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_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_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2016.08.01 발행

押見 修造, 惡の華 중에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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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고인석에 앉았고 곧 판사가 들어온다. 이제 재판은 시작된다. 그런데 판사가 기침을 참기 위해 수건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뿔싸, 판사가 감기에 걸렸던가. 이번엔 판사가 배를 어루만진다. 젠장, 판사는 오늘 점심을 거른 것 같다. 그는 재빨리 그의 변호인에게 속샀였다. 판사는 독감에 걸린 게 틀림없으며, 저 꾀죄죄한 피부를 보니 잠도 못 잤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입맛이 없어 점심까지 걸렀을 것이 분명하다. 독감에 걸리고 점심도 안 챙겨 먹은 판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니 혹시 몸은 괜찮은지, 점심은 드셨는지 물어보라. 변호인은 애써 그의 고객을 진정시켰지만, 결국 그는 그의 예상대로 재판에서 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의로운 법 집행을 위해서 모든 율사(律士)는 재판마다 건강검진과 수면 체크와 의무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기로.

그리고 세계에서 겨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판사를 사적인 생활을 가지며 식사와 건강 따위를 걱정해야 하는 실존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 존재는 우리에게 걸어 다니는 법전이거나 기껏해야 숨을 쉬는 법의 화신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커피숍의 알바생은 걸어 다니는 커피 머신일 뿐이며 은행 창구 직원은 숨을 쉬는 ATM기 등등으로, 우리에게 인간은 그저 살아있는 사물로 현상(現像)된다. 우리는 그 사물에 엔간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세계는 유지되며 우린 그렇게 유지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건강과 식사를 점검하는 불필요한 물음과 의심을 두고 살아야 할 테니, 효용과 효율이 미덕인 세계에서 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아마 갑질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타인을 사물로 여기는 사고가 ‘우연히’ 그를 한낱 ‘도구’로 취급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우연히 혹은 실수로 발생한 사고여서 우리는 이런 갑질에 한사코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색을 하곤, 그를 비난하고 비판하면 그걸로 그칠 일이라는 것. 우리는 이에 대해 결코 이성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히’가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사실 문제는 우리가 정상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의 자연스러운 성장이며, 그러니까 갑질은 개인적으로 그 성장이 표출된 것뿐이고, 우리를 비참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한 국가폭력, 시장경제, 구조조정 등이 모두 사실, 존재들을 사물로 만들어서 세계를 유지했던 이성의 연장선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무수한 파국들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세계가 삐걱될 때마다 무수히 고개를 숙이는 숫자와 기호들의 그래프를 보면서 불안해하고 복구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의 필연성 혹은 적어도 가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밝혀야 한다.

세계의 파국을 밝히는 일이라면 그 원인일 자본주의에 대해 물음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제도 자체의 변혁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도 혁신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원인의 원인을 추궁하는 일이며 우리가 이에 회피할 수 없는 물음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만들어온 ‘이성’과 ‘계몽’은 누구신가. 두 번째, ‘이성’과 ‘계몽’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이토록 쉽게도 받아드렸는가. 이를 위해서 우리가 참조해야할 철학자는 단연 아도르노다. 그는 우리가 늘 찬미하는 진보의 순간에서도 부정적인 응시를 멈추지 않으며 ‘광기(狂氣)’를 찾아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는 ‘이성’과 ‘계몽’이 어떻게 잠재적 전체주의인 자본주의의 원리가 되었는지 또 그 원리를 너무나 쉽게 세계의 존재들이 수용한 것은 모두 ‘문화산업’덕택이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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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분명, 몇 차례의 전복(顚覆)이 있었다. 1789년과 1917년이 그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외의 유의미한 전복들이 존재해 세계의 미증유(未曾有)를 증유(曾有)로 바꾸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진보를 이루어낸 사유를 ‘계몽(enlightment)’이라 불렀다. 계몽은 신화와 마술의 전제(專制)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든 “이성적으로 각성된 사유 양식”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빛을 비추어 분명하게 밝혀준다는 이름값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의 결과는 알려진 것처럼 최악의 편에서 아우슈비츠에 도달했거나, 최선의 편에서 자본주의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아도르노의 문제인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그리고 제시한다, “인류가 완전히 배반당하지 않으려면 계몽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제1원칙은 ‘자기보존’이다. 먼 과거의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비대칭적이었으며 그것은 늘 대자연이 주는 공포와 죽음 앞에 선 단독자를 의미했다. 이에 인간이 택한 것은 자연과 맞서, 자연을 지배하는 길이었다. 개별적으로 보자면 빈약하기 짝이 없던 존재들은 그 힘을 집약하기 위해서 집단적인 사회관계를 형성했다. 권력을 만들었고, 지배와 통제, 구속을 발명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이 가진 권력을 스스로의 손에 넣었지만, 동시에 탄생한 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였다. 다시 말해,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올 때마다 인간에 대한 체계의 폭력이 점점 커져가는 부조리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성의 발전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외적 자연의 지배자이자 사회의 지배자인 인간은 조금 더 완벽한 지배를 위해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내적 자연 마저도 복종시키고자 하거나 부인하려 한다.

