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_사라진 서발턴: 자갈마당 시각예술아카이브 전시에 붙여

2017년 3월 16일 발행

그림1: 전시 1관 자갈마당 아카이브 중 일부

누구를 위한 전시인가?
지난 11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대구봉산문화회관에서는 흔치 않은, 그래서 더욱 눈길을 끄는 전시회가 열렸다. ≪자갈마당시각예술아카이브: 발화, 문장의 외부에 선 행위자≫라는 제목을 단 전시는 도시개발에 의해 더욱 주변화되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더욱 근접하게 노출1)되고 있는 집장촌 ‘자갈마당’의 ‘동시대성’을 풀어내고자 기획된 전시2)로 읽혀졌다.

우선 필자의 입장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문화·사회적 이슈가 교차하는 자갈마당의 역사에 대한 반성적이고 실천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본 전시가 의도한 “도시개발에 의해 묻혀지는, 자갈마당의 장소성, 역사와 인권 문제에 대한 발언”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며,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넘어서고자 하는 아카이브 아트의 비판성도 제대로 읽혀지지가 않았다.

이 글은 왜 이 전시가 비판적 예술로서 ‘아카이브 아트’를 표방하면서 아카이브 아트 전시로서 불리기에 미흡한가에 대한 필자 나름의 분석결과라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범주에서 이 전시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는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아트의 경계 설정의 문제이며, 두 번째는 이 전시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이다. 이는 아카이브 아트의 주체와 그들이 ‘재현’하고 있는 성매매 여성 중 누가 주체이며,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의식을 촉발한다. ‘주체’의 문제는 타자의 문제와 직결되고, 권력과 서사 행위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이 전시의 기획 의도와 수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아트의 경계 설정의 문제
우선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아트의 경계 설정의 문제를 다루어 보자. 전시 1관에는 아카이브 자료와 아카이브 아트가 혼재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는 자갈마당의 1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아카이브 자료가 펼쳐져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부터 시작되는 연표 위로 자갈마당과 관련된 신문 스크랩 자료와 공문들이 섞여 전시되어 있었다. 연대표는 1908년 일본인이 만든 유곽 ‘야에가키조(八重垣町)’가 공창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관광특구로,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청소년 출입 제한 구역이자 불법 성매매 단속 대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전시 1관의 아카이브 자료들은 일관적으로 자갈마당이 국가 권력이 자행한 착취와 위법의 공간임을 적시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성급하게 그 공간에서 착취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매매 여성’에게로 옮겨간다. 이 지점에서 자갈마당의 장소성, 즉 공간과 주체 그리고 주체의 경험의 상호작용성을 그려내고자 했을 법한 전시의 균형 감각은 흐트러지고 만다.

전시 1관 입구 오른쪽 벽면에는 성매매 여성들의 ‘진술’(그림1)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에는 자갈마당의 가시적인 권력인 포주들과 폭력배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성매매 여성에게 초법적으로 자행한 성적 유린과 신체적 폭력의 상흔이 반복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이 전시가 견지하고 있는 반-성매매 담론 안에서 구성된 아카이브의 맥락에서 ‘선별된 진술’들은 리얼리티로서의 충격효과 보다 대중 매체를 통해 각인된 성매매에 대한 금기와 트라우마를 환기시키는데 머무르고 마는데, 그 이유는 그녀들의 진술이 사건·사고 뉴스를 통해 무수히 재생산되어온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별된 진술’을 대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배제된 진술’에 대한 의구심은 떨쳐내기 어려운 문제로 인식된다.

자갈마당이라는 공간의 역사 그리고 주체들의 경험으로 구성된 전시 1관의 아카이브를 통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시가 일관되고 강력하게 견지하고 있는 반성매매 담론의 헤게모니적 특성이다. 본 전시가 성매매를 둘러싼 위법적인 국가 권력을 정당화해 온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에 의해 은폐된 역사와 주체들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본 아카이브 전시를 기획했다면 이 전시는 반성매매 담론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주변화된 진술들로 구성된 새로운 담론을 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어야 했다. 물론 반성매매 담론은 윤리적·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자갈마당의 장소성은 반성매매라는 단일한 담론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사실 성매매는 여성 인권뿐 아니라 노동과 정치, 경제, 문화적 이슈가 첨예하게 얽힌 문제이다. 반성매매라는 단일한 담론만으로 자갈마당이라는 장소성을 아우를 수 있을까? 아쉽게도 반성매매라는 단일한 관점에서 본 자갈마당은 위법과 금지 그리고 구제하고 계몽해야 할 타자의 장소일 뿐이다.

