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가봐, 빈 밤에 기억이 와있어_단식광대

2016년 11월 14일 발행

노래의 본적(本籍)은 아마도 시(詩)겠지만, 노래가 기어코 시에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택한 그것은,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는 읽는 이의 시각과 정신을 온전히 소유해 제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 의미에 어렵사리 도달하게 만들지만, 노래는 듣는 이의 청각과 정신을 제압하지 않으면서도, 듣는 이가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함께 듣든 무엇을 행위하든 상관없이,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노래의 몫을 다한다. 다시 말해서, 노래는 배경 음악의 쓰임새처럼 소리를 전달하면서도 다른 소리를 빼앗지 않고, 다른 감각과 행위·정신에 공유와 연대에만 종사하는 ‘사적 소유’의 해방을 앞서 담지한다. 그리고 이점은 시와의 결별 이후의 노래가 겪은 성숙이면서도 또한 거의 모든 예술과의 차별됨이라는 점에서 노래가 가진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래는 기억을 담을 수 있다. 감각이 담은 날 것의 기억보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존재가 무엇도 할 수 있다는 태도는 기억을 존재와 단단히 동여매어 연대시킨다. 그러나 단순히 그가 ‘저장’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오랜만에 무심히 만난 노래에 옛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낯선 노래에 익숙한 기억을 떠올리게도 또 있지도 않은 기억을 생성해내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여지(餘地)로서 즉, 노래가 소유를 포기하면서 오히려 비웠기에 얻어낸 ‘빈 방’이다.

그리고 ‘빈 방’은 미학적으로 진보적인 틀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한 편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예술가와 미학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무관하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미학적으로는 보수적인 틀을 고수해왔다는 것은 우리 예술계에서 종종 넓게 존재하는 부분이다. 미학의 틀에서 그리고 예술의 문법이란 층위에서 ‘빈 방’은 예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심이다. 문학에서 언어는, 영화에서 영상은, 그러니까 노래에서 멜로디와 가사는 의미와 정서를 스스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가. 보수적인 틀에선 예술이 가진 문법이 모든 진실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이 물음에 대하여 답해질 때, 진보적인 예술은 표현 그 자체를 문제시한다. ‘진실은 표현 가능한 것인가’ 더 나아가 ‘도대체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보적인 예술은 이 물음에 답을 유예하면서 ‘빈 방’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진실은 훼손될지도 모르니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술 안에서 은닉되면서 보존될 뿐이라는 것. 이때 ‘빈 방’은 의미와 정서라는 진실이 거주할 수 있는 고도의 구축물이다.

그때 예술은 비의(非意)의 언어를 경유하기도하고, 주연과 조연, 배경을 나누던 포커스를 해체하기를 무릅쓰고, 난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난해는 이제껏 현대 예술을 몰락으로 내몰았을지 모르는 죄인으로 취급되지만, 그것이 적어도 의심에서 출발한다면, 적어도 예술이 최선을 다해 예술이기를 시도하는 표지가 된다. 그리고 노래는 처음부터 ‘빈 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랫동안 늘 새로운 예술일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노래가 쓰여지고 불러지고도 노래는 여전히 왜 다시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여전히 담아야할 기억이, 간직해야할 기억이 새로이 태어나는 까닭이고, 은닉하고 보존되어야 하는 진실이 유효한 까닭이다.

그럼, 이제 ‘빈 방’에 놓일 기억과 진실은 서로를 어떻게 대우할까. 대부분 그들은 서로를 모른 체하지만, 좋은 노래에서 그들은 서로를 애무하거나 위무한다. 이는 ‘사적’인 기억과 ‘공동’의 진실의 유착이다. 존재는 아무리 이해한다는 말을 해봤자 타인의 느낌에 도달할 수 없지만, ‘사적’인 것에서 헤맸던 개인을 좋은 노래는 ‘빈 방’에서 타인과 만나 비로소 우리를 느낌의 공동체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단식광대의 <새벽달>을 들었을 때 좋은 노래라고 생각했다. 또 그 때 <새벽달>의 ‘빈 방’은 오히려 ‘빈 밤’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빈 밤’이라 부르고만 싶어졌다.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18091

2
새벽은 감정에 있어서 공평한 시간이다. 한 시가 넘어야 새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벽이 ‘새벽’이 되는 때는 자신만 깨어있다고 느낄 때, 어느 누구와도 단절되어 있은 후 시야가 어둠에 의해서 가리워져 스스로만 감각될 때이다. 비로소 이제는 돌아와 새벽 앞에 선 존재는 혼자이게 되었으며, 바깥으로 세웠던 감각은 점차 내면으로 침전한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외로움과 상실감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제외한 모두가 잠든 것은 아님을 모두는 안다. 그 때 모두는 그 외로움과 상실감에 외부 그리고 타인과의 조우를 포기한 것뿐이다. 새벽은 사실 스스로를 제외한 모두가 이탈한 시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탈시킨 시간이다.

