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율리_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정오를 향한 존재의 여정

2014.01.27 발행

1. 들어가며

영화에 관한한 나는 참 빈약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인간이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도 싫은데, 취향까지 까다로운 탓에 함께 극장에 갈 파트너를 찾는 것 조차 내겐 늘 커다란 고민으로 수렴되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코엔 형제는 이미 아카데미를 동네 술집처럼 드나들고 있는 백인-남성 감독들이고, 때문에 필요 이상의 긴 부연이 필요치는 않을 것 같다. 조엘 코엔, 그리고 에단 코엔의 영화는 말하자면 1900년대를 종합적으로 버무린 20세기 판타지의 대중적 지평이다. 이전 세기의 판타지가 강인한 생명의 초월성에 대한 갈구라면 20세기의 판타지는 문명의 자궁에서 탄생한 히스테리적 불안이었다. 이 불안심리의 극단에 자리한 이들이 예컨대 라스 폰 트리에나 기예르모 델 토로다. 코엔 형제는 상대적으로 더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경쟁자들에 비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 영화 면면에 숨겨진 특유의 냉소는 그들의 태생적인 주류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유난히 상복이 많은 영화였다. 원작자인 맥카시가 2007년 퓰리처상을 거머쥐었고, 개봉과 동시에 80회 아카데미의 최다부문을 석권하며 코엔의 필모그라피를 단숨에 세계 최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이 영화는 소위 평단에 의해 가장 어수선한 선입견이 덧씌워진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이 선입견에 굳이 더하고자 하는 것은, 잘 차려진 스릴러의 장막 뒤에서 코엔의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아주 일관된 농담을 건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 인간이란 정녕 저 납득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의 남자를 그저 받아들이려 애쓸 수 밖에 없는 탄소덩어리들인가? 뾰족구두를 신고 천연덕스럽게 가르마를 쓸어넘기는 하비에르 바르뎀을 바라보며 나는 갑작스레 뭐라도 써야 할 것만 같은 한심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2. 하비에르 바르뎀 vs. 우디 해럴슨 : 나는 이 동전처럼 자네에게 왔네

세계 위에 던져진 인간의 현존은 요컨대 우연의 인과에 맞서는 하나의 존재론적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어떤 종교나 사상도 이 프레임을 본질적으로 부수는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990년, 모자에 잡아먹힌 남자들을 연출한 이후 코엔의 판타지는 대부분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구성되고 있다. <밀러스 크로싱>의 모자가 아무 의미 없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는 타이틀 시퀸스에서 모자를 이리저리 날리던 바람, 그 자체의 근원적인 힘을 연상시킨다. 쉬거가 하나의 장치로서 기본적인 영화의 개연성을 한참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곳에서 유령처럼 사라져 버리거나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카슨의 뒤를 잡고, 결코 무엇을 먹거나 마시며 욕망을 품지도 않는다. 물론 이 광인은 아주 직접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모자에 비할 바 아닌 훨씬 치명적인 무엇이다. 러닝타임 내내 총알도 없는 괴상한 공기총을 쏘아대는 그를 쫓으며 보안관 벨은 결국 자조적으로 내뱉고 만다. “요즘은 인간들이 바람 빠진 인형처럼 구멍이 나 죽어버리는군.”

쉬거에 대한 해결사를 자처한 카슨은 항거불능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 뭔가 해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종종 그것을 과시하며 멋을 부렸다. 실제로 카슨은 누구보다도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능숙하게 이념-자본주의와 ATM을 다루며 언제나 협상을 시도하는 것을 즐겼던 그의 속성은 다음의 짧은 대화를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쉬거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정확히 작년 11월 28일이었지요. 그가 위험하냐고요? 무엇에 비해서 말입니까, 흑사병과 비교해서?” 카슨은 불필요한 폭력을 좋아하지 않고 정확한 논리에 집착하며, 때로는 꽃다발을 사는 인간적인 위선도 부릴 줄 아는 민첩한 지식인이자 저널리스트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런 사고도 막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의 발단인 가방을 찾았음에도 정작 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쉬거의 희생양들이 카슨과 조금 더 일찍 타협했더라면 어땠을까. 안타깝지만 카슨은 본질적으로 고용인-대중의 어리석음을 양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러한 전제는 쉽게 성립하지 않을 것 같다. 극중의 모스는 그에게 조언을 건네려는 카슨과의 대화에서 유일하게 훌륭한 한 번의 반격을 가하고 있다. “모스, 당신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쉬거는 정말로 위험한 놈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처럼 말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 점에서는 그가 더 낫소.”.

