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지_방언들을 읊조리기 시작하며 ? ‘비평 퀴어화하기’

2016년 11월 2일 발행

기획연재 [방언들] 첫 번째
방언들을 읊조리기 시작하며 ? ‘비평 퀴어화하기’

이따금 주변인들이 ‘왜 하느냐’고 물을 때면 ‘살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다시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반문이 옵니다. 그러면 ‘사랑’이라고 답합니다. 삶을 구성하는 행위의 이유를 ‘살기 위해서’라고 수식하면 다소 어색한 비장함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랑을 위해서’라고 덧붙이면 괜한 낭만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영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일단은 존재하는 이 순간이 그 모든 이유를 대신합니다. 다만, 조금 더 가까이 살펴볼 일이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의 차원에서 삶의 컨텍스트를 결정할 때 ‘살기 위해서’는 훨씬 품이 드는 스펙트럼을 갖게 됩니다.

하물며 예술행위에 대해서는 또 어떻겠습니까. 넘쳐나는 작품, 넘쳐나는 작가, 넘쳐나는 이론과 넘쳐나는 규범, 이 모든 과잉 속에서 분명하게 쇠멸해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 쇠멸의 대상이 나와 당신이 그토록 염원하는 ‘모종의 가치’일 경우에는 안타까움이 더 앞서게 됩니다. 어떠한 탈출 전략도 성공한 적 없이 매번 내성을 키워가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안에서 때때로 현대미술은 수치심에 붉힌 얼굴조차 화장합니다. 아니 홍조를 띠게 하는 혈기조차 찾아보기 무색해졌습니다. 다수의 현대미술은 불화보다는 동화를 일삼고,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시스템의 유지에 이바지 함으로써 복무합니다. 가끔씩 등장하는 적당한 저항들 역시 체제의 문화전략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포섭되곤 합니다. 너무 비관적입니까?

사실 비관과 허무에 따른 체념은 고립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분명히 지양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몰락의 현장을 다시 직시하자는 차원에서 앞선 비관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비평의 영역 또한 권위 헤게모니가 꾸려놓은 공통어로 만연해 있습니다. 틈을 벌리기보다, 틀 안에서 힘의 재배치만 반복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방언들>은 표준화, 규범화, 제도화된 언어를 지양하고 저마다의 방언을 구축하고 있는 작가와 그들의 작업을 주체화, 퀴어화, 관계화의 맥락으로 들여다볼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쇠멸의 풍경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최전선의 말들이기도 합니다. 어떤 방언이 모두의 기표가 될 수는 없을 테지만 방언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방언을 모색할 힘이, 다시 말해 ‘살기 위해서’를 수식할 형용사가 보태질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