아도르노에게 내적 자연은 행복으로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낯과 불가분하다. 인간 내면의 모든 욕망과, 감정, 감성, 본능과 충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완벽한 지배를 위해 제거되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육아에서의 모성·부성은 사회관계에서는 철저히-특히 노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수면욕과 식욕은 게으름과 역겨움의 근원지다. 사사로운 감정은 사회관계에서 불필요한 것이며, 욕망들은 자제되어야만 한다. 모든 감성적인 것에 대한 억압, 정서적 자발성과 욕망의 거세 그렇게 내적 자연이 유산되고 나서야 인간은 사회적 통제가 가능한 합리적인 주체로 탄생된다. 이제 인간은 이를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판단조차도 내리지 않고 이미 수긍하는 스스로에 대한 폭력과 철저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인간 자신으로부터의 인간 자체를 말살시키는 자기 소외로 나아간다.

이러한 계몽의 배반을 보여주는 아도르노의 예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계몽의 원형이자 최초의 증인인 「오디세이아」, 다른 하나는 그 계몽의 최종 진화가 결국 재앙과 광기임을 보여주는 사드의 「줄리엣」. 여기서는 뒤의 문화산업과의 연결을 염두에 두고 전자를 구체적으로 다루려한다.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현대적인 계몽을 상징하는 인물이면서 “부르주아적인 개인의 원형”이다. 오디세우스가 조우하는 수많은 난관 중의 하나는 세이렌의 섬을 지나가는 것이다. 세이렌은 바다의 요정이며, 그들의 노래를 듣는 자는 그 치명적인 매혹에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제물이 된다. 그가 이들의 섬을 지나가면서 선택한 방법은 노를 젓는 부하들에게는 귀를 밀랍으로 막으며, 자신의 몸은 돛대에 단단히 묶는 것이었다. 세이렌의 치명적인 노래는 지배자인 그의 명령에 의해 피지배자들의 귀를 울리지 못하며, 지배자인 그는 노래를 듣고서 스스로를 풀어 달라 애원하지만 “선원들은 노래의 위험만을 알 뿐,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기에” 노래는 한낱 향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노래는 무력해지고 오디세우스는 자기보존에 성공한다.

이 알레고리는 자기보존의 욕구가 계몽에 다다르며 ‘자연의 대한 지배’가 ‘인간(사회)에 대한 지배’로 또 인간에 대한 지배가 ‘인간의 자기 소외(인간 자체의 말살)’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노를 젓는 선원은 현대 세계의 노동자들에 대한 은유다. 노동자는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을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을 제거하거나 부인해야하며, 그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충동마저 그 이상의 노력으로 집요하게 승화”시키는 것뿐이다. 예술에 관하여는 그것에 빠져드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만을 인지하고 있으면 될 뿐, 감히 향유해서는 안 된다. 노동 역시 자기실현의 의지를 가져서는 안 되며 단지 살아남기 위한 강제 노동이어야 한다. 자기실현의 의지를 가진 순간 노동자는 사유하게 되며 이는 합리적인 개인을 박탈시켜 사회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자기 소외는 지배자에게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래는 죽음을 선사할 정도로의 강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오디세우스에게 그것은 “한갓된 관조의 대상”일 뿐이다. 노동하는 자는 행복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고 단절되며, 노동을 면제받은 자는 행복의 ‘표상’만을 ‘알’게 되는 것에서 그친다.

