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휘_내츄럴 본 뉴츄럴(Natural-born-neutral) 공간으로서의 아스팔트 위

2014.07.16 발행

얼마전 인터넷엔 한 주차장에서 싼타페가 벤틀리를 박은 사진이 올라왔다. 주차되어 있는 벤틀리를 뒤에서 박은 것 같은데 차가 화단까지 밀려올라가 있었다. 이 사고로 벤틀리 차주는 수리비 1억5천과 렌트비를 달라고 했는지, 이 차를 갖고 새차를 달라고 했는지 그랬는데, 여기에 단순히 ‘김여사’의 잘못이다 vs 벤틀리도 책임이 있다 정도가 아니라, 보험제도, 면허시험 등등에 대한 꽤나 깊이 있고 입체적인 반응이 나와서 필자의 흥미를 자극했다.

(모든 댓글들을 모을 수가 없어서 가장 댓글이 많이 달렸던 곳을 링크한다: 뽐뿌.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hotissue&no=2734, 슬로뉴스. slownews.kr/27823)

그 와중엔 난독증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토록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신분과 계층에 관한 꽤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땅 위의 신분제는 갑오개혁 이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 곳곳에선 아직도 신분제가 발견된다. “상류층과 결혼! 내가 가능한가?”라는 카피를 내거는 결혼정보회사가 있기도 하고(근데 ?상류층도 그런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할까?), 대학의 서열을 나누는 것이나, 물에 빠진 아이들을 꺼내는 것보다 의전이 중요하다는 사실 등의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식’들을 돌이켜보면 아직 신분제는 분명히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값지다는 ‘민주화’를 조롱하는 무리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김여사’가 주차된 벤틀리를 들이 받은 사건은,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떠나, 상류층과 중산층의 물리적인 충돌로서, 기존의 계층 간 갈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부딪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국민이 대통령을 불러내면 경찰이 대신 나오고, 노동자가 사장을 불러내면 용역이 나오는, 즉 상류층 측에선 대리인을 전면으로 내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계층 갈등의 양상이었다. 하지만 김여사가 벤틀리를 박기 위해선, 티코를 먼저 박고 올 필요도 없었고, 국산차를 먼저 박고 올 필요도 없었다. 그 차가 벤틀리가 아니라 마이바흐였어도 김여사는 기어이 박았을 것이다. 아스팔트가 덮힌 그 길 위는 계층에 상관없는 누군가의 것이 아니고 누구나가 공유하고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스팔트로 된 도로(이하 ‘도로’)는 거의 모든 계층이 공유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물리적인 공간이다. 벤틀리든 싼타페든, 카레이서든 김여사든, 이건희든 리어카에 폐지를 줍는 노인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같이 아스팔트 위라는 공간을 공유한다(혹시 모르니 이건희랑 우리는 마시는 공기의 질까지 다르다는 것을 밝혀둔다). 갑오개혁 덕분인진 모르지만 아직까진 부자 전용 도로나 거지 전용 도로가 없는 까닭에 김여사는 가만히 있는 벤틀리에 갖다 박을 수 있었다. 이건희의 마이바흐를 리어카로 직접 박을 수 있는 곳 역시 전국 곳곳을 연결하고 잇는 아스팔트 위가 유일할 것이다. 물론 가끔씩 초 상류층들이 나타나면 그들의 대리인들은 도로를 통제하기도 하지만 그건 매우 특수한 경우이다. 그런 행사가 끝나는 즉시 벤틀리든 김여사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도로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도로는 본래의 모습인 누구나의 것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이 도로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와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는 대통령이나 부랑자가 마시는 콜라는 모두 같은 콜라라고 지적한 바 있다.

