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휘_무기력함들을 위한 변명

2014.04.29 발행

무기력함들을 위한 변명-을 위한 상상

1. 작년 봄

작년 봄 필자는 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학교로 찾아갔다. 그날 그 선생님은 필자를 만나기 전 오전 동안 학생들을 상대로 어떤 심사를 하시고 온 상태였다. 필자를 만나자 마자 심사를 하며 느꼈던 아쉬웠던 두 가지의 경우 정도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작품 그 자체의 논리가 너무 빈약한 경우였고, 또 하나는 반대로 문자 그대로 너무 ‘논리적’인 작품인 경우였다. 전자의 경우엔 1)작업하며 부딪히는 모순적인 지점들을 습관적인 방법·태도로 수습함으로써 그 문제를 우회해 2)그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찝찝한 상태로 남아 3)’쾌’한 감정을 유발하지 못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때 크리틱을 하게 되면 ‘그냥’이라는 대답만 나오고 어떤 생산적인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 기분만 상할 수도 있다. 한편, 후자는 전자의 대척점에 위치한 경우인데 그러한 논리적인 모순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정말 ‘말이 되는’ 작업을 가리킨다. 후자의 경우엔 크리틱을 하며 나오는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너무 방어적이고 소극적이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굳이 미술작품으로 만들어져야만 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전자는 비교적 저학년, 후자는 비교적 고학년에서 발견되는 경향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러한 경향은 크리틱을 받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크리틱을 받아내는 요령으로서 발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복학을 2년 앞둔 지난 봄, 왠지 모를 초조함이 엄습해 똥줄을 태웠었다.

2. 지난겨울

지난겨울 필자는 한 지인으로부터 전시에 관한 글을 부탁 받았다. 익숙한 주제나 방식의 글쓰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글쓰기에 앞서 도움을 받으려 모 아카이브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기존의 전시 관련 글 몇 개를 읽어보았다. 설득력이 있든 없든, 좋든 나쁘든, 그들 대부분이 그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과 그것을 만든 작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그로부터 확장해나가 다른 이야기ㅡ의의, 기대, 전망 등ㅡ을 도출해내는 방식의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글들은 마치 작품들이 보여주는 어느 특정 지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갔던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게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글과 작품이 조응하여 우리의 문화를 비평하는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가치 있는 일이다.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모든 것들은 한권의 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작업이 좋은 장소에 걸릴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주인을 찾아갈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그러니 좋은 글로라도 기억되고 싶은 것일까. 작업들은 ‘친절’해진다. 필자는 종종 전시장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매력적이지 못한 작업들을 보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떡밥을 친절하게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태도로 작업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경험한 현실의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보다 유명한 철학가나 외국 작가들의 작업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번역하는 가로 관심을 갖게 되기가 쉬워 보인다(이거야말로 작가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그래야만 그런 작업에 대한 글에 그 유명한 철학가나 작가가 다시 인용되기 쉬워지고, 그로써 그 작업의 ‘격’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는 같은 말을 문법이나 언어만 다르게 동어반복 해주길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영향을 받은 것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솔직한 언급은 자제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작업이 어떤 작업인지에 대해선 본인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 작업에 대한 소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그것을 자신만의 경험이나 직관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위장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작품들은 글이 없이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은 의외로 금방 밝혀진다.

