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희_늙은 전교조, ‘참꼰대’라는 자화상을 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하나 -제1부 (1/2)-

2014.09.23 발행

1. 하류지향

  최근 여러 교육공동체에 연(緣)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류지향’이라는 책이 인기이다. 아마도 그건 1990년대 말쯤부터 시작되어 점점 더 가속화되어가는 ‘교실붕괴’라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나에게 참 속 시원한 제목이었다. 학교붕괴라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나 같은 교사들에게 우치다 타츠루는 어떤 위안을 던져주는 것일까? ‘하류지향’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보자.

우치다 타츠루에 의하면, 이 시대의 학생들은 탄생부터 철저하게 소비자주체로서 양육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철저하게 소비자로 위치 짓고 있는 학생들이 보기에 이 학교라는 곳은 학생들의 화폐지불에 걸맞는 상품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다. 즉 사려는 상품(수업)이 어디에 쓸 수 있는지 용도도 설명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구매(‘지루함을 참고 수업에 집중하라!’)만 강요하는 비합리적인 시장이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합리적인 강매에 응답하는 합리적인 구매자의 태도는 “그 상품은 그리 흥미롭지 않군요.” 하는 식으로 관심 없다는 의사표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없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의지가 교실붕괴 메커니즘의 주된 동인이다.

“호령을 붙이는 반장이 교사의 신호를 받고 느릿느릿 일어나서는 마지못해 하는 듯이 호령을 붙이면 반 학생들은 반장보다 더 늘어진 자세로, 인체공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만큼 늘어진 자세로 일어나 마지못해 인사하고는 다시 느릿느릿 자리에 앉는다. 이 정밀한 신체의 움직임은 볼 때마다 나를 감동시킨다. 자칫 잘못해 교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는 오해 따위는 사지 않도록 학생들은 완벽한 동작을 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 이것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나름의 의미를 품고 있는 신체동작이다. 그들은 ‘선생님이 앞으로 제공할 교육 서비스에 우리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라고 온몸으로 의사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 ‘자, 이제부터 값을 좀 깍아볼까’하며 흥정할 자세를 취하는 소비자의 모습과 똑같다.” [하류지향 60쪽]  우치다 타츠루는 학교교육에 등가교환의 원칙이 적용되는 순간, 교육은 ‘이미 죽어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장원리를 기초로 할 때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교실붕괴현상이 IMF이후 공공부문에 급격히 시장의 원리가 도입되던 시기와 맞물려있음을 주지하자.1) 그러나 우치다 타츠루는 이러한 ‘시장원리’가 학교에 불어닥침으로써 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련의 순기능을 간과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이 그가 매우 보수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만약 학생들을 교육소비자로, 다시 말해 소비주체로 인정해버리면 교육의 장에서 제공하는 배울거리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할 권리가 아이들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소비주체로서 ‘나는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상품만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하겠다’고 소리 높여 선언하면서 학교로 올 것이다”

여기서 순기능이란 바로 그가 위에서 서술했듯이, ‘배울거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물을 권리가 학생들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이 배울거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찾아온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푸코와 같은 사회학자들의 비유처럼 감옥이라는 공간과 유사하다. 공교육은 학생들을 특정한 지역, 특정한 생년월일, 특정한 성별 등을 기준으로 국가의 분류체계에 적합한 형태로 선별하여 배치한다. 학생들의 선택권은 사전에 배제되어 있으며, 각 교실에 동급생들과 함께 배치되어 번호로 구별되는 것이 학교라는 공간배치의 핵심이다.2)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과 같은 저작은 이와 같이 “근대 사회가 학교와 가정의 공모 하에 아동과 청소년을 감금함으로써 완성되었다”는 것을 계보학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상기해야할 사실은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은 ‘시장원리의 학교 도입’이라기보다 그에 선행하는 요건인 학생을 둘러싼 억압적인 ‘권력지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억압적인 권력지형은 ‘교실붕괴’라는 현상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교실붕괴현상은 공교육의 ‘교육 불가능’이라는 본질을 가리고 있었던 엄숙함(체벌 등의 강력한 생활지도와 윗사람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사회적 요구)이 ‘시장민주주의’에 의해 한꺼풀 벗겨지면서 드러난 증상에 불과하다.

