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희_교직 ; 벗을 수 없는 옷

014.12.19 발행

교직 ; 벗을 수 없는 옷

어떤 직업도 그 사람의 정체성과 취향을 말해주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유독 교사라는 직업은 근무시간 외에도 사표(師表)가 되는 삶을 살기를 강요받는다. 문제는 이 ‘사표가 되는 삶’의 기준이 보수주의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아무 문제가 없는 방향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교사가 왜 저래?’라는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서 교사들은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게 된다.
 
외모에서부터 교사는 구분된다. 교사들끼리는 옷차림만으로도 동업자임을 쉽게 알아본다는 통설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교사는 직업적 명목으로 옷차림과 언행, 여가활동 등까지도 은근히 특정한 스타일이 요구된다. 귀걸이와 머리 색깔, 반바지 등을 가지고 비교육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일일이 간섭한다는 교장의 오지랖을 종종 보고 들었다.

그런데 교사를 향한 이런 오지랖은 관리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2000년 9월, 미술교사 김인규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누드사진 때문에 검찰에 고발당하였다. 이 사진을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여겼다면, 이런 일 따위로 검찰조사까지 받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사적인 삶마저 교직이라는 정체성을 잣대로 재단했기에, 김씨의 누드는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렇게 교직은 종사자들이 일할 때뿐만 아니라 먹고 자고 입고 노는 모든 삶에서 직업적 사명감을 놓지 않기를 요구한다.

자기검열과 직업병

많은 교사들이 이러한 사회적 압력 때문에 높은 수준의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이는 ‘커밍아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이는 내가 자기소개 할 때, 활동명을 사용하고 소속학교를 밝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업적 정체를 적당히 숨겨야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평균편견1) 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데로 마음껏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옷을 입은 ‘나’와 이 옷을 입지 않은 ‘나’가 정면으로 충돌할 때이다. 올해 담임을 맡은 나는 학생들의 자율과 자치를 살려주는 학급운영을 시도하였었다. 이러한 학급운영에 대해 민원이 수차례 들어왔다. 이른바 “옆반에서 하듯,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생활지도”를 해달라며, “교사로서 있어야 할 권위가 전혀 없다.”라고. “교사로서의 자질이 없다.”라는 말까지 교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 교장은 내가 생활지도라는 의무를 방임하고 있다고 여겼다. 교내를 순시하며 종종 우리 반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학년부장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하였다. 학급운영을 다르게 해보려고 하는 나의 시도는 그렇게 맥없이 끝나게 되었다. 교사로서 정형화된 역할, 즉 ‘벗을 수 없는 옷’을 입으라는 명령에 굴복한 것이었다.

한편 나는 그때 대리인(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모임을 통해 청소년활동가들이 시전하는 꼰대 같은 주변 어른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듣기도 할 때였다. 어느 날 퀴어퍼레이드를 둘러싸고 주최측 성인활동가가 우리쪽 활동가를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반말로 하대하는 사건이 터졌다. 대리인에서는 이것을 단체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운동진영에서 사건화 시키고자 하였다. 이 일 이후로 나는 당분간 대리인모임에 나갈 수 없었다. 학교의 사건과 대리인에서의 사건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나를 멘붕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즉, 학부모에게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언행을 해야 한다는 자기검열과 학생인권에 옹호적인 언행을 해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두 개의 강박이 만들어낸 분열증적 고통에 몇 주간 시달렸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벗을 수 없는 옷’이 전혀 불편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야말로 교직이라는 단벌옷이 자아라는 피부에 들러붙어버린 교사들인데, 이런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병에 시달린다. ‘꼰대병’이라 명명될 이 직업병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묘사되곤 한다.

“그야말로 아무나 아무 때나 가르치려 든다. 학교 밖에서도 아이나 어른이나 상관없이. 심하면 시부모까지 가르치려 든다.” 본래 꼰대질은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보통인데, 직업적 습관인 꼰드롤2)이 자신의 수행적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명의식

 이러한 직업병을 양산해내는 ‘벗을 수 없는 옷’은 누가 발명해낸 것일까? 나는 그 유래를 교사들에게 흔히 요구되는 직업정신인 ‘소명의식’3)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명의식’은 16세기의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존 칼뱅(John Calvin)에 의해 선언된 개념이다. 그들은 세속적인 직업들도 성직자들처럼 영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직업을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신을 기쁘게 하고 인류의 복지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 ‘소명의식’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세속성에 대한 신성화는 궁극적으로 국가에 대한 신성화를 위함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부여받은 군주의 권력을 강조함으로써 절대주의 체제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세속 통치자가 교회 수장을 겸했으며, 성직자들은 국가에 봉사하는 공무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혜령, 《세계의 역사》)

그리고 학교는 이렇게 국가와 교회가 서로의 힘을 나눠가진 의도성이 극대화된 장소였다. 교직은 성직처럼 성스러운 구름이 주변을 뒤덮는다. 또한 이러한 성직을 수행하는 교사들이 신처럼 섬겨야 할 대상은 ‘국가’이다. 이반 일리히는 이를 과거의 도제식 스승과 비교해 이렇게 표현한다. “서비스 전문가들은 사람의 필요를 과거보다 잘 충족시키고, 게다가 공정하게 분배한다는 미명 아래 성스러운 박애자로 진화했다. (…) 스승보다 훨씬 막강한 권한을 부리는 학교 교사는 학생이 무언가 배울 게 생길 때마다 자신이 반드시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성직으로서의 교직관, 즉 ‘소명의식’을 가진 교사가 위험한 이유이다. 국가의 사제인 교사가 성실하고 헌신적일수록 시스템의 노예로서의 학생들을 양산하게 되는 모순이 여기서 발생한다.

나의 직업관

그렇다면 시스템 안에 있는 교사들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자 한다면 학교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밖이라고 길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이미 많은 수의 아이들이 포박되어 있다. 차라리, 나는 안과 밖의 경계에 서있는 ‘모피어스’같은 교사이고 싶다. 밖에 살고 있지만, 안으로 침투해 미래의 ‘네오’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들이미는 모피어스. 그런 교사가 되어,‘결과의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약자를 착취하는 이 매트릭스의 거대한 기만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필요하다면 네오를 매트릭스 외부로 탈학교시켜 동지들이 건설 중인 시온들(전환학교, 마을학교)이나 저항의 전진기지들(아수나로, 대리인)로 연결해줄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경계에 서있기에 혁명가들을 양산해내는 ‘침입로’이자, 게릴라들이 도망가는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벗을 수 없는 옷’을 이제 벗겠다는 나의 선포이다. 
물론 종종 위장을 위해 그 옷을 보호색처럼 두루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쨋든 이러한 시도는  ‘사표(師表)’가 되는 삶과는 별 관련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난 당신들이 원하는데로 살지 않겠다.


[각주]

1) 사람들이 특정 영역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는 인식(한윤형).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종종 다수이기 때문에 ‘평균평견’은    마치 진실인 양 착각되기도 한다.

2) 대리인의 청소년활동가들이 만들어 낸 신조어로 ‘꼰대’와 ‘control’의 합성어이다. 부모, 교사 등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청(소)년들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행하는 마인드 컨트롤을 일컫는 말이다. ‘꼰대질’이라는 용어가 그 행동 자체만을 지칭하는 단어라면, ‘꼰드롤’은 꼰대질을 하는 주체가 꼰대질을 당하는 수용자를 조종하고자 하는 의도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소명’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소명(召命) [명사] 1.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 2. 〈기독교〉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 ‘부름’으로 순화. (강조는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