새로운 담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노력의 부재는 전시 2관에서 이어지는 ‘아카이브 아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전시 2관으로 이동하면 본격적인 ‘아카이브 아트’ 작품들이 전개되는데, 이들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성을 거칠게 표현하자면 1관에서 전시한 자료들, 즉 아카이브가 견지하고 있는 특정 담론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데 급급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점은 이 전시가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갈마당의 진정한 장소성을 드러내고 자갈마당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제되고 억압된 목소리를 발현하는데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작용한다.

비판적 미술의 형식으로서 ‘아카이브 아트’는 담론의 파편적인 종합체에 불과한 기존의 제도적 ‘아카이브’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넘어서고자 한다.  아카이브 아트는 아카이브 이면의 것을 드러내야 한다.  아카이브 아트는 기존의 담론을 넘어서 담론 이면에 가려진 권력성을 드러낼 때, 그 권력을 정당화하는 담론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야 자갈마당이 100년 동안 초법적이고 위법적인 공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한 권력과 담론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전시가 표방한 ‘아카이브 아트’는 기존 담론의 구성체인 아카이브를 넘어서지 못했고, 불가피하게 단순히 아카이브를 재현하는데 머무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기존의 아카이브를 넘어설 때, 즉 ‘반-성매매’ 담론을 넘어서 사유할 때 성매매는 노동의 관점에서, 정치제도의 관점에서, 문화의 관점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사유될 수 있게 된다. 아카이브 아트는 ‘성매매 근절’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왜 성매매가 근절되지 않는가를 사유하는 것이 아마도 아카이브 아트의 역할일 것이다.

주체’ 설정의 문제
필자는 본 전시의 제목 ≪자갈마당시각예술아카이브: 발화, 문장의 외부에 선 행위자≫에서 발화의 주체이자 문장의 외부에 선 행위자를 성매매 여성으로 오인하였다. 전시 제목은 ‘행위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정작 전시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결론적으로 이 전시의 주체는 아카이브 전시를 구성한 기획자와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로서 스스로에게 발화하는 행위자의 주체성을 부여하였다.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여성들은 자갈마당이라는 위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금기시 되어 온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보여지지만 보여지지’ 않아야 하는 존재이며, ‘익명성’을 보장받아야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왜 그들의 주체성과 목소리는 익명성과 타자를 경유해야만 하는가? 익명과 타자라는 이중의 필터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진술은 온전한 의미를 보존할 수 있을까? 이 전시는 그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수집하고 선별하고, 편집하였을까? 사실 이러한 필자의 연쇄적인 의문의 기저에는 주체로 상정된 존재가 타자를 대변한다는 행위에 대한 커다란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구 중심적 지성계에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적인 질문을 던진 가야트리 스피박의 통찰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된 하위 주체 즉, 서발턴으로서 성매매 여성의 정체성과 목소리를 이해하는 지평이 되며, 특정한 지배적 담론의 주체가 서발턴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행위에 기저한 자기중심적이고 독백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기여한다.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이유는 누군가가 타자를 대표하여 목소리를 낸다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실제로 스피박은 서발턴의 ‘진짜 목소리’는 복잡한 권력 구조에 의해 억압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여전히 침묵당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3)이 때문에 스피박은 타자를 둘러싼 복잡한 권력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타자를 대변 혹은 재현’하겠다는 야심 혹은 욕망은 자칫 타자의 목소리를 더욱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이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시대의 서발턴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갈마당의 성매매 여성들 역시 성매매를 둘러싼 법과 교육이라는 인식론적 폭력아래에서 왜곡된 의사를 표현하거나 침묵을 강요받았으며, 그 결과 이들의 경험은 담론의 장에 들어올 수도 없으며, 이들이 말로 표현하더라도 그 경험의 다층성은 담론화하는 순간 왜곡된다. 이 때문에 스피박은 서발턴들을 이러한 억압과 인식론적 폭력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성급하게 ‘재현’하는 대신 ‘이들에게 말을 걸어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박은 서발턴을 전유하는 대신 그들을 완전한 타자로 파악하고 그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을 걸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끔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다시 자갈마당시각예술아카이브로 돌아와 스피박의 사유를 적용해 보자. 예술가들은 서발턴, 즉 자갈마당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의 진짜 목소리에 진정 귀 귀울였는가? 그녀들에게 진심으로 말을 걸고 있는가? 그녀들을 ‘성매매 여성’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묶어두고 그녀들을 심문하는데 그친 것은 아닌가?

