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휘_예술이란 이름의 창조적 노동을 위하여

2014.02.06  발행

홍태림 씨의 글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들에 대하여>(링크)에 대한 글입니다. 앞서 홍태림씨가 지적하신 <공장미술제>의 문제는 <공장미술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글을 썼습니다. 지극히 제 경험 안에서만 유효한 글일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객관성을 보장해드리진 못합니다. 하지만 도처에 만연한 무기력함 앞에 무기력한 우리의 태도는 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신다면, 부족한 문장이라도 애정어린 눈으로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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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특별한’ 직업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직업은 동등한 무게로서 특별하기 때문에 평범하다고 믿는다. 삶으로서의 직업이란 보편적인 특별함과 특별한 평범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업 예술가(이하 예술가)가 없는 세상과 폐지 수집가가 없는 세상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 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한편, 예술가는 다른 직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비단 어떤 예술가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비(非)예술가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예술가와 보통의 직업들과는 어딘가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은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예술과 예술가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비(非)예술가들은 그들에게 그 권리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1], 예술과 예술가를 향하는 대중들의 삐딱한 시선을 고려해 봤을 때, 예술가는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소통’에 대해 더 자주, 더 많이 언급한다. 과잉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예술가들이 일반적인 소통의 영역으로부터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지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당신이 하는 작업에 대해 가족들과 대화를 시도 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예술인 복지법’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다.[2] 삶에 필수적이고 특별하기까지한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실제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특별한 법이 있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한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불만 속엔 여전히 예술로부터 뭔가 효용을 얻기를 바라는 기대와 요구가 포함되어 있기도 할 것이다). 특별한 사람?특히 약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법을 만드는 것은 감정의 선에서라도 충분히 허용될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특별한 척’만 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납세자로선 큰 부담일 뿐이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지닌 ‘특권이 있는 약자’라는 이중성은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삶으로부터 그것을 단절되게 만들어 버렸다. 사회적인 요구는 무시한 채, 되려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희생에 기생 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술가에게 특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책임감 없는 행동들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백남준의 그 유명한 “예술은 고등 사기다”라는 말을 들며 “나는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갖고 노는 것이다”라며 정신 승리를 하는 그런 삶이 자랑인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당신이 꿈꾸는 백남준 같은 삶은 그저 몽상이거나 현실 도피일 가능성이 크다(백남준이 자란 환경과 당신의 환경은 다르다!). 게다가 미술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부조리들에 대해 “이 바닥은 원래 그래”라던지, “내가 좋아서 하는데 이정도 부당함 쯤이야”라는 식의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는 당신에게 “예술은 고등 사기”라는 백남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했던 ‘예술인 복지법’도 예술가 자신이 처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반증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나 비판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시스템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말만 바꿔 반복한 것일 뿐이다. 미술계를 뒤흔든다고?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그런 말을 하기엔 그저 미봉책이고 (자존심이란 것이 있다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빈곤한 상상력에 불과하다. 어떤 제도이든 사각지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예술인 복지법’이 한 인간으로서의 이땅의 예술가들의 삶을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 지에 대해선 필자는 다소 회의적이다.

태생부터 백남준 같은 삶을 살기 힘든 우리들은 백남준 같은 사람을 원하는 하나의 제도에 편입되고자 아등바등한다. 여러 다양성을 배제한 체 오로지 하나의 제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하며[3], 그 제도가 원하는 예술가가 되는 법을 체득 하려 애쓰기도 한다.[4] 그리고 학교에선 “너네 중 한두 명만 작가가 될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한다. 모든 예술가 지망생이 제도권에 들어갈 수 있으면 문제가 아니다. 아니, 사실 들어가도 문제이다. 그 제도권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부실할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임옥상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미술에서의 신선한 자극과 충동 그리고 새로움은 생명과도 같다.”[5] 미술의 이러한 속성이 외부 세계를 향한다면 세상은 예술로써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런데 현실의 미술계는 외부 세계의 충격으로부터 휘청거리고 있다.[6] ‘예술인 복지법’을 만들어 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어떤 예술가들의 모습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여줬던 찝찝한 모습은 우리 안에 내면화 되어 있는 어떤 무력감과 닮아 있다. 이를 ‘예술’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면, ‘예술가’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필자는 제도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끊임없는 잡음이 삐져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곳에서의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무엇을 위한 예술인지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무엇을 위한 무엇인지 까지, 도무지 명확하지 않거나 상식을 뛰어 넘는 괴상한 일들이 벌어질 때[7] ‘제 논에 물 대기’, ‘제 살 뜯어 먹기’ 같은 말을 더이상 남말하듯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대안공간이니 협동조합이니 하는 것들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제도권 미술계에, 혹은 타인들에게 빌붙어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우리는 ‘예술’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도 고상한 기풍은 놓치진 못하는 DNA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집에 가선 “언젠가는..” 이라 달래며 찬바닥에서 ‘뽕’을 맞는다. 하지만 다음날 그런 당신이 집에서 나와 현장으로 가면, 심지어 전태일의 전기를 다루는 영화를 찍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노동법을 어겨야만 할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유머러스 하지만 전혀 유쾌하진 않다.

