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율리_님포매니악 : 욕망의 주어로 살아가기

2014.06.28 발행 

1. 들어가며

라스 폰 트리에는 2011년 <멜랑콜리아>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칸 영화제의 인터뷰 도중, 그의 다음 영화가 네다섯시간 동안 질펀하게 섹스를 벌이는 난잡한 하드코어 포르노가 될 것이라 예고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많은 팬들의 오랜 기대작이었던 <님포매니악>은 세간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정사 장면의 실연, 비상식적인 러닝타임 같은 이슈로 숱한 가십을 뿌려댔다. 그러나 막상 여러 우여곡절 끝에 첫 번째 볼륨이 국내에 상영중인 지금, <님포매니악>은 지저분한 포르노라기 보다는 우아함에 가까운 코미디를 보여주는, 또한 오덕 만렙을 달성한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끈적한 진정성이 넘치는 영화였음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최근 <님포매니악>에 대해 내가 가장 크게 공감했던 바는 이 영화를 유쾌하게 나열되는 맥거핀의 미로로 정의한 어떤 트위터리안의 평가였다. 그는 140 바이트의 짤막한 글을 통해 아직도 영화를 찍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감독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되물었다. 과연 <님포매니악>을 통해 본 라스 폰 트리에는 스스로의 도그마 선언을 나름의 방식으로 계승하는 데 여전히 진지한 고민을 지속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 바깥의 사후적 코멘트들에게도 동등한 미로짓기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허한다는 것, 문득 글을 쓰는 이에게 이 불친절한 감독이 선사하는 새삼스러운 즐거움에 대해 작은 고마움을 느낀다.

2. 바그너 대 람슈타인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작품 전체에 대해 일관된 암시를 거는 음악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이 뚱뚱한 덴마크 남자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어둠 속의 댄서>가 차용한 기묘한 기계음이나 <멜랑콜리아>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해 한 마디쯤 거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멜랑콜리아>를 통해 그는 정답에 가까운 바그너 사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당연하게 영화의 성공과 흥행으로 이어졌다. 음악을 다른 매체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많은 방법들 중에서도 라스 폰 트리에는 여러가지 영화적 장치를 이어붙여 음악의 기원과 맞닿은 예리한 시각적 심상을 끌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그가 선택한 음악이 연주되기에 가장 적합한 혹은 적합할 수밖에 없는 가상의 시공으로 증축된다. 바그너는 오페라의 서사를 음률을 통해 드러내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특정한 캐릭터와 사건에 음악적 약속을 부여하고 이러한 약속들의 차이와 반복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변환했다. 재미있게도 <멜랑콜리아>는 바그너-음악을 영화의 내러티브에 깊숙이 개입시킴으로써 역방향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를 제시한다.

        눈이 내리고, 눈송이는 다시 작은 물방울로 변해 도시의 힘줄 같은 파이프 위를 타고 흐른다. 오래된 벽의 구석에는 언제부터 돌고 있었던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녹슨 환풍기가 숨을 고르며 헐떡이고 있다. 신중한 걸음걸이의 노신사가 새벽이 밝아오는 좁은 골목 사잇길을 내딛고, 이내 거칠게 디스토션을 건 쇳소리가 무너지듯, 짧은 오르가즘처럼 터져나온다. 바그너가 음과 음, 그러니까 12음계 위의 어떤 장조도 아니고 단조도 아닌 무조성의 파토스를 부유했다면 람슈타인은 더 본질적인 음과 소리 사이의 아프리오리한 위계-체제를 타고넘는다. 전자가 역사의 클라이막스를 직감하고 환희와 초조, 격정에 사로잡힌 19세기의 낭만주의자라면, 후자는 아우슈비츠와 핵전쟁을 목도한 20세기의 신인류인 셈이다. F도 G도 아닌 어정쩡한 반음은 실은 그 어떤 온음보다도 확신에 찬 선언이었다. 반면 인트로의 긴 침묵을 찢는 틸 린데만의 목소리는 언어이면서도 탄식 같고, 아이의 울음소리 같고, 어떤점에서는 기쁨에 찬 아우성 같고, 완전한 마법이면서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못한 주술 특유의 원시성을 드러낸다. 문맥으로 돌아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람슈타인이 맞닿은 음악의 기원이자 바로 <님포매니악>의 탄생설화이지는 않은가? 5시간 여의 러닝타임을 불과 몇 분으로 강렬하게 축약하는 이 도입부는 영화의 영도zero degree 즈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당신은 나의 심장 속에서 자라난 이du bist mir ans Herz gewachsen (…) 하나의 틀에 속한 두 개의 그림zwei Bilder nur ein Rahmen, 두 개의 이름을 가진 하나의 몸통ein Korper doch zwei Namen(…) 나를 지탱해주오 인도해주오fuhre mich halte mich 우리는 결코 서로에게서 달아날 수 없네ich verlass dich nicht.”