그래서 <새벽달>은 “창밖엔 어둠만/ 왜 나를 그댄 모르죠/ 아직 아직 나 여기에 있어요/ 매일 매일 그댈 보러 왔어요”라고 포기한 타인과 외부를 상기시킨다. 새벽은 여전히 연결될 수 있는 시간이며, 존재는 외로움과 상실감으로만 하루를 종결시킬 필요가 없다. ‘새벽달’은 창밖의 ‘달’이면서, 존재가 자발적으로 끊어버린 타인이자 외부이다. 존재가 오해한 그들의 이탈이 만들어낸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그들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새벽달’은 “다시 밤이 또 두려워 지겠죠/ 어쩜 그댄 날 미워도 하겠죠”하며 알면서도, 그는 “나라도 좋다면/ 밤새워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라는 말을 건넨다.

곡 전체에 흐르는 멜로디는 느릿하다 못해 차라리 여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곡 진행에 여백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사용되는 악기의 사운드에도 여백이 존재한다. 사운드는 듣는 이에게 곧바로 전달되는 것 같지 않으며 먼 곳에서 무언가를 통과해 혹은 사이에 두곤 감각되는 듯하다. 이펙터가 만들어낸 여백이다. 이 여백을 두고 보컬이 피어나온다. 피어나온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절대로 직접적이고 완전하다는 말은 노래와 어울리지 않는다. 투과하는 안개에 옷이 젖듯, 향기가 바람에 실리듯 목소리는 은근하게 여백 위를 부유한다.
그리고 이 여백은 노래가 본디 지니고 있었던 ‘빈 방’의 무게를 더 확실하고 선명하게 만든다. 아무 기억이 들어가도 좋은 장소가 아닌, 노래가 가진 힘으로 ‘빈 방’은 상실감과 외로움이란 정서를 공유하는 기억이 담기거나, 외부와 타인과 단절됐던 기억이 회상되거나, 누군가는 외로운 상실감에 미움지었으리라하는 상상의 기억이 창조되어 노래의 ‘빈 방’에 풍성하게 자리 잡는다. 그리고 “아직 아직 나 여기에 있어요”라는 노랫말로 어딘가에 깨어있을 타인을 염두하며 각자의 ‘빈 방’은 비로소 연결되거나 넓이를 알 수 없는 ‘빈 밤’으로 탄생한다. 노래의 방점은 여기에 찍힐 것이다. 스스로를 제외한 모두가 이탈한 시간이란 것은 오해일 뿐이니, 이탈시킨 스스로만 돌아온다면 당신을 아는 ‘나’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사실은 “아니 아니 날 떠나지 말아요/ 아직 아직 더 내 곁에 남아줘”라는 말로 당신을 찾고 있으며 그러니 새벽은 여전히 연대의 공간일 수 있다는 것.

노래가 ‘빈 방’이란 특징을 갖는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빈 방’이 미학적인 틀에서 유의미한 이유는 예술이 스스로를 의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 예술이기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새벽달>은 본디 가지고 있던 ‘빈 방’을 ‘빈 방은 가능한 것인가’라는 의심으로써 형식인면에서-멜로디와 사운드, 보컬의 여백을 이용한- 다시 한 번 ‘빈 방’을 재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재확인은 예술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진실은 표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진실은 표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물음이 대체 가능한 것인가’라 두제곱해 묻는 변증법적 물음이다. 그리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 ‘빈 방’들이 연결되며 확장되었을 때 ‘빈 방’은 ‘우리’의 ‘빈 밤’이 된다. 여기서 사적인 ‘기억’이 공동의 ‘진실’과 유착한다. 그래서 가사의 끝은 이렇게 끝날 것이다. “언젠가 우리”

3
단식광대가 의도한 <새벽달>이 표상하는 대상은 세월호 사태였다. 그래서 새벽은 세월호가 잠긴 여전히 어두운 바다의 시간이거나, 진실에 깜깜한 우리의 사정일 수도 있으며, ‘창밖’이란 노랫말은 세월호 안의 아이들의 시선이거나 세월호에 눈을 돌린 어른들의 시선을 은유한다 읽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애써 세월호를 평론의 주제로 한정하지 않은 것은 미천한 글재주를 차치하더라도, ‘빈 방’을 소중히 여기는 <새벽달>이란 예술의 태도를 ‘정확함’과 ‘확신’으로 채우는 것은, 오히려 작품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빈 방’에 주소를 세기거나, ‘빈 방’을 구체적이고 빽빽하게 만들어 더 이상 ‘빈 방’이 아니게 해버릴 것이다. 평론의 업은 불투명한 예술을 삶의 세계로 유의미하게 돌리는데 있지만, 그렇다고 평론의 문법일 언어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평론도 예술의 한 편이니, 언어로부터 진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한 편으로 세월호는 그런 식으로 사유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세월호 사태는 기록의 대상을 초과해 “사상적 문제”로 다뤄지길 요청하는 문제이다. 세월호 사태는 팽목항의 사고나 안산의 사고 따위의 지역적이고 특수한 문제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은 객관의 영역을 초월해 주관적인 영역에 서있고, 세월호를 ‘한국의 위기’인 동시에 ‘나의 일’-즉 ‘우리’의 일-로서 규정하게끔 한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억과 사유는 구체적이면서도 ‘사적’으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사상적으로 공동의 ‘공적’인 기억으로 연결되고 유착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어느 누구도 지겹다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고, 앞으로의 세월호 사태는 막아야 한다고 새벽 내내 심장을 태우기도 한 것이다. 단, 새벽은 여전히 연대의 공간일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새벽달>을 은유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