이런 식으로 세이렌의 노래로 상징되는 ‘행복에의 약속’을 포기하며 “예술 향유와 노동은 서로 결별”하게 된다. 이 결별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계몽의 역사 혹은 진보의 서사가 계몽적 주체의 행복에 대한 체념과 단념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몫보다 더 많은 몫을 희생하는 자기희생을 거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때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했던 노동자 계급은 이미 행복-더 나은 세계와 삶일-을 알지 못하거나 제거했기에, 스스로가 처한 계급적 위치로부터 당연하게도 보장되었던 진리의 접근과 실천의 역할의 지위는 더 이상 어떤 특권도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 “신화 이래로 순종적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듣지 못하는 귀는 지배자의 움직이지 못함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노동자들의 혁명적 역할은 기한 없이 유예된다. 이는 단순히 부르주아의 술책을 넘어 계몽으로부터 비롯된 “산업사회의 논리적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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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세계의 파국은 계몽의 전개 과정인 자기보존에 대한 욕구로 출발한 자연의 지배가 인간에 대한 지배 그리고 인간의 자기 소외로 이어진 것에서 출현했다.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는 이성의 지배가 총체화된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이다. 이상이 계몽의 전개에 있어서의 얼개라면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존재에 대한 ‘동일성 원리’의 실현이다. 동일성 원리란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대상이 가진 차이와 특수를 제거하고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강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대상은 수량화될 수 있고, 계산 가능하며, 또 대체가 가능한 서로 동일한 사물·도구로 만들어야 한다. 반면에 그것의 구체적이 낯과 질은 염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첫째로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 인간이 도입한 동일성 원리는 자연을 구체적인 낯이 아닌 종, 속, 과 등의 ‘개념’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다음 사회적 지배를 위해서 상품 생산 사회의 교환 원리가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노동이 평균 노동 시간이라는 추상적 보편 개념으로 출현하는 것과 같다. 동일성 원리는 교환이라는 사회적 모델 아래에서 실현되며 또한 동일성 원리 없이는 교환이 불가능하다. 오직 교환을 통해서 “비동일적 개별 존재나 업적들이 통분”되고 동일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교환이 가능해지며 그런 노동자들은 간헐적으로 일자리를 얻지만, 그로부터 자신의 개성이나 정체성을 형성하고 스스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들은 주체화에 늘 실패하며 어떤 정체성도 갖지 못한 비생산자적인 소비 집단 혹은 그저 ‘인구’라는 형식으로 인식되길 강제된다. 이런 원리가 확장되면 차이와 개별성은 사라지고 단지 체계의 기능으로서 모두는 동일자로, 총체성으로 된다.