이 전시는 그녀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대신, 그녀들을 대신해 말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전시는 자갈마당의 장소성과 그녀들의 타자성을 ‘재현’하는데 머무르고 만다. <떠도는 고향>, <그녀의 방>(그림2), <23호>(그림3), <장소: 사물과 사건>, <군고구마 프로젝트>(그림4) 등은 ‘성매매’ 라는 단일한 이슈에 집착해 자갈마당의 장소성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의 삶을 성급하게 재단하고 있다.

그림2: 임은경 작가,  <그녀의 방>
그림3:  전리해 작가,  <23호>

임은경 작가의 <그녀의 방>(그림2)은 자갈마당 여성의 방을 회화작업으로 재현하고 있다. 붉은 조명 아래 연출된 ‘그녀의 방’에 들어서면, ‘성매매 여성’의 파편적인 삶의 흔적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공간의 중심에는 ‘성매매’를 직업으로 선택한 여성에 대한 개인적인 딜레마를 작가 스스로 풀어내고자 하는 흔적으로 읽히는 ‘불가피하게 자갈마당으로 흘러들어 온 가상 인물의 인터뷰 자료’가 놓여있다. 여성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남성의 시선이 투사되어 있다. 이는 작가 또한 법과 교육을 통해 구축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성매매’ 담론에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의식구조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4: 이범용 작가, <군고구마 프로젝트>

자갈마당에 사는 사람들의 “세상을 직접 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욕망이 투사된 <군고구마 프로젝트>(그림4)는 ‘성매매’에 대한 남성적 시선의 전형으로 읽혀진다. 스피박이 경계한 시혜적인 태도로 무장한 작가는 서발턴-군고구마 장수-을 가장해 그들의 공간으로 숨어든다. 그가 재현한 아카이브는 자신의 시혜적이고 투명한 의도를 표명하는 동시에 은폐하는 수단이 되는 군고구마 통과 60-80대 노년의 성매매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오브제로 제시된 이불이 전부였다. 이 작품은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작가의 존재와 의도를 표상하는 군고구마 통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불의 의미는 참으로 모호하다. 따뜻한 군고구마를 소통의 수단으로 삼은 작가에게 감자전과 야식을 챙겨주었다는, 이제는 노년이 된 성매매여성의 고된 노동의 흔적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노년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여성들의 삶에서조차 ‘성매매 여성’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거두지 않는 젊은 남자의 매정한 시선이 투사된 것으로 봐야 할까?

<시선의 경계선>, <떠도는 고향>, <축> 등의 영상 작업 또한 보여지는 시선, 자본에 의한 여성의 신체의 기계화, 자갈마당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주제화하였다는 작가들의 의도와는 달리 표현상의 모호함과 추상성으로 인해 그 의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그들이 대표하고 재현한 자갈마당은 우리 시대의 자갈마당과 성매매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사유하는 방식을 재현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여성, 노동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거세한 ‘성매매 여성’ 이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으로 그녀들을 재단하고 결단코 그 속박에서 풀어주기를 거부하는 ‘시선’이 투사되어 있다. 이러한 시선은 “플로베르가 자신의 소설에서 이집트 창녀를 다루는 시선과도 중첩된다. 소설 구조 내에서 이집트 창녀는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고, 소설가는 창녀를 육체뿐 아니라 감정까지 소유”4)한다. 이 전시 또한 마찬가지다. 일부 작가들은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는 ‘불우한’ 자갈마당 여성들을 대변한다는 온정주의적 사명의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투명한 존재로 담보하고 그녀들의 삶을 관망한다. 여기서 작가들은 플로베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의 육체뿐 아니라 정서까지 그들의 작품에 재현하고 있다.