3. 진 존스 vs. 켈리 맥도날드 : 저 쇠붙이를 던지는 건 당신 자신이에요

쉬거로부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있다. 주유소 주인으로 잠깐 얼굴을 내비치는 그는 비록 영화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모스 부인과 더불어 가장 비중 있는 상징을 형성하는 캐릭터이다. 이 순박한 남자는 쉬거에게 어디에서 오셨느냐라는 양립불가능한 화제를 던진다. 이것은 쉬거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해소될 수 없는 심각한 패러독스다. 주유소 주인은 불가항력으로 쉬거의 내기에 응했고 앞 면으로 바닥에 떨어진 동전의 행운 덕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모스와는 조금 다른데, 몸에 해로운 과한 욕망을 분에 넘치게 탐하지 않았으며, 약간의 -경제력 있는 아내와의 결혼을 통해 작은 만족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더이상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없는 화석이 된 그는 심지어 모스보다도 훨씬 형편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고작 동전에 생사를 내맡기는 정도가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스의 아내 칼라는 이 불행한 남자와 좋은 대칭점을 이룬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그녀는 영화 속의 궁극적인 주인공인 것처럼 보여진다. 칼라는 제한된 분량 속에서도 상당히 놀라운 전향적 변화를 드러내는데,  마초적인 남편과 말 많은 엄마에 매인 인형 같은 존재였던 그녀는 기나긴 추격전의 마지막에 이르러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쉬거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는다. 각성의 시점은 그녀가 모스 부인에서 칼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의 주권을 복권시킨 그녀는 제 발로 쉬거를 향해 걸어 들어가고,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경계가 뒤집힌 순간 영화 역시 종결로 치닫는다. 결과적으로 이 젊은 미망인은 동전의 의미-의미 없음을 알아차렸고 껍데기 뿐인 게임 자체를 파기하는 쪽을 택했다. 존재가 놓인 세계의 숙명적 폭력 앞에서 동전이라는 조각난 기표를 능동적으로 전복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영화 속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이후의 행방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남겨지지 않는 인물이다. 쉬거가 집에서 걸어나와 구두 밑창을 살펴보는 장면은 마치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그러나 쉬거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그가 갑작스레 구두 밑바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까닭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는 언제나 내러티브 바깥을 향해 운동해 온 존재인 것을.

4. 토미 리 존스 vs. 베리 코빈 : 그런 게 바로 허무라는 거다

생의 문제를 다루었던 지난 세기의 철학에서 몇 가지 재료를 빌려온 것은, 코엔 특유의 유머로 가득찬 이 영화가 이미 한 차례 낡은 세계의 종말을 목도한 또다른 노인-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지적 거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상은 말미에 등장하는 두 보안관,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엘리스는 종교적 암시를 지닌 인물로 등장해 벨과 아리송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죠?”, “네 트럭을 몰 사람은 너밖에 없지.”, “트럭 소리를 들었던 겁니까?”, “아니, 하지만 네가 들어왔으니까.”, “도대체 고양이를 몇 마리나 키우고 있는 거예요?”, “나도 잘 몰라, 몇 마리는 제멋대로 살고 있고, 몇 마리는 야생이나 다름없고.” 더이상 인간에 대해 애정이나 연민을 품지 않는 이 전직 보안관은 아마 젊은 시절 열정적인 계몽주의자로서 거대한 적들에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풍파에 찌들어 이제 그는 신을 기다리며 침묵하는 성자가 되었다. 엘리스가 최후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기에 신-진리야말로 가장 앞서 텅 빈 공란이 되어버린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상의 동인을 캐묻는 벨의 질문에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세계의 진리를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잘라말한다.

동명의 원작을 집필한 맥카시는 소설의 제목이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영감을 얻은 것임을 밝힌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 나무의 새들 / 저 죽어가는 세대가 노래하는 곳 / (…)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가 / 쇠하지 않는 지혜의 비문을 잊고 있다”. 노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갈구한다. 그들은 정지된 생명의 필연적인 쇠락, 그리고 충족이 무한히 연기될 수 밖에 없는 욕망의 본질을 직감하고, 기꺼이 몰락하여 새로운 생성을 위한 순례자가 되기를 마다치 않는다. 한때 조금 더 일찍 노인이었던 엘리스는 너무 많은 적들과 조우했고 결국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지쳐버렸다. 그는 비로소 비잔티움의 항로를 두드리는 벨을 향해 무덤덤히 내뱉는다. “네가 겪은 일도 새삼스러운 건 아니야. 이 나라는 늘 사람들이 힘들지. 세월은 막을 수 없고 널 기다려주지도 않아. 그런 게 바로 허무라는 거다.”. 그래서 그는 선대 보안관의 금빛 뱃지를 먼지 쌓인 박물관에 처박아 버린 것이었을까.

5. 마치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한 편의 스릴러로서 장르 내부의 문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레 모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그를 조여오는 발걸음 소리에 숨을 멈추며 긴장하다, 모스의 욕망이 평범한 소비주의의 판박이이듯, 마침내 나 스스로가 이 말도 안되는 적과 맞서 싸우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인가. 아직도 어딘가에선 탁 치면 억 하고 사람이 죽고 파란불에 길을 건너다가도 차에 치이기 일쑤다. 물이 새는 2천억짜리 인공섬 너머로 돈 몇 푼에 철거민들이 불타 죽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개발이 백지화 된 그 무덤 같은 땅에선 이제 그들을 두들겨패던 용역업체가 주차부지 임대로 제법 재미를 보고 있다는데. 카슨은 고용주를 무례하게 비웃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별로 상관 없잖아요, 쉬거보다 어처구니 없고 위험한 일들이 이미 세상 도처에 널렸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에 대한 영화의 메시지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성숙한 벨은 쉬거를 잡기는커녕 그와 제대로 조우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엔딩 크레딧이 화면을 뒤덮기 직전, 벨은 짧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암시를 건넨다. “아버지는 뿔 속에 불을 가지고 계셨어. 그 불빛은 달빛 같은 색깔이었지. 꿈 속에서 나는 알고 있었어, 아버지가 나를 대신해 앞장서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깜깜하고 추운 저쪽 어딘가에 불을 피워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어딘가에 이를 때마다 그곳엔 아버지가 계시리란걸.” 코엔의 판타지는 맥카시의 비슷한 작품이 각색된 <카운슬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매듭 지어진다. 존재의 나약함은 언젠가 세계의 운명적인 습격 앞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겠지만, 모든 노인은 뒤따르는 아들과 딸들을 위한 다리가 되어 남는다. 비록 그 사람이 이제는 거기에 없을지라도. – <The Man Who Wasn’t There,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