이때 인간에게는 목적을 위해서 효율적인 수단만을 고려하는 ‘도구적 이성’만이 보존되고, 목적의 가치를 따지거나 물음하지 않고 오직 수단만을 고려하는 인간은 자율성을 소유하는 것도 비판적 반성을 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결국 총체적 관리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방향의 종착지는 알려져 있듯 확정되어있다. 최악의 편에서는 아우슈비츠로, 그리고 최선의 편에서는 잠재적 전체주의일 자본주의로. 아도르노는 이렇게 강조한다. “계몽의 철학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전체주의적 관념은 인간의 특성을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전유한다. 이성과 감성은 비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된다. 합리주의적 계획은 전체주의적 테러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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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물음이 남겨진다.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 ‘개념’적 인식이라는 동일성 원리가, 사회(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 교환이라는 동일성 원리가 실현되었다면 그리고 그 후 ‘도구적 이성’만이 보존되었다면 내적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어떤 동일성 원리가 실현되는가. 이때 아도르노가 지목하는 것은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이다. 이 둘은 사람들의 내적 자연에 작동하여 모두가 동일하게 사고하며 반응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서, 동일성 원리의 충실하고 효과적인 도구로서 대중문화는 그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도록 전체를 소유하며 지배 체계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로써 잠재적 전체주의로서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그 어떠한 저항과 반발에 부딪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내적 자연을 지배하게 만드는 선명한 수단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대중문화의 옹호자들이 마음에 들어 할 의미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 대중문화라는 표현을 ‘문화산업’이라는 단어로 교체했지만 문화산업은 오늘날 부가가치를 낳을 수 있는 매우 찬란한 단어가 되었다. (문화)예술은 인간적인 가치와 정서 그리고 자율성과 창조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늘 산업에 적대적인 것이었지만 그러나 문화산업은 이제 그저 모든 사람을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 가능하며 교체 가능한 복제품”으로 만드는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각자는 절대적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로서 절대적인 무”로 취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와 라디오, 문학 그리고 음악은 더 이상 “예술인 척할 필요가 없다. 대중매체가 단순히 사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예 한 술 더 떠 그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허섭스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기업이라고 부르며, 사장의 수입이 공개되면 그로써 그들의 생산물이 사회적으로 유용한가 아닌가에 대한 의심은 충분히 해소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오늘날 예술이 위치한 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가창력보다 비주얼과 선정성을, 연기력보다 인지도를, 내러티브보다 막장성을 기용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대중의 수요에 민주적으로 응한다는 것으로 정당화되며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얼마큼의 수익을 얻었으며 인기를 끌었는지에 대한 것으로 대체된다. 이제 작품에 대한 가치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논의는 배제된 체 또 분석과 비판, 평론은 거세된 체 오직 리뷰들만 창궐하며 그것들이 얼마나 모범적인 대중예술의 사례로 평가되어야하는지, 작품은 인기 요소를 얼마큼이나 잘 재현하는지만이 관심사가 된다. 즉, 예술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시장성이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SNS에서 작품에 대한 진중한 반응보다 티켓을 비롯한 인증샷들이 난무하는 것은 실제로 체험하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숭배보다 티켓을 사기 위해 자신이 지불했던 돈을 숭배하는 것의 반영이다. 작품은 티켓의 가격이 비쌀수록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되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처지가 되는 스스로의 자부심과 만족감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 만족감은 예술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교환 가치가 주는 가상으로부터 나올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산업이 효과적으로 안착되는 것은 두 가지의 특성에서 비롯된 조작으로부터 비롯된다. 첫 번째는 표준화와 도식화다. 이 둘은 각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늘 관계지으며 밀접하게 나타난다. 언급했듯 문화산업은 내적 자연의 동일성 원리의 실현이다. 따라서 어느 예술이 대중의 수요에 민주적으로 응했다는 말은 곧이곧대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응하기 전에 문화산업은 이미 동일성 원리가 그러했듯 수요를 획일화 시킨다. 초대형 스크린에 수많은 상영관을 자랑하는 멀티플렉스가 무수히 존재하지만 실제 상영되는 영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 여러 유형의 인기 가요나 인기 배우, 멜로물의 유행이 지나가고 돌아오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그저 반복일 뿐이라는 것. 곡조는 32 마디로 구성되며, 음역은 9도 내로 제한되며 처음 몇 마디만 들어도 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짐작하고 그것이 맞아 떨어질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예술이 표준적인 도식과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재생산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친숙해진 대중은 그것을 선호하며 자본은 민주적으로 그것을 재생산하며 표준화를 강화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여론은 이미 조작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사이비 개성화이다. 표준화는 동일하게 조작된 선호와 취향을 반복함으로써 실패를 막아주지만 늘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인척 하지 않아도 되지만 상품이어야 하기에 대중이 표준화로 하여금 구태의연한 복제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전에 그것이 개성적이라는 인식도 함께 선사해야만 한다.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지만 아직 존재해본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머리 속에 떠올리게 만드는 말인 ‘참신한 아이디어’, ‘신선한 무엇’, ‘경이스러운 것’이라는 단어는 애플의 광고에서 항상 수식되듯 들먹여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이 새로움을 “‘새로움’을 배제”하는 새로움이라 제시한다.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무엇인가가 마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차이는 오히려 강조되고 선전된다. 대중에게는 각계각층을 위해 다양한 질의 대량 생산물이 제공되지만, 그것은 양화(洋靴)의 법칙을 더욱 완벽하게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모두를 지배하기 위해 대중을 분류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총체적인 관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총체적인 관리 아래에서 별다른 노력 없이 예술을 이해하게 된 대중은 늘 반복되는 것에 기계적이며 수동적으로 반응하도록 훈육되었기에 사유는 불구가 되고 감성과 욕구 등의 내적 자연은 지배를 위한 문화산업이 복종을 위해 허락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부인되거나 제거된다. 즉, 문화 소비자들을 “자발성과 상상력을 불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고는 “여가 시간에서조차 소비를 활발하게 만드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불구가 된 사유와 부인되거나 제거된 감정만을 가진 존재가 되어, 체제를 인식할 수 있는 힘과 또 그것에 저항 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상태로 존재는 예술을 한갓된 유흥으로만 소비한다. 고된 일상의 괴로움을 잠시 잊게 해주거나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예술이 약속했던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 된다. 즉, ‘해방’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렇게 문화산업은 대중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 강요되는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비동일성을 사유해내는 힘, 현실의 지배와 억압에 대해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힘 모두를 외면하게 된다. 최근 몇 회나 리메이크 되었던 들국화의 ‘걱정 말아요, 그대’는 그 가사와 다르게 오직 “이리 와서 실컷 울어”나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위로만을 던질 뿐, 고통을 주는 세계를 추궁하는 사유와 실천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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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어떤 식으로의 정치가 자본에 반하거나 거스를 수 있을까’라는 드물게만 된 물음에서도 예술은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만 언급하게 되었다. 예술의 정치는 예술과 특수한 관계를 맺은 자들의 정치이거나 예술을 관리하기 위한 정치만으로 앙상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예술의 정치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한다면 또는 예술이 검열, 지원, 복지 등의 문제로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면 다면 예술은 정치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 경우 예술은 그저 직업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소비자의 이해를 수용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예술이 아도르노가 제시하듯 세계와 정치의 하나의 항이라면, 또 그런 세계와 정치를 받아들이도록 한 가장 최종에 위치한 매개자라면 반대로 예술은 그렇기에 끝까지 세계와 대립하는 불변항으로 남아야 한다. 하나의 시도의 실패를 취급하는 방법은 그 시도를 포기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실패에서도 유의미하게 보존되어야 할 것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계몽의 변증법」,은 예술을 가장 우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예술을 가장 활력적으로 만드는 독법으로 읽혀져야 한다. 예술은 분명 인간의 사유를 불구로 만들고 감성을 거세시켜 세계에 순응하게 만들었지만 그렇기에 예술 자체를 혁신한다면 세계는 변혁된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인간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서 기약도 가망도 없이 먼 세계의 변혁에 기여하고 헌신해야 한다.