그나마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피하는 필자의 취향 탓일지도 모르지만) 학교 밖의 전시 공간이나 글에선 기성의 논리나 권위에 의존한 재미없는 작업이나 뻔한 글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불행한 것이 있다면, 그 희망적인 작품들의 뒤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작가들과 작업들이 도태되었을까 하는 지점이다(모든 미대생들이 전업 작가로 진로를 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작품 스스로의 논리와 미학이 없어 누군가의 말을 빌려 그것의 가치를 주장해야만 했던, 얼마나 많은 작업과 작가가 도태되었을까? 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남의 생각이나 경험들로 눈을 돌려야만 했을까? 전시 공간이 부족한 것일까? 그걸 봐 줄 사람이 부족한 것일까? 전시장에 들어가지 못한 작업들은 작가 스스로 능력상의 한계 때문에 어설픈 것이 되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창고 속에 방치되거나 버려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가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설프게라도 남의 목소리를 내게 만드는 환경적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과연 스스로의 재능을 버리고 남의 것을 쫓다가 이도저도 아닌 ‘무능한’ 작가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과연 그런 불행한 인력 낭비로부터 그(우리)들을 구할 수 있을까? 한국의 미술에 대한 여러 얘기들이 오가는 요즘, 거기에 관심이 많은 한 학생으로서 필자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며 왠지 모를 긴장감과 초조함에 똥줄을 태웠었다.

3. 가정

필자는 외부환경에 의해 스스로가 경험한 것들로부터 순수한 작업을 해내는 것이 방해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작가들이 도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크리틱에서 까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나 좋은 글이 써져야 한다는 부담감·초조함이 그런 재능이 발휘될 여유를 빼앗진 않나 보는 것이다(물론 모든 미대생들이 뛰어난 감수성을 갖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 박영택 교수는 “꽃이 있기에 꽃을 그린다는 뉘앙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려야 한다는 화가로서의 당위성이다. 이 당위성 앞에서 그 대상이 하필 꽃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꽃이 아니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만약 당신의 영혼에 자유로울 여지가 있다면 이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한 작품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당신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와 방종의 격은 다소 다르다. 작품이 사회적인 기능을 하길 원하는 작가라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족시키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작품의 사회성은 모르겠지만 미학적인 뭔가를 성취하길 원한다면 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의 눈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 ‘자유’로운 작가는 어쨌든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한다. 사실 작가 스스로가 가장 예리한 눈으로 자신의 작업을 봐야 한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작품 스스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외적인 것들과의 맥락을 만드는 접촉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책임을 달리(매우 긍정적이고 가볍게) 바꿔 말한다면, 누군가는 그 작품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된다. 앞의 얘기에 따르면, 방종에 의한 작업이라도 나름의 진정성이 담겨 있고 그로써 작품이 어필하는 과정에서의 논리가 억지스럽지 않다면 그 작품은 최소한 누군가의 예술에 대한 수요를 충족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강박에 빠진 작가와 다양한 성향의 작가를 수용하지 못하는 조그만 시스템은 그와 그 작품을 연결시켜주기란 매우 힘들다. 시스템은 그 시스템이 수용할 수 있는 작가만 수용하기 때문이다. 나치는 <퇴폐미술전>을 열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이란 미술을 양성했고, 미국은 <모마>를 지었다. 한국에도 작품을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이 하나 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작품들은 이다음의 의미를 생산해낼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지 않은 까닭이고, ‘화가로서의 당위성’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작가들더러 “쫄지 말고 솔직한 당신의 작업을 하세요”라는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쫄지 말고 자기 작업을 하기 위해선 배짱이나 자존심보단 나중에 어떤 작업이 성공하는지 엿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막상 자기가 처한 현실의 어느 지점을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감수성 자체도 훈련되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막연하고 좀 무모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아래 두 가지를 가정해보았다. 1) 젊은 작가들이 거창하고 권위 있는 말들을 선택하여 방어적인 태도로 작업을 하다가 결국 도태되어 버리는 것엔 환경의 탓이 더 크다. 그리고 2) 어떻게 남의 얘기들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본인이 경험한 현실에서의 일들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 더 매력적인 작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3)작가들이 도태되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적절히 해나가기 위해선 작가 스스로의 작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의 시선이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얘기를 솔직하고 집요하게 풀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되어야 할까? 필자는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글’과 ‘공간’, ‘관객’이라는 환경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지 그 나름의 대안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먼저, 필자는 작가들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사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기회를 잡지 못하는 작업이 양산되는 것은 게으른 작가의 태도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서도 이미 시스템의 부당함에 대한 무기력한 태도와, 예술가라는 ‘특권’은 챙기려는 무책임한 태도를 지적하고자 했었다는 것을 알아주길 당부한다.)

