통해서 좀 더 명백해진다언어의 차원에서 기존의 철학자들이 세계를 규정지음으로써 폭력을 수행했다고 한다면마르크스는 더 나아가 이것과는 달리 조금 더 심화된 폭력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그러한 폭력은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주관적 폭력은 아니다그것은 사회 구조를 변혁하기 위하여 기존의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는 반구조적(counter-structural) 폭력으로 나타난다그렇다면 폭력은 지양될 수 없는 것인가벤야민이 말한 “그것이 몰고 올지 모르는 파국적인 결과 때문에 폭력으로 낙인찍고 싶어 하는 어떠한 고찰도 맞서지 못”17)하는 ‘무언가’는 불가능할 것인가?

이 장에서 지젝의 입장은인간은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1차적인 폭력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지젝은 폭력과 공격(Aggression)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해결책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18) “폭력이 죽음의 힘이라면 공격은 삶의 힘으로 부를 수는 없겠는가?”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개개인의 죽음 충동(Todestrieb)을 통제하기 위해 문명은 외부의 지정된 대상에게만 죽음 충동에서 비롯되는 파괴 본능을 가할 수 있게 했다고 말한다19)이러한 파괴 본능을 폭력과 연관 짓자고 한다면 지젝의 의미는 조금 더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프로이트에 따르면 죽음 충동이란 그 자체가 분열적이고 파괴적이라서 어떠한 하나의 외부 대상에 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오히려 죽음 충동을 특정한 외부 대상에 묶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삶 충동(Lebenstrieb)이다삶 충동은 죽음 충동과 반대로 통합적이기 때문에 죽음 충동이 외부의 특정한 대상과 결합될 수 있게 해 준다20)이러한 전제를 놓고 본다면 지젝의 폭력과 공격 개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폭력이 말 그대로 죽음 충동에 입각하여 분열과 파괴 자체를 일삼는 행위라면공격은 죽음 충동에 달라붙어 있는 과도한 욕망(분명 분열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죽음 충동에 충실한 것)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삶 충동을 보다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지젝은 이를 통해 무차별적인 폭력즉 호모 사케르들을 만들어내는 폭력과 그들에게 부과되는 폭력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요컨대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다면눈을 가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권투선수처럼 무작위적이고 무한한 폭력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에서 충족할 줄 아는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21)왜냐하면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인간들에 있어서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적의 완전한 격멸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이것의 최종 목표는, SF영화 같겠지만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완전한 멸종’이 될 것이다그곳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윤리가 존재해야 할 것이다.


1) 원문은 다음과 같다11: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drauf an, sie zu verandern.” 대부분의 한국어 번역은 두 번째 문장을 확신에 가득 찬 표현(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으로 바꾸어 놓는다그러나 여기서 마르크스의 입장은 일종의 가정일 뿐이다.(es kommt drauf an)
2) 지젝은 폭력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먼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이다그리고 그는 주관적 폭력의 이면에 위치한 구조적인 강압을 객관적 폭력이라 칭한다주관적 폭력이 개인의 특수성에 의해 가해지기 때문에 주관적이라고 불린다면객관적 폭력은 개인들간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수행되는 폭력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이다그리고 객관적 폭력은 언어 규약에서 비롯되는 상징적 폭력과 사회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예컨대 법과 정치적 합의에 의해 수행되는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된다.
3) ?i?ek, S.,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역『폭력이란 무엇인가』서울난장이, 2012, p.73.
4) Benjamin, W., 최성만 역『폭력비판을 위하여』서울도서출판 길, 2012, p.114.
5) Agamben, G., 박진우 역『호모 사케르』서울새물결, 2008, p.345.
6) ?i?ek, S., Op.cit.
7) 벤야민은 자연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법론은 마치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자기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움직일 ‘권리(Recht)’에서 문제될 것을 찾지 못하듯이정당한 목적을 위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서 하등의 문제를 보지 않는다자연법론의 관점에 따르면(이 관점은 프랑스 혁명에서 자행된 테러리즘에서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는데폭력은 자연적 소산으로서 말하자면 원료와 같은 것이며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이 폭력을 부당한 목적을 위해 남용하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이 없다.
Benjamin, W., Op.cit. p.81.