이는 전사회적으로 국가의 힘을 압도하고 있는 시장의 힘을 보여준다. 국가의 본질은 막스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합법적 ‘폭력’을 통한 국민의 ‘통제’이다. 과거의 학교가 이러한 경찰권력으로서의 역할(‘규율을 학생의 몸과 마음에 주입하여 권력의 명령에 복종케 하라.’)만을 교사에게 요구했다면현재의 학교에는 ‘소비자로서의 학생을 존중하라’는 시장의 명령이 동시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혼선을 겪고 있는 것이다.

2. 학부모의 소비자 주체화

 “사람을 잡아먹은 적이 없는 아이들이 아직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자.” (루쉰, 광인일기)

먹고사니즘으로 단련되어 있는 학부모들의 소비자주체화는 한층 더 고도화되어있다. 가장 좋은 예가 학교에서 급속도로 증가한 민원문화이다. 아래는 한 학부모가 민원을 넣은 내용이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연수에서 만난 선생님 얘기인데, 2006년경 몇몇 학부모들이 그 선생님을 처벌해달라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1)생활한복을 입고 다닌다, 2)삭발을 하고, 남자면서 액세서리를 한다, 3)이순신 장군을 폄하한다, 4)국기에 대한 맹세를 부정적으로 본다. 처음엔 교육청에서도 별문제 아닌 것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얼마 후 <조선일보>에 ‘전교조 교사, 국기에 대한 맹세도 안해’, 뭐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가면서 일이 커졌고, 결국 그 선생님은 정직 3개월 중징계를 받았답니다. 이순신 장군을 무인으로만 보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 촌평을 하고, 국가주의 문제를 지적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한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녹색평론 138호 12쪽]

학부모들은 아이 담임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의 교육관과 일치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즉각적으로 교장에게 민원을 넣는다. 자신의 아이와 실제로 부대끼고 있는 담임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관리자나 교육청의 윗선에 민원전화를 걸어서 단번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레스토랑이나 가게에서 불만에 찬 소비자가 “여기 책임자 불러와”라고 외치는 것과 유사하다. 서비스노동자에게 그 사람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에 대하여 직접 불만을 토로하는 일은 심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상품에 대한 클레임이 인간 사이의 불편한 감정싸움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객의 불만을 ‘상품에 대한 하자’로 대접해 줄 수 있는 관리자에게 직접적으로 클레임을 걸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민원을 거는 학부모들에게 교육이란 이래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게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너무나 확신에 차있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에게 교육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이란 자신의 아이들이 좋은 직장을 가지게끔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 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을 좋은 ‘인적자원’(이라 쓰고 ‘상품’이라 읽는다)이 되게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서 학교는 자신의 자녀가 몇 등위를 차지하는지 상품적 가치를 가측정-비교하는 장이지, 선생이 학생들을 위해 완결된 세계관을 가르치고 인격을 함양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교과서적인 정답과 조금이라도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교육은 토론을 통한 배움의 장으로 이해되지 않고 ‘민원’의 타겟이 된다.

학생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진보적인 교사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이다. 학교에서 간수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부모와 동료교사, 관리자들의 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생활지도를 방임하며 교사로서의 권위가 부족하다.’) 반면 간수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은, 이미 소비자권력의 단맛을 알아버린 학생들과 정면대결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존재론적 모순 속에서 오늘의 참교사들은 이계삼처럼 교문 밖을 차고나가는 길을 택하지 않는 이상 정신분열증적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3. 우치다 타츠루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내가 ‘하류지향’에서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그가 교육불가능에 대한 해결법으로 제시하는 것들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학생들이 감히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거죠?, 이 지식은 어디에 쓰이나요?”라고 물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거만하고 무식한” 질문들은 “30센티미터 자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측량하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배움의 가치란 ‘인생경험이 짧은 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오묘한 어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역사의 진보는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들에 감히 질문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물며 배움의 출발점에서의 질문이라면, 오히려 장려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왜 이런 질문이 교실에 서있는 우치다 타츠루와 우리들에게 당혹스럽기만 한 걸까? 그것은 특정한 무엇을 배우고 싶어서 스스로 스승을 찾아갔던 과거의 도제식 교육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국가가 ‘의무교육’3)이란 명목으로 강제로 차출하여 의자에 앉혀놓은 아이들에게 무슨 말로 ‘강제소환’의 사유를 설명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교과서나 교육과정에는 교사의 삶과 사상이 조금이라도 녹아있던가?