4. 관객

정확히 언젠가부터인진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천만 명 이상이 보는 영화가 많아졌다. 한 해에도 1~2 편 정도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 최근에 대형 영화관들도 많이 생겼다. 그만큼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영화와 비슷한 경우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요즘엔 누구나 쉽게 이어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음악이 들을 수 있는 환경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음악을 들으려 할 것이다. 필자의 부모님은 스마트폰을 사신 후 가장 먼저, 거기에 음악을 넣어달라고 하셨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영어수업에 들어가 자기소개를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취미로 ‘음악 감상’과 ‘영화 감상’이라는 ‘문화 활동’을 취미로 말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문화생활’에 대한 수요는 경제적인 특권을 가진 소수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란 얘기를 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는 비록 일부 영화나 일부 음악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 사회는 그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취향을 가진 요구들이 잠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배고파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물만 마시는 것처럼, 지배적인 형태의 문화 상품들이 그 모든 수요를 대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미술’의 경우엔 그것이 좀 다르기도 하다. 미술의 수요는 매우 한정적이다.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미술을 통해 자신의 미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에 불과하다(그게 이 시스템을 유지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겪는 문제는 바로 이 수요와 공급의 비대칭에서 비롯된다. 적은 수요에 비해 공급은 꽤나 과잉이다. 그러면서도 미술의 가치는 희소성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 공급 과잉은 점점 커져가고 수요는 더 희소한 것을 향해 수렴한다. 그러기에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사족을 달자면, 몇몇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술대학의 폐과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함에 있어서도 이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공급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는 작업들이 적은 취향이 추구하는 희소성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에서 이 문제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 영화 관람이 매우 일상적인 행위가 되자 해외 대형 뮤지컬이나 팝스타들의 내한 공연이 많아졌다. 모든 사람들이 영화만 보고 싶고 mp3로 음악만 듣고 싶어서 그걸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뮤지컬이나 콘서트가 일상적인 수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들이 그랬듯이 또 다른 형태의 문화생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미술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수요가 감지될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방법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다.

각자 나름의 생업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지만, 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작게는 문방구에서 고르는 노트의 색깔에서 부터 크게는 (자급자족으로서의) 예술 창작까지의 예술적 수요를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예술가들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충분히 다양해져도 모든 사람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론을 제시할 수 있다. 다양한 수요에게 다양한 감수성의 작업을 어떻게 유통시키느냐가 관건이다. 내 작업이 필요한 곳에 내 작업을 위치하게 하는 것, 그 방법에 대한 고민이 그림 그려 먹고 사는 삶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그것이 꼭 그 작업의 희소성을 사고팔고 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어야만 할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술’에 대해서도 결핍되어 있길 바라며 똥줄을 태운다.