다시 아카이브와 아카이브 아트의 경계 문제로 돌아가 이 전시의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반성매매 담론을 주목해 보자. 자갈마당의 성매매 이슈는 ‘반성매매’ 담론이 전체를 대표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다. 성매매의 정치적 맥락, 경제적 맥락, 인권적 맥락은 복합적으로 얽혀있으며 개별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반-성매매 아카이브는 파편적인 함의를 가진다. 그런데 주목할 부분은 반성매매 담론이 우리 사회의 지배 담론이라는 점이다. 이 지배 담론은 중립적인 차원에서 성매매 담론을 공론화시키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법적으로 규제의 대상인 성매매는 반성매매 담론의 근거가 되지만 자갈마당의 사례에서 보듯 실제 현실에서 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성매매를 비가시화시키는 효과를 부여한다. 성매매 경험은 음성적으로 유통되고, 보통의 경우 회피와 왜곡의 결론에 다다른다. 이 전시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5: 윤동희 작가, <꽃신>

이러한 관점에서 윤동희 작가의 <꽃신>(그림5)은 자갈마당과 성매매에 대한 이슈를 단일한 담론 안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사유하고자 함으로써 우리에게 성매매를 둘러싼 역사와 그 역사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체성을 다층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지배 담론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억압함으로써 선취된다. 서발턴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재현한다는 목표, 또는 사명은 지배 담론 안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서발턴-자갈마당 사람들을 위해 공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그 공간에서 우리의 시선이 그들을 투사하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응시와 교차하며 말을 거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 노력의 일환으로 기존의 지배 담론이 구성한 아카이브를 넘어선 다양한 이슈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것을 본 전시에 참여한 기획자와 예술가들에게 제안한다. 실제로 자갈마당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계들 사이에 존재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어왔음에도 아무도 귀 귀울이지 않았고, 사회적 담론 속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했다. 그들-서발턴의 관점에서 지배 담론을 다시 번역하고자 할 때, 자갈마당의 장소성, 자갈마당의 기억, 자갈마당의 내일이 어렴풋이 그려질 것이다.

나가며
자갈마당은 성매매를 둘러싼 물리적인 폭력의 역사가 관통하고 그 역사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법과 교육의 인식론적 폭력이 잔재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지금 그 공간은 도시개발이라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시책에 의해 더욱 주변화되고, 은폐되고 있다. 아마도 본 전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도시개발에 의해 묻혀지는, 도시의 어두운 역사 ‘자갈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장소와 역사, 인권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자 기획된 프로젝트”라는 전시 소개 글을 통해 필자가 기대한 것은 ‘자갈마당’의 새로운 서사였다. 헤게모니를 장악한 권력자들이 쓴 서사가 아닌 배제되고 억압받은 ‘타자’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쓰여지는 새로운 서사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본 전시가 조명한 ‘자갈마당’의 장소성은 기존의 서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가 전시를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금기의 장소’이자 ‘타자의 장소’에 대한 새로운 각주들뿐이다. 자의적인 각주들 안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고” 플로베르가 그랬던 것처럼 전시는 자갈마당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육체뿐 아니라 감정까지 소유” 하고 있었다.