그러나 아무리 교사의 상황이 녹녹치 않다고 해서, 질문을 하는 학생 탓을 하면 되겠는가? 우치다 타츠루는 한발 더 나아가서,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뻔뻔한 ‘신인류’에 대해 혀를 내두른다. 그가 ‘신인류’라고까지 이러한 현상을 표현하는 것은 학생들의 이와 같은 행동에서 나타난 뚜렷한 가치지향 때문이다.

“비교적 출신 계층이 낮은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성공을 부정하고,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자신감을 높이고 자기를 긍정하는 기술을 익힌다. 낮은 계층의 학생들은 학교의 성과주의 가치관에서 이탈함으로써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 (…) 이 문제는 교육기술이나 방법을 바꾸는 식의 기술적 차원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류지향 120쪽]

위 문장을 정반대의 문제의식을 가진 아래 글을 비교해 읽어보면 이러한 말투가 얼마나 조선일보스러운지 알 수 있다.

“학교교육은 삶과 분리되어 있다. 우선 공간적으로 교실은 삶의 현장과 떨어져 있다.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학생들이 몸담고 있는 현재적 삶을 희생하여 미래적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 교육이다. 그래서 학교교육은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것이다. 어느 인간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신이 나고 열정이 생기겠는가? 삶과 분리된 교육은 열정도, 활기도, 동기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인위적인 동기를 부여해야 하고, 상벌제도와 경쟁심이 동원되는 것이다. 학교가 지루하고 억압적인 것은 누군가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작동할 수밖에 없는 학교 자체의 내적 구조, 내적 원리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를 개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녹색평론 138호 64쪽]

우치다 타츠루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깨달음을 미래로 유예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스승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배움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스승의 말이 현재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적으로 따르면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치다의 스승인 히라카와 선생은 우치다가 질문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사견을 말하지 않고 항상 “나는 스승님한테서 이렇게 들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의심하지 않는 수동적인 배움의 방식이 세월호의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라는 방식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이제 우치다 타츠루가 우리에게 주었던 심리적인 해방감의 정체가 분명해진 것 같다. 그는 우리의 절망적인 ‘교육불가능’에 대하여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해줬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왔던 전통적인 방법에 해답이 있었다.’라고. 그렇게 ‘학생이 소비자주체가 되었다’는 그의 날카로운 현실분석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미화된 과거로 회귀하며 종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회귀는 공교육시스템이 착취하고 있는 권력구도를 간과하거나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교실붕괴가 오히려 노동자 양성기관으로서의 완벽한 성공의 증례라는 엄기호의 말을 들어보자.

“컨베이어벨트의 육체노동자들 양산하기 위해서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해 50분 수업의 그 지루함을 찾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속사회 200쪽]

요컨대 지루함이야말로 공교육의 본질이다. 실제로 ‘교실붕괴’의 어수선한 교실에서 교사들이(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자. “조용히 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고개 들어” ,“똑바로 앉아”  학교는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아무 반항 없이 얌전히 순종하는 ‘노예’가 필요하다. 그런 노예야말로 코퍼라토크라시(corporatocracy)사회4) 에서 기업이 학교에 원하는 인재(resource)이다.

3.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치다 타츠루의 해법도 틀렸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나는 ‘교실붕괴’의 상황을 역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실붕괴는 체벌이나 상벌점제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방법이 임시변통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적 양심에 무던해질 수 없는 교사들은 결국 분열증이나 우울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세월호 사건, ‘안녕들하십니까’, 전교조 탄압의 상황은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직선상에 놓인 정치적 사건들이다. 전교조 교사들은 정치를 말로만 가르치려 하지 말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어젖혀야 한다. ‘전교조’를 분쇄하고자 하는 정부의 집중포화전략에 전교조만의 힘으로 맞서 싸우고자 하면 고립되어 각개격파당하기 쉽다. 또한 한줌밖에 안 되는 진보 교사들만으로는 학교 현장을 바꿀 힘이 요원하다. 따라서 함께 교육개혁을 이루어나갈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 시민들 내부의 제3신분, 비시민, 서발턴(subaltern)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청소년’이라는 섹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모든 진보적인 공동체들이 사활을 걸고 이 섹터의 정치권 획득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점점 더 우경화 5) 되는 공교육에 아무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  3권 분립과 같이 학교운영에 관한한, 학생들은 최소한 교사나 학부모와 동등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교사(학부모)와의 반목으로 에너지가 헛되게 소비되는 아이들의 야성이 제대로 된 싸움에 쓰일 수 있어야 한다. 학운위에 학생대표를 참석시키고, 학교를 협동조합 식으로 운영한다든지, 게시판 자율의원회 등을 개설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계속 늘려가야 한다.

