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메리 크리스마스, 유다_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2016.05.03 발행

메리 크리스마스, 유다
_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Andres Serrano, piss Christ, 1987 ? “타락에 확신이 있는 듯 했다.” -토머스 E. 로렌스

1
언제부터야? 배신을 마주한 사람은 이 말의 주인이 되는 것을 늘 피할 수 없다. 그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모든 스스로를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때 상대는 그 말을 망설였었구나, 불필요했던 그 행동을 해야 했구나 하면서. 이제 그가 이해했던 것은 그가 제일 잘한 ‘오해’가 되고, 그가 했던 미안한 오해들은 그가 제일 잘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가 쥔 결과물들이 사실은 거짓된 결론들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배신이란 ‘사건’의 서사를 파악하며 인정할 수 있다.

물론, 고작 그정도가지고 스스로를 재정립해야만 한다고 얘기한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인정한 것은 겨우 그가 무지했던 서사와 상대가 그런 인간이란 것 정도일 뿐이다. 인간은 타인과 살아가야 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 인간은 누구보다 그 스스로와 살아가야만 한다. 그는 이제 배신당한 ‘그’와 살아가야 한다. 그는 상대에게 단 한 번 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도 상대를 얻을 수 없었던 ‘그’를 그러니까 빈곤한 스스로를 자아에 추가시켜야 한다. 만약 상대가 스스로에게 전부였다면 자신의 전체를 바꿔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배신의 모든 것을 이해한 최종의 순간에서 비정하게 상대를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드물은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 배신이란 ‘사건’이 종료되기 위해서는 그 기만적인 서사를 파악하고, 상대가 겨우 그따위 인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가 미운 나를 받아드리면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인정과 파악 후에도 상대를 미워할 수 없는 일이 기어코 생기고 만다. 그는 이제 상대가 아니라 ‘그런 상대를 미워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더 괴롭고 미워진다. 이 인지 부조화는 상대에게선 과거형일 배신을 현재진행형으로 바꾸며 그를 나락으로 이끌고, 더 빈곤한 존재로 만든다. 젠장, 도무지 이런 모순을 어떻게 안아야 할까.

2
학문이 개념과 당위들을 규정하고, 진리를 발명해내는 것을 통해서 세계의 인간이 그것들을 바라도록 재촉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걷는다. 그것은 정적인 것에서 인간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는 것, 진행하는 것들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정확하게 표현해내고자 한다. 늘 살아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인간을 적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 인간이 귀 기울이는 대상이 있다면 예술은 마땅히 그와 조우한다. 그리고 배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안는다. 그중에서 배신의 자리라면 응당 자주 소환되는 것은 ‘이스카리옷 유다’였다.

말씀이 스스로를 낮추어 인간이 되었다면, 상위 질서를 반영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낮추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예수의 자기희생이 완전했던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를 완전히 낮춘다면 그것은 죄의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에서 유다를 그렇게 서술한다. 그때 그의 배신은 복음의 지위를 받고, 예수의 서사를 농밀하게 완성하게 된다. 서사 안에서 닐스 루네베리의 이름을 빌린 보르헤스가 갖고 있는 단언된 확신은 세 가지다.

첫 번째, 예수는 매일 회당에서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기적을 행했다. 그런 회당에서 예수에게 입맞춤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지목하는 행위는 불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그것은 어떠한 의미의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의미란 이렇다. 하위 질서는 상위 질서를 반영해야 한다. 말씀이 스스로를 낮추어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의 처지는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로, 죄의 인간으로 낮춰져야만 한다. 유다는 예수의 반영일 뿐이다. 그래서 가장 순결한 죄를 위해 유다에게는 불필요한 입맞춤과 서른 냥밖에 되지 않는 불필요한 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첫 번째 주장은 쉽게 비판해 휩싸였다. 전지전능한 신이 스스로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은 필요 없다는 것. 이를 닐스 루네베리는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다에 대해 달리 알아야 한다고 다시 주장한다. 유다는 그런 신이 복음을 위해 선택한 인간이니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가장 “훌륭한 해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닐스 루네베리가 두 번째로 유다를 이해하기 위해 착목하는 것은 그의 금욕주의다. 복음을 위해 금욕주의자는 육체를 고행한다. 그러나 유다는 더 순결한 금욕을 위해 육체가 아닌 영혼을 비하하는 고행을 진행한다. “명예와 안락, 평화와 천국”을 포기하는 것이다. 유다는 하나님을 안의 기쁨을 충분히 아는 자였기에 지옥을 추구했다.

닐스 루네베리의 마지막 주장인 세 번째는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농도 짙은 것이다. 그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의 논리를 동시에 대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육화해 인간이 되었다. 이는 완전해야 하며 태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과 무죄성은 등식이 될 수 없고, 오직 인간은 죄와 함께 항등식으로 성립한다. 그러므로 겨우 무결(無缺)하기만 하며, 십자가에서 겪은 고행 정도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비약이다. 죄는 완전해야 하며 고행은 육체를 넘어 영혼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삼위일체는 수정되어야 한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 “부정한 인간, 영원한 벌을 받아 끝없이 깊은 구렁에 빠질 정도”의 인간, 바로 유다가 하나님이다.

3
소설은 보르헤스가 기독교적 환상 문학이라 명명한 것보다 더 조밀하고 침착하다. 어느 목회자의 독해보다 예민하고 총명한 모양새는 금방이라도 기독교 신도를 만나면 응당 그의 믿음을 수정해주어야 할 것 같은 충동마저 그려진다. 그러면 그 후 소설의 외부로 다시 돌아가 그가 배신의 자리에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 밖의 인간은 소설 안에서 어떤 바라고 진행되는 것이 정확하고 풍부해지게 되어 배신의 자리에 놓인 모순을 안을 수 있을까.

예술은 말했듯 세계의 인간이 그것들을 바라도록 재촉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늘 그것에 소홀하고 때때로 노력하면서 서투른 태생이다. 그러니 소설을 통해 배신의 서사는 인정하지만 배신한 상대를 미워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결국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바라는 것, 진행하는 것들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했고 이는 배신의 자리 안에서 그를 미워할 수 없어 더 미워져 버린 “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노곤한 긍정을 만들어내어 스스로와 다시 살게 해주는 데 역할을 한다.

유다는 누구보다 완전하고 무결한 예수의 배신자라는 것. 유다뿐만 아니라 예수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 같은 것은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 그러나 유다의 배신은 예수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 혹은 그는 불가역적인 헌신과 완전한 희생을 위해 부정한 인간이 되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들처럼 사실 상대에게 진심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배신이란 일어날 수도 있고, 때때로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거나 더 높은 가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인간은 마침내 스스로의 어딘가를 긍정하게 된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더는 인간사에 대한 너무도 터무니없는 이 오독에 인간의 문학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인간이 때때로 자주 마주치는 배신도, 사랑의 종말도 포근히 받아드리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미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라리 스스로가 밉고 어리석게 느껴 고통스럽다 해도 상대에 대한 미움을 안은 스스로와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인간이란 생물은 정말 잠깐 가엽다가 오랫동안 더 사랑스러워진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인간을 사랑하기로 한 예술은 보르헤스, 지젝, 팀 라이스, 레이디 가가들의 이름을 빌려 유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참조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역, 《픽션들(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민음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