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난민을 샘플링_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2016.07.16 발행

난민을
샘플링
_New Shelters
: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포스터

철학은 그저 부유물이다. 그것은 그래서 구체적인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쉽게 희미해지고 힘을 잃는 듯 보이지만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매개하여 관계하며 어느 때에 가서는 장소를 가지기도 한다. 분명 그것은 드물지만 자주, 장소를 갖는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은 여전히 혁명의 공기가 부유하는 곳이며 민주주의란 철학이 거주지를 마련한 장소이다.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은 노동이 해방의 계기이면서도 정치의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임을 여전히 증명하는 거주지이다. 우리의 장소도 다르지 않다. 광주의 금남로부터 명동 성당, 서울역 광장들에는 모두 해방과 민주주의가 부유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루되지 않은 장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철학을 거주시키고 있다. 도로, 병원, 학교, 극장 그리고 아케이드까지, 모든 장소는 어떤 철학을 소유하거나 어떤 철학을 배제시키고 밀어낸다.-이러한 측면은 푸코와 벤야민, 데이비드 하비 등의 저작에서도 발견된다- 만약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어떤 철학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장소에 철학이 부유하거나 거주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감지하지 못하는 ‘사적소유’만이 관련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들의 철학이 부유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철학은 공중에서 뿐만이 아니라 장소를 대상으로 적대하고 대결하기도 한다. 광장은 공원이여야 한다는 편과 주장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편, 공장과 사무실은 노동자가 점거할 수 있는 장소라는 편과 그것이 사유재산을 침범한다는 편, 학교는 학생들의 자치 공간일 수도 있다는 편과 재단과 이사들의 소유라는 편으로. 그리고 우리는 이미 멈추었을지 모를 오래된 ‘이상(理想)’의 논쟁을 벌인 기억을 갖고 있다. 소유의 근거는 노동이므로 생산의 결과물도 노동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토지 그 자체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토지는 오직 소유되지 않고 점유될 뿐이라는 것에 대한 논쟁, 아마 장소에서 대결하는 철학의 모습은 결론짓지 못한 이 논쟁으로부터 더 선명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광장으로 나갈 때, 차들이 비워진 도로를 점거한 시위에서 존재는 스스로의 철학이 장소를 수복했다는 쾌감 이상으로 토지의 진리적 모습과 정면으로 마주했다는 해방감에 젖는다. 그리고 그 해방감에 우리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지도, 때때로 더 자기 것을 포기하는 숭고함을 보이는지도 또다시 거리와 광장을 찾는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한 장소와 건축물에 “무엇을 위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일은 그 공간에 침착(沈着)되어있던 사유(私有)에 관계하는 자유와 자본들을 추방시키는 반면에 ‘다른’ 것을 사유(思惟)시키고, 주체로 만드는 일이기에 ‘적대(敵對)’가 허용되어있어야만 한다. 그런 생각으로 아르코 미술관에서 전시 《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분명 “난민을 위한”이라는 수식어와 건축의 결합은 갸날프게 지금의 정세와 난민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보려는 시도이지만, 그것은 도대체 ‘난민’을 진정으로 표상하지 못하며, 우리를 난민의 처지 앞에 입회시키지 못한다. 분명, 난민이 예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며 그것만으로 난민에 대한 기억을 존재에게 총명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제껏 사유를 게을리 해왔던 존재 그리고 우리의 짐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만족해선 안 된다.

노동이 소유의 근거일 때 그것이 정치의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의 위치에 놓이는 것은 정치란 ‘권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권자’라는 말은 오직 ‘권리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그 소유의 근거는 자유로운 자신의 몸과 정신의 노동이 투여되었다는 것이다. 소유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동의 결실을 스스로 영위하고 가진다는 관점을 의미할 때, 소유의 근거는 무엇보다 노동이라는 점에서 노동은 항상 소유라는 관념과 불가분하다. 다시 말해서, 노동이란 스스로 일함으로써 스스로를 온전히 또 오롯이 소유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나’는 권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후에 정치는 주어진다. 이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 뒤에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인 정치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민’은 가지지 못해 정치에서 배제되어 추방되거나 이탈된 그러나 이동된 좌표에서도 가지지 못해 여전히 배제된 이들의 다른 이름이며 정체이다.