도로는 초 상류층이 지나가기 위해 통제될 수도 있고, 촛불집회를 나온 시민들에 의해 장악될 수도 있다. 이러한 기능들은 도로가 가진 중립성이라는 특성에 의해 획득된다. 그리고 그 중립성은 매우 탄력적이어서 그곳이 어떤 정치 세력-초 상류층이든 촛불을 든 시민이든-의 권력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점유가 끝나면, 곧바로 그 정치성을 휘발시키고 본래의 중립적인 태도로 돌아온다. 그것은 그 도로에 모이는 사람들이 일종의 결사체로서 모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니 우리 모두는 도로를 잠시 공유하지만 곧 각자에게 어울리는 장소로 흩어지게 된다. 이런 특성을 지닌 공간으로서 도로는 ‘저항의 공간’이 될 수도 있고, ‘화해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도로의 ‘저항의 공간’으로서의 측면은, 지난 4월 장애인 이동권 쟁취 투쟁에서 그들이 보여준 의미심장한 방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휠체어를 타고 나와 버스 티켓을 사고 대합실에서 대기를 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대합실에 모여 있자 이를 불편해한 공권력은 이들을 해산시키려 했었다. 사지가 멀쩡한 이들이 티켓을 사서 대합실에 모여 있는 것이 집시법 위반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들의 투쟁방식은 매우 적절했다.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그들의 이동권은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예를 드는 것은 그들이 터미널을 정치적 투쟁의 거점으로 이용한 방식이 도로가 어떻게 정치적인 공간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터미널은 본래 매우 중립적인 공간이다(면세점이 있는 공항이라는 터미널은 대놓고 더 중립적이다).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은 도로에 모이는 사람들만큼이나 저마다의 다른 목적을 갖고 있을 뿐이고 그것을 위해 같은 공간을 잠시 공유할 뿐이다. 철도노조 간부가 숨어있다고 알려졌던 ‘요새’는 정문부터 털리고 와해되었고, 전교조는 가상공간-서버-까지 털리고 있다. ‘결사’가 있는 ‘공간’은 이제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거나, 정치적 투쟁을 위한 거점으로 기능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많다. 감시체제는 점점 더 타이트해져가고 있고, 그들의 타겟이 되면 정체성을 강하게 띄는 장소가 가장 먼저 털려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지난 4월은 터미널이나 도로 같은 ‘결사’가 없는 ‘공간’의 정치적 거점으로서 변주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이다.

반면에 ‘결사’가 없는 ‘공간’은 오히려 모두 같은 콜라를 마시며 미국 사회가 대동단결 된 것이나, 먹고사니즘 안에서 한국 사회가 대동단결한 것처럼 다시 한 번 전국적인 화합과 융합의 장이 될 희망 또한 잠재하고 있다. 당장 월드컵 거리응원이 떠오르긴 하는데,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도로 위에선 당신이 누구든 어떤 차를 타든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춰야 하고 녹색 불이 켜지면 가야 한다. 게다가 마이바흐를 타고 가다가 티코한테 추월당할 수도 있는 것이고, 페라리가 초보자가 모는 모닝을 배려해 운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바로 옆 차선에 바짝 붙어 있는 커다란 화물차가 제발 내 m3랑 멀어지길 신께 간절히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벤틀리를 타고 가다가 도로에서 뻥튀기나 아이스커피, 심지어 콧털제거기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도로가 지닌 중립성과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모색해 보았다. 여기서의 중립의 의미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명준이가 애타게 찾던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중립국”에서의 그 소극적인 중립이 아니라,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중립을 가리킨다. 또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비무장지대의 긴장감이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의 공간으로서의 생산력이 잠재된 긴장감을 가리킨다.

그것이 도로라는 것을 배제한 채, 앞서 언급한 얘기들만 보면 그곳은 매우 특수하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 도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도로를 설명했던 수사들이 그곳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하더라도 그곳은 극히 현실적이고 매우 일반적인 장소이다. 코카콜라 사장이 그러하듯이, 도로도 당신이 누구든 차별하지 않는다. 면허증과 차가 있든, 돈(차비)이 있든 깡이 있든.. 몇 가지 조건만 있다면 대통령이든 리즈 테일러든 부랑자든 유병언이든 누구든지 도로 위로 올라올 수 있다. 그렇다고 또 마냥 일상적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다. 왜냐하면 다른 일상적인 공간들과는 명백히 차별되는 성격이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해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들을 일찍이 감지하고 소통의 장으로 써먹던 자들이 있었으니, 우린 그들을 ‘스트릿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삶을 더 잘 느끼기 위한 기획을 예술 행위라 말할 수 있다면, 삶의 대부분은 도로 위에서 보내는 우리들 스스로가 ‘스트릿 아티스트’가 되어 한 번쯤은 도로를 목적지에 닿기 위한 수단이 아닌 우리의 목적지 그 자체로 받아들여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주체적이고 전복적인 시선으로써 도로 위에서의 삶을 발견하고 그것의 가치를 관찰-창조할 수 있다면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그 곳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