8) 어쩌면 호모 사케르는 ‘탈정치적 생명정치’라는 모순적 표현을 가진 정치 형태의 유일한 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모순적인 이들에게 해당하는 정치 형태는 동일하게 모순된 형태의 것으로서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둘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서 매여 있다말하자면 어느 한 쪽에 호모 사케르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면다른 한 쪽에서 탈정치적 생명정치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차원에서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언급한 호모 사케르의 표상즉 당대 유대인에 관한 비유(인간구더기)는 어쩌면 당대 유대인들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더 나아가 탈정치적 생명정치가 본격화되는 제3제국 하에서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호모 사케르들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빈의 거리를 보자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어디에나 도이치적이지 않은 유대인들이 우글거렸다어떤 악행이든지 유대인이 끼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조심스레 그 종양을 가르고 보면 썩은 종양에 들은 구더기처럼 빛에 눈부셔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었으니… 난 차츰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9) 프로이트가 말하는 도착증자(혹은 광범위한 측면에서의 용어로 물신주의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환상을 유지한다“어쩔 수 없는 사실 인정의 중압감과 이에 대한 거부감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일차적인 과정으로 먼저 무의식적인 사고의 지배하에서 가능한 타협이 이루어진다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는 남근이 있지만그러나 그것은 그전에 자신이 알던 남근과는 다른 종류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Freud, S., 
김정일 역「절편음란증」『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경기열린책들, 2011, p.322.
10) “즉 윤리의 이해 가능성은타자가 단순히 유한한 경험을 초월하는 타자성의 원리에 의해 떠받쳐져야 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레비나스는 이 원리를 ‘전혀다른타자(Tout-Autre)’라고 부른다‘전혀다른타자’가 신의 윤리적 이름이라는 것은 명백하다타자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전혀다른타자의 직접적 현상으로서이다같지 않은 자에 대한 유한한 헌신이 있는 것은오로지 그의 밖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원리적인 무한한 헌신이 있는 한에서이다표현될 수 없는 신이 있는 한에서만 윤리가 있을 수 있다.
레비나스의 기획에서 동일자의 이론적 존재론에 대한 타자의 윤리학의 우위는 전적으로 종교적 공리에 접맥되어 있다…(중략윤리적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그것에 ‘계시된’정체성의 폭을 부여했던 종교적 강론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는 정복적인 문명인의 최후의 보루에 불과하다‘나처럼 되어라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
Badiou, A., 
이종영 역『윤리학』서울동문선, 2001, pp.31-34.
11) Ibid, p.18.
12) ?i?ek, S., Op.cit. p.98.
13) Ibid.
14) Freud, S., 이윤기 역「토템과 터부」『종교의 기원』경기열린책들, 2011, pp.217-218.
15) ?i?ek, S., Op.cit. p.108.
16) Ibid, p.119.
17) Benjamin, W., Op.cit. p.104.
18) ?i?ek, S., Op.cit. p.102.
19) Freud, S., 김석희 역『문명 속의 불만』경기열린책들, 2011, pp.292-293.
20) Freud, S., 박찬부 역「자아와 이드」『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경기열린책들, 2012, pp. 399-400.
21) 지젝의 이러한 주장은 욕망과 충동의 조화를 구상하는 후기 라캉의 입장과 유사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입장에 관해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브루스 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라캉에 관해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이제 라캉이 추구하는 새로운 틀은 욕망과 충동이 <조화롭게자리잡는 구조이다이제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쾌락이 흘러넘치도록 만들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
Fink, B., 
맹정현 역『라캉과 정신의학』서울민음사, 2010, p.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