아도르노의 헌신은 “아우슈비츠가 되풀이되지 않고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라”라는 새로운 정언명령을 포함하는 「부정의 변증법」과 급작스런 죽음에서 미완으로 끝난 「미학이론」에서 이어진다. 그간의 변증법이 정(正)과 반(反)의 통일에서 동일성을 산출해내는 긍정의 변증법이었다면 새로운 변증법은 사회에서 부정되는 것이 지속되는 한 ‘부정(否定)’의 부정은 부정으로 남겨져야 한다. 그것을 통해 비동일자는 주체로 현상되고 구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 변증법은 이미 예술 그 자체의 본령으로 존속되는 것이기도 했다. 예술은 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상에 다가가 닮아지려 한다(미메시스). 그는 대상을 사물과 도구로 취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위에 두고 진실로 인식하려 한다. 모든 예술이 “현실에 대한 부정성”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부정성”을 갖는 예술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이 본래 효용과 효율 따위는 염두하지 않으며 무용을 주저하지 않는데서 비롯됐다. 자율적인 예술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세계를 부정하며 세계 밖을 상상하는 예술은 진리의 계기가 될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즉, 예술은 “합리성에서 빠져나옴 없이 합리성을 비판하는 합리성이지 전(前)합리적이거나 비(非)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미메시스와 합리성을 결합하여 지배의 이성을 탄핵하고 교정하는 최후의 피난처가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다짐해야 할 것은 이는 예술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초에 문제는 예술이 노동으로부터 결별하면서 즉, 예술이었을 감성, 감정, 욕망 등인 내적 자연의 표출이 인간으로부터 부인되거나 제거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모든 시민은 다시 예술가가 되어야하고, 모든 예술가는 다시 시민이 되어야 한다. 모든 시민들이 예술가가 된 그때서야 내적 자연을 억압한 체계를 인지할 것이며, 시민 혹은 프롤레타리아는 보장되었던 새로운 진리를 파악하고 세계 밖의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스스로의 지위를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다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술가 역시 정치적 주체로, 실천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예술이 제3세계 문학, 민중 문학 등의 이름으로 스스로가 인간을 감히 대표해 세계를 상대했듯 예술가는 세계를 상대로 전체의 문제를 표상하고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현재 대부분의 문화산업 안의 예술가는 오직 스스로만을 대표할 뿐이다.- 그래서 현재, 단순히 문화의 향유의 확대가 아니라 시민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물음하고 예술이 전체 시민의 정치로서 사유되는 ‘문화권’이 재론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 논의는 문화가 다시는 산업과 결합하지 않을 때까지, 새 세계를 창립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충분히 많은 시가 쓰여졌고, 충분히 많은 노래가 불려졌고, 충분히 많은 이야기가 흘려졌다. 장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술은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혹은 생명의 유지에 하등 쓸모없는 예술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도 획일화되거나 소외된 당신에게 그런 세계와 함께 싸우고자 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또 앞으로도 많다는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기다랗고 지루한 글 끝에 비로소 건네고 싶은 말은 지금 예술이 때때로 쓸모없거나 침묵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기.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때로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그러니/그래도/그러므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참조
– 테어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2001
– 테어도르 아도르노, 홍승용 역, 「미학이론」, 문학과지성사, 1997
– 테어도르 아도르노, 홍승용 역,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 신혜경, 「벤야민&아도르노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김영사, 2009
– 카이 함머마이스터, 신혜경 역, 「독일 미학 전통」, 이학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