두 번째로, 학생들이 소비자주체가 아닌 생산자주체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이 소비자 마인드로 정치권을 받아들인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한 해법을 “대량생산(mass production)기술이 아닌 대중에 의한 생산(production by the masses)”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적정기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공교육이 대량생산 방식으로 학생들을 찍어냈다면, 우리는 ‘학생대중에 의하여 생산되는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사실 시장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소비자주체가 되어가는 현상은 공교육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비단 학생들뿐만 아니라 현대인들 대부분이 ‘소비자’로서의 주체성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여가나 운동, 오락, 의식주 심지어 예술의 영역마저도 모두 소비를 통해 해결한다. 도시인들이 다시 ‘생산자’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적정기술’ 안에 숨겨져 있다. 분량이 너무 길어져 이러한 내용은 다음 연재에서 이어보겠다.


1) 종종 교육청의 공문과 연수자료는 학부모와 학생을 교육수요자교사와 학교당국을 교육공급자라고 호명한다궁극적으로 교사는 교육서비스 매우만족을 달성해야 하는 감정노동 종사자인 것이다이런 면에서 교원평가는 한국사회의 서비스 매우만족에 대한 강박이 사회의 전분야특히 공공부문으로 몰아닥친 현상의 일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서비스 매우만족을 간곡히 부탁하는 a/s기사 아저씨들의 모습과 교원평가를 앞두고 아이들에게 과자파티를 해주고 과제를 제하여 주는 선생의 모습은 묘하게 닮아 있다교육당국은 교원평가를 성과급과 연계하는 등 저급한 전략들을 통해 공교육의 시장화를 지속적으로 진행시켜나가고 있다.

2) 우치다 타츠루는 자신의 합기도 선생을 훌륭한 스승으로서 묘사하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배움의 과정을 바람직한 교사의 롤모델처럼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합기도를 배우기 위해 ‘먼저’ 그 곳에 찾아갔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공교육 현장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3) 우치다 타츠루는 ‘의무교육’이란 것을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의무교육’은 학부모에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강제하는 의무인데, 학생들은 이것을 자신들이 억지로 학교에 가야한다는 의무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란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원할 때 선택 할 수 있는 게 권리 아니던가? 결석도 지각도 조퇴도 타인에게 허락 맡아야 가능한 것이 과연 학생들에게 권리로 생각될 것인가? 의무로 생각될 것인가?

4) Corporatocracy는 ‘기업지배체계’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Democracy가 민중의 역량, 민중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구성체를 뜻한다면, Corporatocracy사회는 대기업과 다국적기업의 이윤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다른 모든 게 희생되어도 좋은 사회이다. Corporatocracy사회는 시장민주주의와 짝을 이루어 작동한다. 인민들은 소비자가 되면 누구나 왕으로 행세할 수 있다는 ‘시장민주주의’의 평등에 대한 약속 때문에 corporatocracy사회에 아무 불만 없이 순응한다. 감정노동을 하는 다른 인민들의 피 맛을 봄으로써 느끼는 달콤함은 계층상승의 사다리에 자신이 깔려 있음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다.

5) 여기서의 우경화는 단순히 의회정치의 선호정당에 따라 구분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경쟁체제의 무자비한 질서를 몸과 마음에 내면화한 심층적 우경화[먹고사니즘]를 뜻하는 것이다오늘날 교단에 서있는 모든 선생들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를 읽어야 한다교실붕괴 속에서도 꿋꿋이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어떤 괴물들이 되어있는지 볼 수 있다. 20대들이 약자의 고통에 둔감한 괴물들이 되어버린 것이 오롯이 교사의 책임은 아니지만우리가 교단 위에서 행한 교육이란 것의 결과물이 무엇인지 직시를 해야 한다그래야 멈출 수 있다그리고 멈춰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