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_카니발 레스크

2016년 10월 5일 발행

먼저, 무형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 싶다.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작품의 실체를 확보하려 한다. 실체라는 것은 미술과 불가분한 관계이며, 감상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미술은 어떤 식으로든 관객과의 교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감상되는 형태론을 전략적으로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형이란 제안은 모순된 일이 아닌가? 여기서 무형은 물리적 결과물에 대한 반목이다. 그 선례로 앨런 카프로의 해프닝을 들 수 있다. 카프로의  <6개 부분으로 된 18의 해프닝>은 갤러리나 도시 공간에 어떠한 상황을 구조한 후, 감상자와의 직결적 관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카프로의 “해프닝”은 물질적 실체를 동반한 작품(work)이 아닌, 공연이라는 “작업(work)”을 예술로서 제시하는 20세기 가장 급진적인 시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왜 카프로의 해프닝은 무형의 작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카프로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특정 집단에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을 타자하는 방식이 아닌, 수용함과 동시에 작품의 실체는 역설적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과의 협동에 그 본질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프로덕트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으며, 카프로는 행위와 기록이라는 형태를 통해 관객과의 교류를 유도하고 있다. 

<기록에서의 카니발 레스크>
기록은 어떠한 사건의 종료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미술은 기록의 방식에 있어, 무질서와 위계의 전복을 꿈꾼다. 앨런 카프로와 프란시스 알리스를 비롯한 참여형 프로젝트는 기록의 형태로 관객과 교류하고자 한다. 이때, 기록이 작품에서 어떻게 수단 되고 있는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집단의 행위를 기록하는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버마스에 의하면 기록은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 개인에 의해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을 기록하게 된다면 그것은 공동의 경험을 오독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록의 주체를 파편화하고 공동의 경험 안에 개인의 미학이 개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파블로 엥겔라는 자신의 저서 <소셜리 인게이드 아트의 입문>에서 기록은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 이루어지는 편집 단계의 요소가 아니라 관객, 해석자, 서술자가 공동으로 생산하는 요소인 것이며, 여러 증인의 진술, 다양한 기록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전개에 따른 대중의 실시간 기록 등은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보여 주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방식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기록은 분명히 그 과정에서 충돌과 전복, 그리고 재조립의 과정으로 순회될 것이다. 하지만, 프로젝트 작업의 공동 체험이 어떠한 매체로 기록되어 전시장에 디피된다는 것이 다수의 경험을 직접 감각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한계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화에서의 카니발 레스크>
옥인 콜렉티브는 2013년 <서울 데카당스>에서 한국이란 콤플렉스 사회와 대치되는 개인이라는 미시적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작가는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P씨가 북한의 선전 사이트 우리 민족끼리에 멘션을 보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기소된 실화를 주제로, 주인공과의 대화와 진술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연기하여 기록한다. 또한, 전시와 별개로 오픈 토크 쇼에 작업의 소재이자 실제 관련자를 초청하여 작품과는 다른 형태의 대화를 시도한다. 개인의 소외와 컴플렉스 사회에서 “대화”라는 미학적 시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옥인콜렉티브, Seoul Decadence, Single Channel Video, 2013
현대인은 개개인이 비정치적임을 자처하기 전에 이미 현대 사회를 체험하는 것만으로 공공적 의미를 지켜보는 힘을 상실했다. 일회성,  변화의 광적 애호, 침착성 부재, 신경적 불만이 상시화되고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제력을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동시에, 퍼블릭 콘셉트는 소멸되었다. 존 듀이는 이 배경에 “공간적 단편화와 시간적 광열의 증대”가 있음을 지적한다. “사회적”인 것이 사라진 사회에서 대화는 공동체의 일시적 부활이지 않을까?

대화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고 서로를 공유하고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다.  대화는 일상 회화부터 논쟁, 강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발화자와 구조에 따라 대화는 제약성을 가질 때, 필연적인 감상자를 동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공통의 목적이 있는 강연이나 토론 같은 경우는 발제자와 참여자의 지위가 분명하게 분류되어 있다. 예술가가 특정 집단에 개입하게 될 경우, 이러한 계급화 체계를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일부 참여형 프로젝트는 커뮤니티의 이해도가 낮아, 무차별한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는데, 참여형 프로젝트는 미학적 저작성과 창조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전복시킬 필요가 있다. 미적 판단과 그에 따른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파편적으로 해체시키고 프로젝트에 개입될 커뮤니티의 사회적 개입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개입 방식은 또 다른 딜레마를 동반한다. 예술가의 개입을 통제하며 커뮤니티의 결정을 전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면 이것을 과연 미학적 창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