5. 공간

필자가 미대에 입학하고 조금 적응했을 때 쯤 읽었던 책은 유현미 작가의 <아트맵>(청어람미디어,2004)라는 책이었다. 한국에 어떤 전시 공간이 있고 어떻게 공모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은 10년이 된 책이다. 과연 그 책에 소개되었던 공간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은 몇 군데나 될까? 그리고 그 책 이후로 몇 군데나 새로 문을 열었고 닫았을까? 게다가 책에 미처 소개되지 못한 곳들의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또한 책을 갱신하기 위한 작업을 하다가 사정이 생겨 중지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시 책을 엮어야 한다면 아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금 당장 그 책을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거기에 쓰인 대부분의 공간들은 연례행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개되었던 거의 모든 갤러리엔 매년 연초마다 공모를 통해 열리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공간의 정체성이나 추구하는 목표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물론 10년 전 이야기이다). 이처럼 공간은 저마다의 설립 목적이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프로젝트를 통해 각각의 공간들은, 애매모호하게 “좋은 전시를 열어 누군가의 작품을 보여주겠다” 정도가 아니라, “이 공간의 취지는 A입니다. B라는 작품들을 보여줌으로써 이 공간이 속한 지역과 사회에 C라는 기능을 할 것을 기대합니다.” 정도의 디테일한 정체성을 확보하길 원했던 것 같다. 비록 10년 전 일이고 그 땐 지금보다 시장 상황이 좋았을 것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어찌됐든 지금보단 열정적으로 전시가 열렸고 작가들도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게 거품이었든 아니든) 많은 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때의 전시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의 전시는 공간의 정체성과 개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상태에서 비슷비슷한 것들을 경쟁적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은, 전시를 지루하게 만들고 그 공간의 당위성이나 목적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뭔가를 제시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누구도 그 ‘뭔가’가 이전에 전시했던 사람이나 옆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사람의 ‘뭔가’와 같은 것이라곤 얘기하지 않는다. 작가들이 처한 환경이 비슷비슷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개개의 작업들이 ‘유행’이나 ‘사조’, ‘시대정신’ 등등 하는 말로 수렴되어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개성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유행이나 시대정신에 비추어 봤을 때 조금은 힘빠지는 일이다.

특정한 공간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지향점에 적합한 특정 작품들을 선택하고 전시할 수 있을 때, 저마다의 공간엔 저마다의 작품들이 걸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열릴 것이다. ‘어딘가’이거나 ‘그 어딘가의 워너비’나 ‘그 어딘가의 클론’만이 가득한 곳은 ‘누구’나 ‘누구 워너비’나 ‘누구 클론’같은 사람의 작업만이 취급될 것이다. 그리고 어디 같지 못한 장소나 누구 같지 못한 사람은 도태되고 루저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지금 모든 공간들이 같은 목적을 갖고 있거나, 같은 정체성, 같은 미감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옳은 것이기라도 한다면, 이런 필자의 생각들은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 하겠다..)

6. 글

여기서 필자는 평론가를 비롯해 미술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역할을 제안해보려 한다. 필자는 이 무기력해져있는 작가와 공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관객들을 바로 잡기 위해선 글의 역할이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로써 여러 공간들이 (포기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 나름의 정체성을 회복할 여지를 불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글을 써보자고 제안하는 글을 써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글이어야 할까?

중세에 사람들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글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둘의 역할은 역전되었다. 우리가 중세의 그림을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글을 함께 볼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관련된 글을 읽은 후에야 ‘알겠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작품을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엔 항상 글이 첨부되어 있다. 아마 작품을 보는 것만으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에 충분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을 떠나며 소주나 고추장을 챙기듯이, 매번 다른 이미지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미지 자체보다 덜 부담되고 익숙한 도구(글)에 습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작업도 이러한 것들 아닌가? 무언가의 예술적 가치를 글로서 평가하고 보증해주는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관된 객관적 기준이라기 보단 저마다의 기준에 입각해 글을 쓴다. 각자의 툴을 가지고서 각자가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시나 작업에 붙어 각개전투를 하는 것은 다양한 의미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를 옹호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옳은 목소리라 하더라도, 혹은 그들이 아무리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흩어져 있다면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기까진 힘이 부친다. 혼자선 이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담론으로의 형성될 정도의 역량을 갖추진 못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엔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인식의 빈곤까지 갈지도 모른다. 지향점만큼이나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역량이다. 그 흩어져있던 역량들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다면 코앞에 놓인 만성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작품이나 작가라는 아무 작은 단계로 들어가기 이전에, 전시 등의 프로젝트가 실질적으로 성립하도록 해주는 더 본질적인 단계를 냉정히 따져보는 것에 그 목소리들의 힘을 집중해보자는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7. 결론