3. 씨씨 대 셀리그먼

스티브 맥퀸의 <셰임>은 <님포매니악>과 함께 흥미롭게 대조해 볼만한 영화다. 섹스중독이라는 어마무시한 소재를 다루었음에도 이 불운한 작품은 <헝거>와 <노예 12년>이라는 역대급 필모그라피 사이에 끼어 빛의 속도로 지하철역 좌판에 깔린 DVD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테이트모던과 구겐하임, 퐁피두를 두루 섭렵한 미디어 아티스트 출신의 감독답게 <셰임>은 미학적으로도 상당히 세련된 연출을 보여준다. 특히 평온함과 공허함이 교차하는 내면을 짧은 고요 속에 압축한 인트로는 맥퀸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증히 드러내고 있다. 브랜든은 조에 비해 훨씬 매끈하게 다듬어진 인간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섹스중독자인 브랜든이 자신의 삶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사회적 성공에 다가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어른으로 완성된 남자의 섹스는 그만큼 더 외롭고 고독하다. 그와 몸을 섞는 어떤 여자도 정해진 등가교환의 계약 밖으로 탈주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그는 데이트를 위해 와인을 주문하는 작은 일탈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긴장하고 만다.

        <셰임>을 이끌어가는 것은 브랜든이라기보다는 씨씨의 존재다. 횡설수설인 조의 진술이 셀리그먼의 개입을 통해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과 유사하다. 씨씨는 브랜든의 유일한 혈육-여동생이고, 결정적인 물증은 없지만 끝까지 관계에 대한 모호한 여지를 남기는 비밀스러운 애인이자 뮤즈다. 그럴 수만 있다면 60년대로 돌아가 재즈 가수가 되고 싶다는 브랜든의 대사에서 짐작할 때, 쓸쓸히 오래된 도시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읊조리는 그녀는 이 외로운 남자 어른의 과거이자 미래이거나, 분열된 내면의 자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흑백 월트디즈니 필름 앞에서 그는 하나의 자궁에서 태어난 또다른 감수분열체에게 다음과 같은 폭언을 내뱉는다. “넌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꼼짝도 못하게 하지. 그렇지만 내가 널 낳은 게 아냐. 내가 널 이 세상에 데려온 게 아니라고. 알겠어? 넌 내가 떠안은 부담이야. 네가 나를 가라앉게 만들고 있어.” 초자아superego의 아파트에 진입하지 못한 노랑 머리 이드id는 이제 욕실 안에서 스스로 폐기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서로에게서 쉽게 도망칠 수 없도록 짝지워진 남매의 운명은 이미 수없이 새겨진 흔한 상흔 하나를 소녀의 손목에 추가하는 것으로 자아의 파국을 지연시킬 뿐이다.


씨씨가 브랜든 내부-의 자아라면 셀리그먼은 조에게 어떤 의미일까? 따뜻한 밀크티와 바흐의 오르간 선율, 플라잉 낚시 교본과 피보나치 수열이 존재하는 바깥으로 조를 이끄는 존재. 상상계적인 욕구─욕망이 아니다!─에 해석과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 노인은 커다란 거울이 되어 끊임없이 와 바깥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러나 너무 솔직하게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노라 고백하는 조의 천진함은 실재의 헤게모니를 쥔 유클리드의 세계 역시 필연적인 실현 불가능성 위에 놓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4. 마치며

언젠가 나는 라스 폰 트리에를 20세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감독이라 표현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하나도 야하지 않은 이 2시간 짜리 포르노그라피를 감상하며, 나는 20세기, 그중에서도 20세기의 일몰을 그 누구보다도 담담히 주시해 온 그가 이제는 비로소 새로운 세기의 인간에 대해 발언하고 싶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 근거는 어느덧 쉰을 넘긴 그의 영화가 드디어 징후 이면의 도덕을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조가 일찍이 그가 빚어낸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여자라는 점이다. 내적 갈등의 대결을 숙명적으로 반복하는 <셰임>과 달리, 그래서 <님포매니악>은 람슈타인의 목소리를 빌어 결국 그것-20세기의 번제에 응답하는 예언적이고 초월적인 인간 내면의 힘이 나를 붙잡아 줄 것이라 말한다.

        상처입은 고결한 존재가 인간의 도움으로 시험에 들고 선善에 근접한다는 구성은 톨스토이가 즐겨 사용한 낯익은 소설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추락한 천사 미하일이 그랬던 것처럼─미하일 역시 신의 언어로 상징화되지 못한 사랑의 추구로 지상에 유폐되었다─ 아마 조는 셀리그먼의 세계와 융화됨으로써 어떤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와 셀리그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상상해보는 일은, 탄탄한 육체미로 무장한 흑인들에게 둘러쌓인 갱스부르의 스틸컷만큼이나 <님포매니악>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또다른 재미요소가 될 것 같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결합일 수도, 다툼이나 타협, 어쩌면 완전히 생경한 모습의 화해일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관객으로서 우리가 함께 도달할 그 결착에 뿌리내린 것이 어린 조를 이끌어 준 아버지의 검은 물푸레나무 같은 것이기를 바란다. 혹독한 겨울에도 내면의 온도를 잃지 않는, 외로움에 가라앉지 않고 홀로 대지를 디딜 줄 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