그러나 전시는 한사코 난민의 정치경제학에 대해서는 물음하려하지 않는다. 「빅데이터 셸터링」이 “그들이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존 사회의 맥락 안에서 생활”(전시 소개 책자 4쪽)을 위한 제안을 건낼 때, 그것은 마치 특수한 것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선 평등이 실현될 수 없고, 오히려 특수함을 제거한 뒤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바디우의 제안을 떠올리게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표상하는 기존 사회의 맥락은 작품 안에서 맛집, 쇼핑, 여행과 같은 소비 성향이란 특수한 지점일 뿐이다. 기존 사회로부터 난민은 여전히 격리되어 있으며 소비 사회를 제외하면 난민이란 정체성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의 물음 역시 같이 격리되어 있다. 한편 「마음 한쪽 마당 한쪽 내어주기 프로젝트」와 「난초(難草), 식물 난민」은 난민을 각각 유기된 동물과 이름이 제거된 잡초로 은유한다. 그러나 전자는 난민과 비슷한 유기 동물에 대한 관심의 표현에서 그치고, 후자는 여전히 난민을 “하나 하나 이름을 돌려줄”(전시 소개 책자 8쪽) 특수한 존재로 사유하면서 특수함을 제거한 다음의 보통의 주권자의 지위에 대한 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다시-정착」과 「잠정적 완충지대」는 기존의 장소에 난민이란 사유를 더하고자 시도한 작품이다. 전자는 난민이 이주로 연결된 후의 상황을 농촌 지역 여성 이주자의 거주와 주거로 표현하는 한편, 후자는 예비군 훈련장을 탈북민의 수용소로의 활용을 표현한다. 그러나 「다시-정착」이 “건강한 노동력을 재생산”과 “트라우마의 극복”(전시 소개 책자 10쪽)을 위한 집이라 했을 때, 그것들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던 세계에 대한 물음은 작품이 활용한 원근법 만큼이나 요원해보인다. 그 요원한 공백이 작품보다 더 눈에 들어온다. 「잠정적 완충지대」는 결국 난민에 대한 가장 날 것과 같은 시각을 들켜버렸다. “상호 안전한 공존”(전시 소개 책자 12쪽)이라 할 때 그것은 두 가지의 언어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난민은 주민의 삶을 위협하거나, 주민은 난민의 삶을 위협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호는 위협한다. 이 때 난민의 유입은-특히 작품에서처럼 탈북자의 유입- 우리의 세계를 위협적이고 불안정하게 만들며, 난민을 위한 장소로 제안된 예비군 훈련장이란 장소는 “수용소”라는 단어의 대부분의 쓰임새처럼 통제와 관리 그리고 격리의 문법으로 읽힌다.

전시는 각자 새길바를 챙기기 위해 난민을 발췌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난민은 타자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전시를 “타자를 위한 건축적 제안들”로 고칠 수 있고, 모든 “난민”이 다른 타자들로 치환되어도 작품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난민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다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지 못해 정치에서 배제되어 추방되거나 이탈된 그러나 이동된 좌표에서도 가지지 못해 여전히 배제된 ‘정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저 스쳐갔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어떤 것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를 물음하는 ‘난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리비아를 혼란의 나락으로 빠뜨린 것은 유럽의 개입이었으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IS를 부상하게 만들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남부와 북부의 내전은 종족 간의 미움이 아니라 북부의 유전 발견으로부터 중국과 프랑스의 개입이 야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늘 기업과 자본이 중심에 있었다. 난민은 자본주의로부터 출현했고 난민을 ‘정확하게’ 위할 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어야 한다. 난민을 위한 제안은 그들에게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과 그 권리를 사용할 권리를 주는 것-그래서 배제되지 않는 주장을 할 수 있도록-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차라리 난민들의 집회를 위한 광장과 시위를 위한 통로였으면 어땠을까. 기존의 광장에 난민들을 위한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수많은 언어들로 된 집시법 등의 안내였다면, 또는 난민들의 노조 사무실이거나 바리케이트였다면. 이런 견해와 상상이 지극히 정치적이고 더군다나 고답적이면서 진부한 좌파스러운 발상이라면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난민의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또 장소에서 우리가 너무 익숙해 감지해내지 못하는 ‘사적소유’만이 관련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들의 철학의 부유를 보존하는 것 또한 역설적이게 정치적이며 보수적이다. “어떤 존재를 위할” 때 예술은 더 정확해져야하고, 존재를 더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난민이 도착할 현실과 느낄 뼈아픈 교훈은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었고, 다시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집중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을 포함한 모든 제안들이란 지금 여전히 난관일 것이기에 어쩌면 이번의 전시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했듯 그것은 존재와 우리의 짐이다. 난민이 토지의 진리적 모습과 마주해 해방감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의 타자가 해방감을 맛보는 일이란 결국 하나의 모순이 풀리는 일이어서 세계의 모두가 하나의 해방과 마주치게 된다. 그때서야 우리는 지금의 다툼을 멈추고 젠트리피케이션과 쫓겨나는 세입자, 홈리스에 대하여 왜곡된 임대차보호법 따위가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가 장소에 부유할 것이다.


* 참조
– 정림건축문화재단, 전시 《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아르코미술관, 2016
– 슬라보예 지젝, 김희상 역, 《새로운 계급 투쟁》, 자음과 모음, 2016
–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