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휘_내가 할 수 있는 일

2015.01.27 발행

작년 12월 27일 희망버스를 탔던 홍태림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누군가의 삶 그 자체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난 스펙터클 앞에서, 이미지의 생산자 역할을 자처했던 예술가라는 자존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예술을 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삶과 예술의 거리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때때로 예술가라는 자의식에 대해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회의감에 부딪치게 만든다.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삶을 걸고서 굴뚝 위에 올라가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술가라 불리는 (혹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부르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예술을 위해 삶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위해 예술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매우 어려운 질문에 대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궁극적으로는 이 두가지의 선택지 외에 다른 선택지는 과연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도달했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예술이라는 행위를 ‘예술’이라고 부르기로 시작했고, 순간부터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행위로부터 떨어져 나와 예술이라는 무언가가 되었다. 무엇인가를 개념화하고 명명하는 것은 그것과 구별되는 다른 것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예술이 예술인 이유는 예술이 아닌 다른 것과 구별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언젠가에는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짓거나하는 행위들은 모두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농사를 짓는 일이나 집을 짓는 일은 모두의 일상은 아니다. 이제 농사는 농부만의 일상이고, 집 짓는 것은 목수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일상은 바로 예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가 복잡해지는 만큼 일상적인 삶은 더이상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특정한 일상의 가지수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더 파편화되기도 한다. 특수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짐으로써 우리 사회는 생산의 측면에서 효율적이 되었지만, 그것이 일반적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가 될수록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무엇까지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도맡아하는 일이 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예술도 일상적일수록 가치가 있는 행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단, 여기서의 ‘예술’은 우리가 ‘예술가’의 일상이라고 말하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이 일상으로서의 ‘예술’은 단순히 이미지의 생산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생산으로서 예술이야말로 예술가가 아닌 대다수에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예술가처럼 특정 사람들이 일반적일수록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경우를 들자면, 군인이 있겠고, 의사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특별한 일상이 사라지는 것을 목표로 그 특별한 일상을 살아간다. 군인은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궁극적인 평화의 상황에는 군인이 필요가 없게 된다. 의사도 환자들이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사회를 추구하겠지만, 환자가 없어진다면 의사도 없어지게 된다. 현실적으로 이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들로 보일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시대에는 그게 힘들 것 같아 보이긴 한다. 일상으로서, 일반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향유되는 예술이란 것은 어떤 물리적인 실체를 지닌 오브제이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경험하고자하는 주체적인 의지와 태도에 더욱 밀접할 것이다.

예술이 삶을 더 잘 느끼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는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이기 이전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일 것이고, 어떤 논리나 맥락으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인 반응일 것이다. 특히 미술은 다른 매체에 비해 언어나 인력, 자본 등으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흙바닥과 손가락만 있어도 우리는 드로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굴뚝 위의 사람들을 보며 무기력함에 휩싸인다. 예술가로서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예술이 일상을 초월하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하고 있는 것이 앞서 언급한 일상적인 행위이기 때문 또한 아닐 것이다. 예술은 굴뚝 위의 사람들이나, 굴뚝 아래의 사람들이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이 정치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어떤 정당에 가입하거나 아니면 더 심한 경우로 동시대의 사회문제에 대해서만 글을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식인들도 다른 어떤 시민이나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지요.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주어진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관한 선언이 있다면 제 서명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공통된 대의에 참여하기 위해 제 명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인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만 진실로 유용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당신이 극장에 있는데 불이 났다면 시인은 의자 위로 올라가서 시를 암송하면 안 됩니다. 지식인의 기능은 미리 어떤 일을 얘기해주는 것입니다. 즉, 극장이 오래되고 낡았다면 그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지요. 시인의 말은 예언적인 호소문의 기능을 갖습니다. 지식인의 기능은 ‘우리가 이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 일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 당면한 일을 하는 것은 정치가의 일이지요. 토머스 모어가 상상한 유토피아가 혹시 현실화된다면 그 나라는 스탈린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답니다.” 

‘예술가’가 하는(혹은, 적어도 예술이라고 아는) ‘예술’로써 굴뚝 위의 사람들의 삶을 구원하긴 정말 힘들 것 같다. 굶주린 사람의 배를 체우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음식이다.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음식과 힘은 ‘예술’이 될 수 있다. 사실 굴뚝 위의 사람들의 삶은 어느 ‘예술’보다 이미 충분히 예술적이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 일상적으로 하게 될 ‘예술’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예술가가 할 일이다. 누구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곧 예술가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의 예술가”인 것이다.

내 경험상 예술이 삶을 더 ‘잘 살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들었던 많은 경우가 그것이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은 아니었다. 모두의 것으로서 예술은 우리의 경험과 판단의 흔적이었다. 어린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나, 방금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들이 쓴 시에서도 우리는 예술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술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술이라는 특정한 일상에 몸담고 있는 이미지 생산자, 예술가들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누구나의 일상과 같이 예술가의 일상도 시장에서 교환될 수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야만 했다. 상품으로서의 예술이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얼마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을 가지고 얼마 만큼의 쌀과 고기를 살 수 있는지, 얼마나 안락한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는지를 저울질해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굴뚝 위의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예술이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굴뚝 위로 올라가는 이들보다 과연 예술적일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둥의 구조와 형태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로서, 일상적인 행위로서, 삶을 대하는 태도로서 그것의 참다운 가치가 증명될 것임을 믿는다. 예술로서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술을 새롭게 정의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정의 안에서 예술은 일상이라는 이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