소통을 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목소리의 크기보다 말의 무게일 것이다. 특히 삶의 부분 부분에 예민하게 반응을 해야 하는 예술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자체도 뭔가 모순이지만?’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주류’인 제도권 미술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기회를 잡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임근준 선생님의 가이드라인만 해도 최소한의 조건들일 테다). 쉽지 않은 만큼 치열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살아 남기 위해 남들 이상으로 미쳐야 할 것이고, 살아남지 못하면 미쳤던 만큼 병신이 되기도 쉬울 것이다. 큰 권력을 지닌 제도권 미술이 부실해질수록 예술가 지망생들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제도권 미술이 더 적은 수의 예술가를 허용 할수록, 그러면서도 더 큰 권력을 휘두를 수록 더 많은 수의 예술가 지망생들은 취업을 하거나 교육자가 되는 ‘루저의 길’을 택하게 된다(물론 그들은 루저가 아니다!). 목소리를 낼 기회를 잡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그 목소리로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삶의 주체로서 더 중요한 문제이다. 예술가의 권리를 둘러싼 문제는 사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에 대한 문제까지 확대할 필요도 없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권리를 요구 하는 것만으로도 그 문제의 근본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대접조차 받지 못하면서 얻어내는 전시 경력 한 줄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철이 없는 필자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삶이나 예술가로서의 삶 그 둘 중 무엇 하나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빈약한 제도 속에 굳이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일인지에 대해선 한 번 쯤은 심각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모든 인위적인 것들을 의미한다.[8] 물론 예술이라는 형태의 인간의 기획들도 그 문화적 산물 중 하나이다. 문화라 불리는 인위적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그것의 의의가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자신들이 이룩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들이 자신의 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전제이며 본질인 것이 바로 ‘소통’이다. 혹시나 소통을 가로 막는다거나 인간적인 삶을 파괴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재평가되어야만 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시스템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들이 어떠한 양상으로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 확인해봤다. 예술가가 특권이 있는 직업이든, 평범한 직업이든, 우리가 원해서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그 역할에 요구되는 기대에 대해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그러한 부조리를 생산해내는 시스템으로의 진입을 희망하고 있다. 틀 속에서 꾀할 수 있는 변화란 그 틀의 본질을 바꿀 수 없는 형식적인 변화에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만 허용되는 제한된 상상력과 창의력은 형식적 변화의 경험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한 시대 속에서 호흡하는 예술가로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설득시키기 위해 심리적·물리적인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예술가들은 그것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상 좀 더 떳떳하고 주체적인 태도로 예술이란 이름의 노동을 행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 언제나 인간은 예술을 필요로 한다. 라스코 벽화부터 Daft Punk의 음악까지, 인간은 한 순간도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오늘날 세상은 예술이, 특히 미술이 그 신뢰를 회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조금 더 자신의 상황에 솔직해지고 그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반응해야만 하는 까닭은 우리가 만성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 무기력함을 극복해야만 비로소 이땅의 예술이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우리가 자존심을 토대로 예술을 강요하며 고집을 부렸었더라면, 오늘부터 우리는 예술로써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21세기를 사는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인간의 운명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증명해내는 것임을 믿는다. 고로 예술가로서 우리의 인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시도만으론 부족하다.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틀을 뛰어 넘는 창조적 상상력을 향한 열정이다.