물론 필자는 기획자와 작가들의 입장을 이해한다. 자갈마당이라는 공간에 대한 접근과 소통에 있어 여러 난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품지 못하고 금을 그은 공간과 타자화한 사람들을 위한 전시를 기획했다면, 이 전시의 주체는 기획자와 작가가 아닌 ‘공간과 사람들’이 되었어야 했다. 공간에 우리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목격한 역사를 드러내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성매매여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시민으로서, 주체로서 그들의 진짜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는데 주안점을 두었어야 했다. 만약 이러한 관점을 견지했다면, 아마 이 전시는 더 많은 것들을 아우르고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미술이 사회로부터 배제된 공간의 역사와 사람들을 다루고자 할 때, 미술은 우리의 삶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시선이 재현해 온 우리의 삶을 먼저 점검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시선에 내재한 권력성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며, 타자에게 발화할 공간을 내어주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의 시선에 대한 점검 과정이 없을 때, 미술은 권력의 시선을 반복할 뿐이며, 더 견고한 타자의 공간과 타자들을 생산해 낼 뿐이다. 이 점은 ‘자갈마당시각예술아카이브’전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본 전시가 타자를 대변한다는 행위와 시선에 깃든 권력성을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결과 ‘자갈마당’을 더 어지럽게 중첩된 낡은 시선들 속에 더 견고한 시선으로 고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이런 전시가 만들어진다면, 자갈마당이 더 이상 권력자의 시선을 관망하는 재현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들은 권력의 시선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상호주체적으로 타자-자갈마당 사람들의 ‘응시’를 마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시선에 대해 되돌아오는 응시는 우리 자신의 시선을 인식하게 하고,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재촉할 것이다. 투명한 ‘나’의 시선으로부터 발화하는 의미가 아닌 타자의 응시로부터 발화하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타자-차별받은 자의 응시를 권력의 시선으로 되돌리는 전복의 전략”5)은 미술 안에서 실현될 것이며, 비로소 타자는 주체로 다시 돌아오고 자갈마당의 역사는 그들에 의해 다시 쓰여 질 수 있을 것이다.

 


1)현재 자갈마당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성매매 상업 지역과 주거 지역 간의 분쟁이 불거지고 있다. 주민들은 아이들의 교육과 주거 환경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로 민원을 넣고 있으며, 성매매 사업주 또한 영업권과 주거권을 주장하면서 이에 응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2)이 전시는 대구여성인권센터 주관으로 도시개발에 의해 묻혀지는, 도시의 어두운 역사 ‘자갈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장소와 역사, 인권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자 기획된 프로젝트이다. (전시 소개글에서 발췌)

3)스피박은 자신의 저사 『포스트 식민이성 비판』에서 인도의 식민지 공간에서 ‘사티’라고 불리는 순장 제도에 희생당한 인도 여성들의 침목에 주목한다. 스피박은 그들의 목소리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중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이들 모두가 그녀들의 목소리를 대변(재현)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정작 그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하게 된다는 것을 적시한다.

4)탈식민주의 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사례로 플로베르의 소설을 언급하였다. 사이드는 플로베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동적인 여성상의 모티브를 플로베르가 이집트에서 만난 창녀-동양여성-에게서 얻었다고 설명한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플로베르는 이집트 창녀와 만났기 때문에 (이후) 큰 영향을 미친 동양여성의 모델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창녀는 결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그녀 자신의 감정이나 이력을 소개하지도 않았다. 플로베르 자신이 그녀 대신 말했고, 그가 그녀를 대변하여 소개하고 표상했다. 플로베르는 외국인으로서 비교적 부유했으며, 남성이었다. 이 조건이 바로 지배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나타냈다.” 즉 플로베르는 동양여성 그리고 동양여성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여성에 대해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아닌 타자로서 대상화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플로베르의 시선은 다름 아닌 식민지배자의 혹은 권력자의 타자에 대한 억압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다.

5)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는 『문화의 위치』에서 지배 권력은 항상 지배자의 담론은 이미 언제나 피지배 주체의 담론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바바는 담론에 참여하는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과 교섭의 가능성을 전제함으로써 지배 담론은 항상 소수 담론에 의해 변화고 전복될 수 있음을 예시한다. 바바의 관점으로 볼 때 자갈마당을 둘러싼 담론 역시 단일한 주체와 담론이 독점할 수 없으며 배제되고 억압되었던 주체에 의해 항시 다시 쓰여 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