위의 글들이 너무 길고 장황했다. 그것에 비해 결론은 매우 심플하다. ‘특정한’ 공간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전시를 기획하여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고 전시를 하고 이 과정에서의 합리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시중에 많이 있는 작품이나 작가의 해설서가 되거나 작품이나 전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식의 단순한 글이 아니라, 그 ‘공간’과 그 공간이 기획한 ‘전시’의 ‘관계’에 대해 비평하는 글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올라오는 글들은 점점 작품 평에서 전시 평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글들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변호하는 것 이상의 것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공간의 정체성에 대한 얘기가 조금 더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삼청동에 위치한 저명한 화이트큐브라 할지라도 적자를 내면서까지 무엇을 위해 거기에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한 주장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커먼센터나 사루비아 처럼 장소나 공간의 특성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다(하지만 필자는 그 정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행동을 원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더 시니컬하고 예리하게 그 전시 등의 예술 기획을 따져볼 기회가 많아졌으면 한다.
예를 들어, A란 목적을 가진 공간의 전시가 있다. 그것과 작품 선정과 전시의 방법이 적절한가, 꼭 화이트큐브여야 했는가, 꼭 길거리 퍼포먼스여야 했는가, 그 공공 조형물은 그 장소에 놓여야 했는가, 전시 후 반응들은 처음 노렸던 효과와 비교해 봤을 때 어떠한가 하는 등의 말하자면, ‘작품이 유통되는 과정’에의 문제를 지적해보는 것이다. ‘너네 분명 이런 거 할거다라고 해서 지원받으면서, 도대체 왜 저런걸 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에 각각의 공간은 자신의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나 심사위원은 다른 곳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왜 다른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스스로의 기획물들과 그에 대한 반응을 통해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요구하는 내용의 글은 관객을 독자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글은 예술 기획을 만들어가는 전문가들을 위한 글이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기대하는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다. 글이 기획자와 그 공간을 향한다면, 공간들은 우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고민을 할 필요를 느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자신의 지향점과 정체성에 맞는 전시나 교육 등의 프로젝트를 기획하려 애쓸 것이다. 이 작가의 그림이 우리 갤러리에 맞는지, 이 작가의 작품은 전시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그곳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기성 예술가와 작업을 해야만 하는지,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을 할 수 있진 않는지, 어른이 봐야 하는지, 애들, 내국인, 외국인 누가 봐야하는지.. 등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에서부터 생각지도 못한 것들 까지, 다양한 문화-예술적 기획들이 그 요구자에게 능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할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저마다의 공간의 다양성이 확보되었을 때, 저마다의 공간은 저마다가 필요로 하는 감수성을 가진 작가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게 될 것이고, 그런 다양한 공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작가들도 소수의 취향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작업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질 수 있지 않을까?

8. 요약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행위를 위해서, 어느 작가의 작품이 어떤 사람한테 어떻게 보여지는 게 적절한지 공간의 정체성에 맞게 기획자가 기획단계에서 판단을 하고, 그 기획자의 기획 과정과 결과가 유기적이고, 타당했는지를 평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는 비평도 있어주면 어떨까, 쉽게 말해 작가/작품을 향한 비평의 구도를 큐레이터/전시공간 vs 비평의 구도로도 확장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장황한 글의 요지이다. 이런 글이 있으면 어떨까? 과연 필요는 할까? 어떤 효과가 있을까? 까진 장담할 순 없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작가와 작품이 어떻게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지 얘기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깨끗하고 인적 드문 공간에 전시해놓고서 이것이 세상을 바꾼다고 얘기하는 것 말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그런 말 말고, 그걸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이 맞는지에 대해 얘기해보자는 것이다. 목표는 절대 거창하지 않다. 서로서로 잘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적절한 작품을 적절한 관객 앞에 적절한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9…
제가 지금 군 생활 중이라 이 글을 쓰기 위한 다른 자료를 찾아볼 여유나 능력이 많이 부족했다고….

10.
부족한 능력으로 글을 쓰려다보니 여유가 많이 없어서 더 이상의 정리를 하기가 다소 벅차네요… 피드백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코멘트를 주고받는 식으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끝까지 읽어주신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