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휘_『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서평: 실패의 지평

* 이 글은 문혜진,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 동시대 미술의 기원을 찾아서』, (현실문화, 2015)의 서평입니다.

나는 초딩이었지만 90년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90년대의 숫자들과 매우 친숙하다. 책에서 다루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막상 따져보면 20여 년이나 된 일들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90년대에 등장한 신진 작가들은 현재 세계적인 작가나 대학 교수 등이 되어 있다(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신의 작업이 같이 언급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오늘날로부터 이 과거가 갖는 한 세대에 가까운 시간적 거리는 이러한 책을 기다려 볼만한 기대감을 준다.

이 책은 80년대 말 ~ 90년대 초, 이 10여 년 동안 미술계에서 있었던 쟁점을 매우 성실히, 꼼꼼히 추적한다. 그 논쟁거리의 핵심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다. 당시 미술계는 모더니즘 계열과 민중미술 계열로 양분된 상태였다. 이들은 80년대 말 이후 불어닥친 한국 사회의 변화로부터 생겨난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각자 자기 편한 방법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입한다. 한편 이 두 세력과는 별개로 서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직접 경험하고 모국의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애쓴 이들도 등장한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신세대 미술”이 등장해 기존 대립 구도에 대해 강한 피로감과 반발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다루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지금 한국 미술의 기성세대(?)로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읽어보면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모더니즘 진영이나 현실주의 진영이나, 심지어 신세대 미술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반복적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표는 누가 가짜 포스트모더니즘이고, 누가 진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가까웠는가 따지고 밝혀내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역사 발전 모델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학교에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모더니즘, 우리 안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찾는 시도를 하는 것, 나아가 오늘날의 한국 미술이 서구 사회에서 인정받은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이러한 소식을 ‘쾌거’로 알리는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이와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의 미술사에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되고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부제도 “동시대 미술의 기원을 찾아서”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동시대 미술의 기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것을 ‘번역’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수용되면서 발생하는 마찰과 빈틈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생적으로 발생한 고유의 미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이후 “자체적인 형질 전환”를 통해 동시대 서구 미술계와의 시차를 상당히 좁혔다는 저자의 평가에 공감한다면, 또한 오늘날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 환경을 고려한다면 순수히 자생적인 미술의 형태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나도 저자를 따라서, 오역이 ‘틀린 것’은 될 수 있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평가처럼 그런 논쟁을 통해 우리의 문화가 더 풍요로워졌다는 점을 넘어, 나는 그것이 우리가 가정한 것이나 상상한 것을 초월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오역을 포함해) 실패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들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득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계급적 “모순”이라 지적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모순을 낳고 실패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미술사 포함) 역사가 전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 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위해 우리의 앞에 계속해서 실패의 여지, 오역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중요한 화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런 면에서 서구 미술계와의 시차를 맹목적으로 좁히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따져보면, 이제껏 많은 예술가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실패”를 통해 현실의 조건들을 드러내는 방식의 작업을 많이 해왔다. 그리고 그것의 이면에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들이 존재해왔다. 이제 우리는 현실을 초월하는 다른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예술가의 등장도 기대를 해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는 결국 ‘실패’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